풀이 눕는다, 김사과, 문학동네 (2017)
김사과의 소설을 처음 읽었다. 마음에 들지 않은 것 투성이의 이야기였는데, 이상하게도 한 장 한 장 넘기며 몰입했고, 공감했고, 마음 아팠다. 좋은 소설을 읽으면 몰랐던 나 자신을 더 잘 알게 되는데, 이 소설이 그런 소설이었다.
주인공의 행동 하나하나가 거슬렸다. 문학회 모임에서 술을 마시고 난장을 피우는 것, 생판 모르는 남을 다 이해하는 것처럼 굴면서 무례하게 구는 것, 자신의 생존을 타인의 노동에 의존하는 것. 내가 정말 용납할 수 없는 행동들이었다.
나는 선이 분명한 사람이다. 태어날 때부터 사회에 적응하고 인정받고 싶은 욕구가 강했고, 그런 천성을 공고히 하는 교육을 받아왔다. 동시에 나는 내가 포용력 넓고 다름을 인정하는 사람이라고도 생각해 왔다. 많은 책을 읽으며 다양한 인간 군상을 보아왔고, 그래서 누구도 함부로 재단하지 않으려 애써왔다.
이 책을 읽으면서, 나는 내가 얼마나 오만하게 나의 포용력을 자신해 왔는지를 깨달았다. 내가 얼마나 다양한 논리로 타인을 설명하고 이해한다 한들, 그 기반에는 내 날카로운 선으로 나뉜 호와 불호의 즉각적인 판단이 언제나 존재했다. 이 주인공은 내 선에서 분명 불호의 영역에 속했다. 불편하고, 짜증 나고, 싫었다.
그런데 그녀를 그렇게 행동하게 만드는 마음과 생각은 그 서슬 퍼런 선으로도 구분 지을 수 없었다. 나는 온 마음으로 그녀의 마음에 공감했기 때문이다.
이른 아침 텅 빈 아파트 단지를 가로지를 때면 뭔가 큰 잘못을 저지른 듯한 기분이 들었다. 아니 내 인생 전체가 완전히 잘못되었다는 확신에 죽고 싶을 정도였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 봐도 난 잘못한 것이 없었다.
"어쩔 수 없었다"는 표현은 이럴 때 쓰는 거구나, 생각했다. 변명이 아닌, 후회와 체념의 설명. 정말 그녀는 어쩔 수 없었다.
존재 자체가 그 공간에 "있을 수 없는" 상태라면? 거대한 건물들과 시끄러운 거리로 가득한, 자본주의 그 자체인 이 도시에서, 그저 살아있다는 것이 죄가 되어버리는 사람은 도대체 어떻게 존재해야 할까? 그녀는 "누구보다도 더 멋진 포즈로 돈에 짓눌릴 것"을 다짐하는 예술가가 된다. 그리고 풀을 만난다.
그들은 어쩔 도리 없이 사랑에 빠지고, 어쩔 도리 없이 가난했고, 어쩔 도리 없이 끝에 다다랐다. 그녀가 풀을 사랑한 것은, 그가 돈과 욕망에서 초연했기 때문이다. 세상에서 아름다움만을 보고 그것을 만들어내는 것에만 골몰하는 사람. 노동으로 자신과 자신의 예술을 먹여 살리는 사람.
하지만 사랑은 그녀를 구원해주지 못한다.
누구도 저 빌딩들을 거절할 수는 없을 거라고. 누구도 그럴 힘을 가지고 있지 않을 거라고. 여기에 사는 그 누구도 저 빌딩들이 가리키는 미래에서 벗어날 수가 없을 거라고.
그들은 생생하게 살아있기를 선택한다. 사랑은 그들의 예술성을 북돋워주고, 동시에 그들을 끝없이 가난하게 만든다. 세상은 그들이 마음껏 예술을 탐닉하고 사랑을 살도록 내버려 두지 않는다. 애초에 그럴 수가 없는 게 세상이기 때문이다.
마침내 풀도 가난과 허기의 아가리에 빠진다. 그는 화를 알게 된다. 잘못한 것이 없는데 인생 전체가 잘못된, 그녀와 한 몸뚱어리가 된다.
삶은 끝났다. 그런데 우리는 여전히 살아 있었다. 남은 것은 그 삶을 견딜 수 있을 정도의 뻔뻔함뿐이었다.
풀을 그렇게 만든 것은 여자다. 하지만 여자를 그렇게 만든 것은 세상이다. 그러니까 우리 모두가 유죄인 것이다. 하지만 우리도 역시 피해자이다. 죄지은 피해자. 그것이 이 도시에서 살아가는 현대인인 우리의 이름이다.
이 책은 저돌적이고 당돌한데 단단하고 슬프다. 한창 열심히 보던 유럽 영화의 한국 버전 이야기를 읽는 것 같았다. 김사과의 문장은 강렬하고 때로 아름답다. 이 책을 읽기 전까지, 나는 한국에 이런 문장들이 존재하는지 몰랐다.
그리고 이 소설을 통해 나는 내 안의 선을, 그 선의 한계를, 그럼에도 공감할 수밖에 없는 인간의 마음을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어쩔 도리 없이 잘못되어 버린 삶들을. 그 삶을 견디는 뻔뻔함을.
덧, 소설에 삽입된 음악들은, 정말이지 근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