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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름밤 Sep 22. 2020

아버지의 딸에서, 아들의 엄마로

서른(而立), 비로소 서다.

수험 생활을 계속해야 하니 근처로 이사를 오거나, 방 한 칸을 내어줄 테니 집과 짐을 정리해서 들어오라는 부모님 말씀을 따르려던 소심한 우리 부부는 결혼 이후 처음으로 우리의 목소리를 내기로 결심했다. 다음 시험까지는 또다시 일 년이 남았음에도 아빠는 내가 독서실 가는 길에 아이를 어린이집에 데려다 주고, 네 시에 데리고 와 돌보는 그 저녁 시간마저도 아까와 하셨다. 내게 내 자식이 소중하듯, 사랑하는 딸의 인생이 안타까웠던 부모님의 마음이셨고, 쉽게 내어줄 수 없는 희생이고 헌신이셨다. 나 역시 그 마음만은 저버릴 수 없다고 생각하며 버텨온 날들이었다.


하지만 우리는 하루가 멀다 하고 부딪혔다. 당시 엄마는 낙상 사고로 허리에 두어 달은 절대 안정이 필요한 수준의 골절상을 입으셨기에, 엄마가 누워계신 사이 산적한 집안일과 끼니를 책임질 사람도 필요했다. 이번만큼은 그게 내 몫이길 바랬다. 이번만큼은 힘이 되는 딸이고 싶었다. 하지만 그런 작은 수고로는 부모님께 아무 힘도 도움도 되어드릴 수 없었다.


동상이몽이었다. 내가 집안일이나 부엌일을 하고 있을 때마다 아빠는 한숨을 쉬셨다. 언젠가 계약직 교사로 일한 첫 월급으로 선물을 사드렸을 때, 이런 선물은 하나도 기쁘지 않다고 말씀하셨던 것처럼. 어느 날 아침 집을 나서며 남편에게 전화를 걸어 솔직한 마음을 꺼내놓다 주체할 수 없는 눈물이 흐르기 시작했다. 나 더 이상 부모님께 의지하고 싶지 않아. 여기에 있으면, 나는 영영 주원이 엄마가 될 수 없을 것 같아.

어쩌면 그 날 나는 그저 대안 없는 하소연이 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남편은 달랐다. 이전까지 오히려 부모님의 말씀을 당연히 따라야 한다고 생각했던 남편은 그 날 아침, 떠나야 한다는 확고한 결심이 섰다고 했다. 마침 남편의 전 직장이 판교역 인근으로 이전을 했고, 우리는 근방에 세 식구가 살 집을 구하기로 했다. 목적은 세대 분리였고 다른 마음의 여유는 없었다. 남편의 점심시간 한 시간 동안 세 집을 둘러본 뒤 그 중에서 결정하기로 했다. 집을 구경한 바로 그 날 가계약을 하고, 남편과 함께 부모님 앞에서 이사를 가겠노라고 말씀을 드리던 그 밤. 그 공기를 잊지 못한다.

결혼 예식 이후로도, 아이 엄마가 된 이후로도, 한 남자의 아내, 내 아이의 엄마이기보다 엄마 아빠의 보호를 받는 딸이었던 나였기에. 그 날 밤의 일방적이고, 무례했던 이사 통보는 늦어도 너무 늦은, 면목 없고 소심한 독립 선언이었다.

부모님께는 상처가 되었을 그 밤, 나는 이제는 조금은 떳떳한 내 아이의 엄마가 되었다는 생각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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