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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값과 무언의 응원에 대한 생각

5. 유방암 수술 후 항호르몬치료기

by Psyber Koo

곰이었던 웅녀는 인간이 되고자 100일을 동굴에서 쑥과 마늘을 먹으며 견뎌냈다는 단군신화를 DNA가 꺼내준 걸까? 통증이 무섭게 몰아쳐대는 바람에 모퉁이로 몰린 난 무슨 생각에서인지 나의 100일을 웅녀의 현대판이라 상상하며 지내기 시작했고 우습게도 ‘뼛속까지 웅녀’ 자손이라 그런지 조금 덜 외로웠다. 나의 괴로움이 동굴에서 오롯이 혼자 감내해야 하는 그녀의 것과 비슷할지도 모른다는 착각에 위안이 되었다.


작년 12월 말 수술부터 4월 초 4차 항암까지 약 100일 동안 겪은 고통은 이전에 경험한 것들과는 차원이 달랐고, 그래도 나름 잘 견뎌왔다 생각했다.

고통스런 날들의 연속이었지만 지금에서 돌이켜보면 그래도 유방암 수술과 후항암ac화학요법 4번을 천신만고 끝에 무사히 마쳤음을 자부하며 내심 스스로 대견히 여겼는데, 이내 어디서 자만이냐는 호통이 들리는 것 같았다. 앉지도 눕지도 못하는 통증이 몰아닥쳤고 별의별 증상이 나타났던 항암후유증에 익숙해져 있던 난 4일 밤낮의 요상한 통증이 지속되자 뭔가 잘못되었음을 직감했다.

그래. 그렇지.

인생은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다고 어른들이 말씀하셨지.




항암AC화학요법 3차부터는 근육통에 시달렸는데 4차 후에도 마찬가지였다. 사지 외 수술부위 쪽 통증이 빈번했고, 등 쪽에서도 날개가 날것처럼 아팠다. 3, 4일 정도 잠 못 이루는 통증이 있었고 약 한 달간 통증에 익숙해져 있던 터라 그러려니 했다.

지난 몇번이 그랬듯 통증은 어차피 사라질 테고! 이제 항암이 끝났으니, 날도 좋아졌으니 문밖으로 나가고 싶었고, 걷고 달리며 발에 닿는 맛을 느끼고 싶다는 생각만 가득했다.


욕심이었을까?

내 상황을 객관적으로 고려하지 못한…

또… 모자란..여전히 모지리란 말인가?


항호르몬치료를 위한 상담일(항암 4차 +2주) 아침 샤워를 하다 극심한 통증이 있던 등 쪽과 가슴 쪽에 동전크기의 붉은 반점이 관찰되었고, 교수님은 크게 동요하지 않으셨다. 그러나 다음날 확인해 보니 붉었던 반점이 수포로 변해있었고, 밤새 아팠던 부위에도 붉은 반점이 추가로 생겼다. 아… 동요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다. 이건 또 뭐란 말인가?


2025년 4월 4일.

조금씩 수포로 변해가는 몸의 반점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긴다.

11시 22분. 잊지 못할 헌법재판소의 선고와 파면주문을 생생하게 확인하니 어쩐지 마음이 가벼워졌고 이내 나도 결단이 필요함을 인지했다.

열도 없이 통증만으로 대학병원 응급실로 갈 수는 없고 교수님 진료는 사흘 뒤인 다음 주 화요일에나 가능한데 그러면 수포발생 후 72시간의 골든타임을 놓치게 되는 거니, 입원했던 암면역병원으로 증상을 문의하고 그곳으로 향했다.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

대상포진이었다.


항바이러스제와 통증약을 먹어도 가라앉지 않는 쿡쿡 쑤시는 통증에 잠 못 드는 밤은 계속되었고 약도 여러 번 수정해 약 복용을 시작한 지 일주일이 다 되어가서야 약이 맞아 들었다. 통증계에서는 대상을 주어야 마땅하다는 생각이 드는 또렷하고 확실한 통증들..

약효가 떨어지면 어김없이 숨을 멎게 하는 찌르기 권법이 시작되었기에 약 복용시간이 가까워오면 자연스레 조마조마한 마음만 깊어졌다.


최근에 경험한 항암ac화학요법도 그랬고, 항호르몬치료로 처방된 졸라덱스주사도 그렇고 대상포진마저… 모두 이름값을 제대로 한다.

ac, ac를 외치게 되는 항암 후유증, 너무 아파서 욕이 저절로 나오는(졸라) 주사, 통증이 대상감이라는 대상… 누가 지었는지 진짜…

읊조리다 보면 더 찰떡같은 이름이다.

후… 그나저나… 나는 이름값을 하고 있나?




항호르몬치료를 시작한 지(타목시펜 복용) 열흘쯤 되었는데 약간의 부작용이 보인다. 얼굴에 좁쌀 같은 붉은 반점이 얼굴을 덮기 시작했고 몇몇은 여드름처럼 익어가고 있다. 약간의 불면증도 꼽을 수 있는데 이건 여차저차로 통증이 지속되는 일상이기에 아직은 결정짓기 이른 것 같아 좀 더 지켜봐야 할 것 같다. 가장 위험한 혈전방지를 위해 체위를 자주 변경해야 하는데 피로감이 더해져 몇 시간이고 고요하게 앉은 그 자리에서 꼼짝 않고 머무르고 싶다.


협진한 재활의학과 교수님과 이런저런 얘기를 하며 암은 교통사고 같은 거니 원인을 찾으려 말고 그냥 움직이라는 말씀을 하셨는데, 좀 움직이면 과하게 아픈 이 몸뚱이를 어쩌란 말인지… 나도 모르게 한숨이 새어 나왔다.


미래의 나는 과연- 무수한 노력을 거듭하여야 가능할까 말까 하는- 과거와는 다른 생활패턴을 장착하고 일상을 이어갈 수 있을까?

또 새어 나온 긴 한숨에 무안해져 눈을 돌리니 항암치료로 검게 물든 엄지발가락이 빼꼼하고 인사를 건넨다. 항암제 고통으로 인해 모세혈관이 터져 검게 멍든 발톱. 저 끝에 있는 내 몸이 내게 건네는 무언의 응원.


피를 깃발로 삼은 검은 발톱의 인사가 애잔하면서도 새삼 귀여워 잠깐 빠졌던 거무퉤퉤한 생각들은 지우고 슬쩍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나 본다.




항암화학요법주사 종료를 축하해준 고마운 동생과의 소중한 티타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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