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더라이브러리 Jun 16. 2024

태어나줘서 정말 고맙다!

ISFP 동생 이야기 #10


올해 내 생일은 태어나서 처음으로 아빠가 안 계신 생일이었다.


가족의 생일마다 우리는 꼭 모두 모여 밖에서 다 같이 밥을 먹고 집에서 케이크에 초를 붙이고 노래를 불러왔다.


올해에도 외식은 했다.

집에 오는 길에 케이크에 꽂을 초가 없는 걸 알았지만, 어차피 촛불을 불고 싶지 않아 그냥 초를 사지 않고 집으로 들어왔다. 노래와 촛불을 생략하고 케이크를 먹었다.





고등학교 2학년 때의 나는 하루 종일 방문을 꼭 닫고 틀어 박혀 있다가 밥 먹을 때만 잠깐 얼굴을 비추는 딸이었다. 아마 사춘기였나 보다. 부모님이 공부로 크게 부담을 주는 것도 아니었고, 불만이 있을 거리가 딱히 없었는데도, ‘부모가 내 마음을 전혀 몰라주는 사춘기 고등학생’의 클리셰에 혼자 괜히 꽂혀 엄마와 아빠가 어떤 말을 건네도 심통을 부리며 최대한 단답형으로만 대답했다.


그렇게 지내던 어느 저녁 식탁, 뉴스에서 연예인 팬덤 현상을 다루고 있었다. 팬들이 “**오빠 태어나 주셔서 감사해요!!!!!”라고 써진 플래카드를 흔드는 모습이 카메라에 꽤 오래 잡혔고, 아빠는 저게 대체 뭐냐며 별 웃기는 말을 다 보겠다고 한 마디 하셨다. 나는 “요즘 다 저렇게 가수 좋아하고 그러는데. 이상하긴 뭐가 이상해요.” 정도로 대꾸하고 방에 휙 들어갔다.


그리고 얼마 후 내 생일날, 식탁에 아빠의 멋있는 글씨가 가득한 메모가 놓여 있었다. 생일 축하한다는 메모의 마지막 부분,


태어나줘서 정말 고맙다! (내 이름) 열성팬 엄마, 아빠가.


너무나도 낯선 문구.

 

진지하기만 한 우리 아빠가 갑자기 이런 말을 던지신다고? 아빠와 나는 지금까지 서로 애정 표현을 적극적으로 해 본 적이 한 번도 없는데. 그때 티비에 나온 플랜카드 문구를 분명 못마땅해하셨는데? 아빠 입장에서 이런 말을 건네는 게 얼마나 낯간지럽고 어려운 일이었을까...아빠가 나한테 한걸음 먼저 다가와 주셨다는 생각에 눈물이 왈칵 났다. 


연예인을 좋아하는 어떤 열성팬의 마음보다도 훨씬 더 넉넉한 마음으로 자식을 무조건적으로 응원하고 좋아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 바로 부모잖아. 이 당연한 일을 왜 여태까지 못 깨달았지? 세상에서 나를 가장 사랑해 주는 건 엄마아빠인데 왜 내가 그렇게까지 적대감을 가지고 있었지? 정말 바보 같네.


갑자기 무슨 최면에서 풀리듯, 나의 사춘기 고등학생 컨셉이 스르르 풀렸다.


그렇게 아빠의 메모에 감동받아 사춘기를 단숨에 끝낸 이후로는 엄마에게도 아빠에게도 더 이상 단답형이 아닌 이런저런 긴 수다를 늘어놓았고, 어버이날 카드와 생일 카드, 문자와 카톡에 "사랑해요"라는 말을 자주 붙였다.


드라마나 영화에서 누군가 죽는 순간 '사랑한다는 말을 아직 못 했다'며 슬퍼하기도 하던데, 아빠가 20여 년 전 나에게 먼저 표현을 시작해 주신 덕분에 그런 아쉬움은 없게 되었다.


아빠가 내 곁에 계신 동안에

내가 아빠를 사랑하는 것도, 아빠가 나를 사랑하는 것도,

아쉽지 않게 서로 표현은 다 하고 지내온 것 같다.

작가의 이전글 일단 써라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