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도시락 한방현숙 Jul 12. 2016

그 해 겨울은 '사실' 따뜻했네.

엄마의 발병 원인


고등학교 기말고사 후 단체 영화 관람을 갔다. 유지인과 이미숙이 자매로 나오는, 시커먼 탄광에서 울부짖는 주인공들의 얼굴들이 너무 까맣게 느껴지던 아련한 영화였다.

 다음날 국어 선생님은, 이 영화를 의미 있는 문학 작품으로 ‘박완서’의 이름과 함께 내 가슴에 심어주셨다. ‘ 그 해 겨울은 따뜻했네’  전쟁의 상처로 가슴 깊은 곳까지 후벼 파인 주인공들의 삶이 그래도 따뜻했던 이유를 알아내기 위해 한참을 애를 쓴 기억이 난다.

     

 돌아보면 내게도 따뜻한 겨울이었다고 말할 수 있을까? 그 해는 지금처럼 무더운 한 여름을, 폭싹 무너져 내린 삼풍백화점으로 더욱더 힘들게, 어렵게 더위를 이겨내야만 했던 해였다. ( 그러고도 20년이 흘렀는데, 우리는 다시 세월호를 겪었으니, 우리나라가 얼마나 제 자리에서 헤매고 있는지 부끄러워 고개를 들 수가 없다.) 몇 백 명의 소중한 목숨들이 한순간에 날아갔을 때 얼마나 아파하고, 슬퍼했는지 그 해 여름은 정말 무거웠다. 다가올 겨울을 모른 …….

     

 그래도 시간이 가고, 계절이 오고 그 해 겨울이 되었다. 학교에서 아이들은 기말고사를 치르고 있을 때였다. 시험 감독을 하면서, 아이를 봐주기 위해 매일 우리 집으로 출근하시는 엄마를 생각하고, 최근 직장을 다른 도시로 옮긴 오빠를 생각하며, 때마침 학교로 건강식품을 팔러 온 영업 사원을 떠올리며 가족을 위해 보약이라도 사야겠다는 생각 등등을 하며 하루를 마무리한 날이었다.

     

 그 날 나는 늦은 시간까지 오빠와 같은 나이 브래드 피트가 연기하는 ‘가을의 전설’을 보고 형제간의 우애를 떠올리며 잠자리에 들었었다. 전화벨이 울린 것은 새벽 3시였다. 전화벨 소리만으로도 그렇게 엄청난 공포와 경악의 효과를 낼 수 있다는 것을 전에는 미처 몰랐다. 이틀 전까지 주말에 우리 집에 들러 낮잠을 자고 가던 오빠였다. 나의 딸, 첫 조카를 주머니에 넣고 출근하고 싶다던 그 시절에는 있지도 않은 조카바보를 자연스럽게 행하던 오빠였다. 그 오빠가, 나에게 하나밖에 없는 형제, 오빠가 하루아침에 사라져 버렸다.

     

 그 후 우리 가족은 철저하게 무너졌다. 생때같은 자식을 잃은 어미의 깊은 피울음은 오랫동안 우리 가족을 할퀴었으며, 납득할 수 없는 한 젊은이의 죽음 앞에 모든 상식과 일상은 마비되어 버렸다. 그렇게 1995년 아픈 겨울이 지나가고 있었다.

     

 오빠가 가고 일주일에 한 번씩 재를 올리니 49재가 겨울 방학과 함께 끝났다. 그 차디찬 법당 바닥에 고꾸라져 한 없이 피 토하는 엄마의 슬픈 모습은, 형제를 잃은 나의 슬픔 따윈 느낄 겨를도 주지 않았다. 또 한 사람을 잃어버릴까 봐, 또 하나의 사랑을 놓칠까 봐 마음 졸이던 그 해 겨울이었다. 얼마나 오빠가 소중했었는지, 내가 얼마나 오빠의 사랑을 받았었는지, 우리는 얼마나 서로 다정하고 의좋은 오누이였었는지, 우리 가족에게 남은 것은 사랑뿐이었다는 현실에 가슴을 뜯으며 후회하고, 아파하고, 그리워하던 그 해 겨울이었다.

     

 자연스럽게 서점에 들러 ‘죽음’과 관련된 책을 찾게 되었다. 나에게 아무 예고 없이 다가온 첫 번째 험악한 죽음을 도저히 납득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다른 이들에게서 경험을 공유하고 싶었는데, 운명일까 싶은 생각이 들 정도로 거기 또 ‘박완서’의 책이 있었다.

     

  ‘한 말씀만 하소서’ 그 책을 읽어 드리며 엄마와 나는 길고 긴 겨울을 이겨낼 수 있는 힘을 얻었다. 아들을 잃은 어미 마음은 시대를 대변하는 훌륭한 작가나, 우리 엄마나 모두 같았다. 하나밖에 없는 외아들을 잃은 참척의 고통을 서로 나누며, 결국에는 받아들이는 것이, 운명에게 화해의 손을 내미는 것이 결코 지는 것이 아님을, 그 어려운 고비고비마다 이겨낼 수 있는 힘을 얻었다. 물론 20여 년의 기나긴 시간이 걸렸지만…….

     

 밑바닥까지 가 본 사람들은 안다. 가장 춥고 헐벗은 때가 어쩌면 가장 따뜻했던 다른 의미로 다가올 때가 있다는 것을……. 어쩜 1995년 그 해 겨울은 사실 따뜻했을지도 모른다.

     


     

다음은 5월 어느 날 브런치에 올렸던 글이다. 다시 그리운 오빠를 추모한다.

     

오빠 가고 4년 뒤

오빠 따라 나도 33

아무것도 아니었다.

너무 어린 나이였다.

     

언제나 나보다 4살 어른이었던

그래서 언제나 어른일 것 같았던

어쩌면 너무 어린 서른 하고도 세 살.

     

부서지는 햇빛 속의 얼굴은

언제나 아리었다.

거치른 살결 위의 눈동자는

언제나 흔들리었다.

     

철로 끄트머리부터 점점 부풀어 오르는

오빠는 오늘도 어디를 가려한다.

     

생전에 즐겨 입던 양복 차려입고

길쭉길쭉 팔다리 움직이며

유난히 길었던 목을 한껏 젖히고

나를 한번 보고는 손까지 흔들며

꼭 그렇게 어디를 가려한다.

     

어디선가 김광석 노랫소리가 들린다.

그 노래 자주 들리던 때 그렇게 함께

가버린 나와 같은 유일한 나뭇가지 하나.

     

나의 가슴에 평생 치우지 못할

돌 한 덩어리 얹어 놓고

스무 해 동안 매일 한결같이

철로 끄트머리 언저리에서 사라지려 한다.

     

어서 가야 한다.

햇빛 속으로, 철로 끝으로 훠이훠이

발걸음 움직이며 만나러 가야 한다.

그러나

여전히 나도 스무 해 동안

이 쪽 편에 붙박이로 서 있을 뿐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아기아기 잘도 잔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