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화. 그리고 데뷔

수술동의서가 아닌 곳에 사인하는 마음

by Psyber Koo

적극적인 항암치료를 위해 일을 쉬는 중이기에 시간이 허락되었고 몸을 추스르느라 정신을 못 차리던 시간이 지나자 제버릇 개 못준다고 슬슬 몸이 근질거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일을 할 수 있는 정도의 체력은 아니기에 이 시간을 어떻게 보내야 하나 고민이 들었다. 지금 아니면 할 수 없거나 하기 어려운 것들을 꼽아보려니 의외로 막막했다. 음악은 이제 연주대신 감상으로 길을 잡았고 독서활동과 브런치 연재로 이어오고 있으니 미술을 선택하기로 했다. 미술도 음악만큼이나 아는 게 없지만 조용히 미술관을 찾아 그곳에서는 보이지 않는 작가의 노고를 떠올리며 걸으면, 나로서는 전혀 가늠하기 어려운 끊임없었을 노력에 숙연해지고 무언가 웅장함이 느껴지는 경험을 했기에 그런 생각이 들었던 것 같다.

항암치료로 몸도 마음도 찌그러져있는 내 에너지를 미술적 방법으로 해소해보자 싶었는데 마침 지역사회에서 마련한 판화, 수채화 수업이 개최되어 연달아 수강했고 버킷리스트에 대한 로망이 없는 내가 수업을 함께한 사람들과 공동작품전까지 여는 지경에 이르렀다. 어디 가는 열차를 탔길래 여기 있나 싶다. 이렇게 일상생활을 재개할 수 있다는 것에 감사한 마음이 그득하다. 한켠엔 그전에도 심지어 바로 몇 달 전인 항암치료 중 병상에서도 생각해 본 적 없는 전개라 얼떨떨할 따름이다.


그렇게 취미를 채우다 보니 이들을 업으로 삼지 않고 취미로 즐길 수 있어 다행이다 싶고 감사했다. 누군가 이야기한 ‘취미는 돈을 내면서도 좋아할 수 있는 것이어야 하고 일은 돈을 받으면서도 싫어해야 하는 숙명’을 다시금 깨닫게 된다. 내겐 미술, 음악으로 ‘돈을 받을 수 있는 수준’ 그러니까 소위 말하는 업에 도달하는 것은 이번 생에는 글렀음이 이번 활동들을 통해 확실해졌다. 그러니 이들은 기회를 만들어 취미로 즐기며 내 삶을 가꾸는데 도움을 받는 것으로 만족하기로 결론을 냈다. 취미에 대한 생각의 끝에는 자연스럽게 업에 대한 고찰로 이어졌는데, 심리적 건강과 적응을 위해서 임상심리학적 지식을 활용하여 심리검사 및 평가, 심리치료 및 상담, 심리재활, 심리자문등의 업무를 수행하는 ‘임상심리사’인 내가 다시 그 업을 이어갈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생각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또 저 멀리 안드로메다로 날아가기 일보직전. 집요하게 집중되어 편향적이기까지 한 이 생각들을 분산하기 위한 노력이 필요한 시점이다.


기회가 닿았다기보다는 운이 닿았다가 더 정확한 표현인 것 같은데 마침 시간이 허락된 이 시점에 지역에서 국제규모의 비엔날레가 개최할 준비를 하고 있었고, 주최 측은 개최이래 최장기로 진행될 행사라 전문도슨트를 양성하기 위해 지역 대학교와 협업으로 시민에게 도스트양성과정을 운영한다는 공고가 올라왔다. 마침 업으로 무거워진 생각을 분산하기 위한 노력으로 이것저것 뒤적거리며 웹서핑을 하던 중 이 모집요강을 발견해 서류를 작성해 지원했다. 제출일 하루 전이라 빠르게 작성했고, 운 좋게 합격해 1달 동안 처음 접하는 수업들을 들었다. 도슨트의 기본소양교육 및 역할, 관람객과의 소통과 응대 역량강화등 잘 짜인 교육과정과 더불어 전시장 투어와 시연실습까지 마치고 최종심사에서 우수자 그룹에 선정되어 전문도슨트로 활동할 기회가 주어졌다. 이렇게 생각지도 못한 새로운 포문을 열게 되어 비엔날레 현장에서 국내외 관람객에게 세계적인 작가와 작품 그리고 우리 지역을 알리는 역할을 담당하게 되었다.


암치료에 돌입하며 주변에서는 이제 일은 쉬라 한다. 그러나 암은 생활습관과 관련된 질병이므로 일에 그 모든 책임을 물을 필요가 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추스른 몸으로 목표를 만들고 도전하는 것, 이것은 예전 나의 모습 그대로이니 반갑고 익숙하다.

떨리는 심사 후, 노력하며 도전하는 내 모습을 다시 볼 수 있다는 것 자체가 감사했다.

전시개막 전날 최종 점검 및 준비를 위해 도슨트 팀이 모여 전시장에 들렀다. 한동안 수술동의서 사인만 한가득 늘여놓던 내가 듣도 보도 못한 이름인 도슨트채용계약서에 사인을 하다니… 감회가 새롭다. 아픔을 잊기 위한 취미로 예술활동을 하던 중 업으로 예술을 설명하는 사람이 되기 위한 첫발을 딛는다. 삶에서 이 또한 전혀 생각해 본 적 없는 전개다. 이 열차는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인지 모르겠지만, 주어진 역에서 최선을 다하며 즐기기로 한다.


익숙한 일로 복귀가 아니라 새로운 업으로 사회에 나가는 것, 나이도 나이거니와 병상에서 막 나온 몸이라 적응에 걱정되어 설레임보다 두려움이 더 컸다. 새롭게 도전한 이 업을 마주하며 나는 어떤 태도로 전시해설가, 도슨트에 임할 것인가 생각해 본다. 나의 태도를 한 문장으로 정리해 60일간의 여정을 이어가려 한다.

첫 도슨트를 앞두고 전시장 앞에 섰다. 두 발을 모으고 도슨트 안내 마이크를 켜며 만감이 교차한다. 스크립트와 동선을 수없이 준비하며 설렘과 걱정이 잘 버무려진 이 살아있는 느낌을 다시 맛볼 수 있다니!

도슨트 데뷔라…내 삶에서 뜬금없어 보이기도 하지만 자연스러운 전개 같기도 하다.

“안녕하세요. 예술로 오감을 되살려 마음을 빚는 전시해설가, 도슨트구효진입니다.”

새로운 도전이자 기회가 내게 와닿은 감사함을 담뿍 머금고 전시와 관람객을 연결하며 스스로 정한 이 말을 지키려 노력할 것이다.





도슨트 데뷔를 앞두고 만감이 교차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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