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연한 것을 받는 것이다.
독보적으로 강력한 주문
내가 끌어당김의 법칙을 십 년 넘게 적용하면서 정말 다양한 자기 암시를 시도했지만 가장 독보적이고 강력한 주문은 바로 이것이다.
모든 것은 대수롭지 않다.
끌어당김의 법칙과 관련된 많은 서적과 영상에서 공통적으로 말하는 것은
이미 받은 것처럼 행동하라
모든 것을 다 가진 느낌을 유지하라
는 것이다. 이미 다 가진 사람이 느끼는 감정이 과연 무엇일까를 알기 위해 불교, 우파니샤드, 양자역학 등을 파면서 내가 내린 결론은
이미 다 가진 사람은 거의 모든 일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한다
는 것이다. 이미 다 가졌으니 좋은 것을 봐도 대수롭지 않고, 순간적으로 위기가 닥쳐도 가진 것이 이미 많으니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
끌어당김의 법칙을 적용하는 데 있어서 좋은 일이 생겼을 때 그것을 자주 떠올리면서 빠져드는 것이 유리할까? 아니면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것이 유리할까? 분명히 말하지만
좋은 일도 대수롭지 않게 여겨야 한다.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무엇에 빠져든다는 것은 에너지적으로 불균형한 상태이다. 에너지적으로 불균형한 상태는 반드시 균형을 회복하는 형태로 안배되게 되어 있고, 좋은 일은 영원히 지속되지 않는다.
그리고 좋은 일이 생겨서 계속 그것에 떠올리다 보면 그 일을 남에게 알리고 싶은 욕망인 Tanha(땅하)가 생기고, 그것은 자기 자랑으로 이어진다.
나 저녁밥 먹었어!!
라고 자랑하는 사람은 없다. 대부분이 저녁밥을 매일 먹는데 왜 자랑을 하겠는가? 자랑을 한다는 말의 본질은 내 능력으로 하기 힘든 일을 해냈다는 뜻이다. 즉,
자랑하는 순간 나의 리미트는
그렇게 정해진다.
끌어당김의 법칙을 제대로 이해하면 자랑이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데, 그것은 겸손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능력을 제한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일론 머스크가 BMW를 샀다.
성철 스님이 1000배를 했다.
심으뜸이 스쿼트 1000개를 했다.
김계란이 100kg 풀 스쿼트를 했다
이 사람들 입장에서는 아주 대수롭지 않은 그냥 일상생활이다.
내가 스쿼트 1000개를 쉬지 않고 했어!
라는 말의 본질은 내 능력으로 스쿼트 1000개를 쉬지 않고 하기 힘들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그 스쿼트 1000개가 누군가에게는 그냥 준비 운동일 수 있다. 이미 다 가진 느낌은 무언가를 당연하게 여기는 것이고, 무언가를 당연하게 하는 사람들은 그 행위를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
결과적으로 좋아하는 것이든, 싫어하는 것이든 그것에 빠져 허우적거리지 말아야 한다.
탐진치(貪瞋痴)는 근본적으로 하나다.
우리나라가 불교를 중국에서 받아들이다 보니 삼독(三毒)이라 불리는 탐진치(貪瞋痴)를 탐욕스럽고, 분노하고, 어리석다는 의미로 대부분 알고 있지만, 원어로 akusala mula(아쿠살라 물라)라는 “나쁜 결과를 가져오는 근원”이라는 뜻으로 이 세 가지를 뽑았다.
Raga(라가, 탐), 좋아하는 것.
Dvesa(드웨사, 진), 싫어하는 것.
Moha(모 하, 치) 그것에 빠져드는 것.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이
우리에게 미치는 영향에 대해
잘 몰라서 망상에 빠져드는 것이다.
이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에 극심하게 빠져들면 이것들이 장작이 되어 마음의 불을 활활 타오르게 만들어 Tanha(땅하, 갈애)라는 극심한 욕망 생긴다.
그런데 이것을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은 더 이상 이 세 가지 장작을 넣지 않으면 된다. 그러면 불이 서서히 꺼지면서 Nirvana(열반)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Nirvana의 산스크리트 어원이 “불을 끄다”라는 뜻이다.
빠져들면 Tanha가 되고
빠져들지 않으면 NIrvana가 된다
감정은 원래부터 변한다.
좋아하는 감정과 싫어하는 감정 자체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 그것에 빠져드는 moha(모하) 상태가 문제인 것이다.
감정의 기복이 심하다고 감정 그 자체를 없애려고 하는 건, 눈에 보이는 현실이 싫다고 눈을 찌르는 행위와 같다.
많은 사람들이 수련을 통해 감정을 억제하려고 하는데, 감정은 잘 억제되지도 않지만, 감정을 억지로 억제하면 괴로움이라는 부작용만 따른다.
고타마 붓다가 살았던 시절 모든 수행자의 목표는 우파니샤드에 나오는 절대 불변하는
“참자아 아트만(atman)을 찾아라”
였다. 원피스를 찾기 위해 모든 해적들이 바다에 뛰어들듯이, 아트만을 찾기만 하면 감정이 절대 변하지 않는 상태가 돼서 dukkha라는 괴로움에서 벗어난다고 믿고 모든 수행자가 고행에 뛰어들었다.
결과적으로 고타마 붓다는 자신의 뼈가 앙상하게 드러날 때까지 고행을 하고 나서야 아트만은 찾지 못했지만 자연을 3가지 특징이라는 tilakkhana(띨라카나, 삼특상)를 깨닫게 된다.
anicca(아닛짜, 무상) 모든 것은 변한다. 그래서 좋은 것도 유지되지 않는다.
dukkha(두카, 고) 좋은 것을 계속 유지하려 노력하면 할수록 괴롭다.
anatta(아낫따, 무아) 절대 불변하는 것은 찾을 수 없으니, 찾고자 하면 헛수고가 될 것이다.
빠알리어의 anatta(아낫따)가 산스크리트어로 anatman(안아트만)으로 번역되는데, 결과적으로 보면 뼈가 다 드러날 때까지 수행을 해도 감정이 절대 변하지 않는 아트만은 찾지 못한다는 것이다.
나중에 더 깊게 이야기하겠지만 마음공부하는 사람들이 많이 이야기하는 “참나”, “참자아”라는 개념과 우파니샤드에서 이야기하는 참자아 아트만은 많은 차이가 있다. 우파니샤드를 읽어보면 누가 보더라도 참자아 아트만은 인간이 경험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걸 깨닫고 고행을 중단한 것이 고타마 붓다다.
나는 우파니샤드와 양자역학을 먼저 접한 상태에서 반야심경을 봤는데, 이 상태로 산스크리트어 원문 Prajna(반야) paramita(바라밀다) hṛdaya(심) sutra(경)으로 읽으면 정말 다른 세계관이 보인다.
반야심경 색즉시공(色卽是空)이 원어로
rupaṃ sunyata
물질계의 현상들이 비어 있다.
라는 뜻이다. 호텔방에 손님이 비어있다는 말은 호텔방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이 아니라 호텔방에 손님이 없다는 이야기다. 물질계에 현상들이 비어있다는 말은 물질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이 아니라 내가 물질로 인지하는 모든 현상들에 절대 불변하는 아트만과 같은 것은 찾지 못했다는 의미다.
인간이 경험할 수 있는 모든 다섯 가지 스칸다(paṃca skandhaḥ, 색수상행식)를 모두 하나하나 면밀하게 검토해 봐도 모든 것이 시시각각 계속 변해하기 때문에 절대 불변하는 무언가는 발견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루프양자중력에서 물질계의 현상을 만드는 모든 입자인 쿼크, 전자, 광자, 힉스보손 등을 모두 제거해도 양자장 자체는 사라지지 않고 바닥상태(Ground State)를 유지하며, 그 진공 안에서도 언제나 가상입자(Virtual Particle)가 나타났다 사라졌다를 계속 반복한다. 물질계의 모든 것은 그렇게 떨린다.
절대 불변하는 것은 우리의 경험의 한계 내에서는 없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우리의 감정은 원래 변한다.
단지 그것에 빠져드느냐
빠져들지 않느냐만 있을 뿐이다.
이렇게 감정에 빠져들지 않는데 엄청나게 도움이 되는 것이 바로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것이다.
무언가에 빠져드는 이유는 그것이 중요하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중요도가 커지면 인간의 감정은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그것에 빠져들 수밖에 없다. 그러니 감정을 에너지적 균형상태로 유지하려면 무엇에 빠져들지 않게 대부분의 현상들을 대수롭지 않게 여겨야 한다.
대수롭지도 않은 것에
굳이 빠져들 이유가 없지 않은가?
두려움 = 중요도 X 위험성
좋은 것에 빠져드는 것처럼 나쁜 것에도 빠져들게 되는데 나쁜 것에 빠져들면 발생하는 것이 바로 두려움이다. 두려움은 정확하게 F=ma와 같이 수식으로 표현할 수 있고, 내 경험상 절대 이 범주를 벗어나지 않는다.
두려움 = 중요도 X 위험성
중요도와 위험성이 0에 가깝게 수렴되면 두려움도 0에 가까워진다. 한마디로 중요도가 매우 낮거나 위험하지 않다고 느끼면 두려움은 매우 낮아진다. 예를 들어
돈을 잃어버렸다.
라는 사실 자체는 위험성이 높다. 그런데 그것이 10원짜리 동전이라면 중요도가 매우 낮아 두려움이 일어나지 않는 것이다. 10억 손실이 예상될 때의 두려움과 10원 손실이 예상될 때의 두려움의 차이는 중요도의 차이다. 결과적으로 중요도가 높으면 높을수록 두려움은 자동으로 올라간다.
갑자기 눈앞에 호랑이가 나타났다
라는 사실 자체는 위험성이 매우 높다. 특히 자신의 목숨이 중요하다고 느끼는 수준만큼 두려움은 더 커진다. 호랑이가 나타나도 평온할 수 있는 사람은 단 한 사람뿐이다.
그 호랑이를 키운 사육사
결과적으로 그 호랑이에 대한 위험성이 0에 가까운 사람은 그 호랑에 익숙해서 전혀 위험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사람뿐이다.
두려움은 감정이 아니라 신체 반응이다.
아무리 정신력이 강하고 수양이 잘 된 사람도 눈앞에 갑자기 호랑이가 달려오면 심장이 펌핑되면서 모든 혈액을 근육으로 보내 도망가기 가장 적합한 형태로 만든다. 즉, 불수의근이다. 의지와 상관없이 벌어지는 신체 반응이라는 말이다.
멘탈붕괴라는 것이 정신에 타격을 받는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정신은 무형이라 타격을 받을 수가 없다. 두려움이라는 것은 정확하게 따지면 신체 변화이고, 신체 변화가 나타나기 전까지 우리는 두려움 느끼지 못한다. 무언가 두려운 대상이 나타나서 심장이 빨리 뛰고, 근육이 경직되는 현상을 두려움으로 인지하는 것이다.
두려운데 떨지 않았으면 한다는 건 이치에 맞지 않다. 두려움을 느끼면 몸은 자동으로 반응하다.
그렇다면 두려움을 낮추는 유일한 방법은 중요하게 않거나, 위험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수밖에 없다. 이것이 바로 대수롭지 않다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어떤 나쁜 상황이 발생되어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만큼 두려움은 줄어든다. 중요도와 리스크를 동시에 낮추는데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것만큼 좋은 것은 없다.
그런데 정말 대수로울 정도로
나쁜 상황이 발생하면 어떡하냐?
현대 사회에서 벌어지는 나쁜 상황은 신체 활동으로 해결되는 경우가 많지 않다. 대부분 분별력을 가지고 깊이깊이 사고해서 해결점을 찾아야 하는데, 두려움을 느끼는 순간 모든 에너지가 뇌가 아니라 근육으로 집중된다.
물론 대수로운 일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것은 당연히 쉽지 않다. 그런데 상황이 나쁘다고 판단하는 순간 심장은 빨리 뛰고, 뇌는 경직될 수밖에 없다. 사고 활동은 멈추고 도망가기에 적합한 신체 환경이 되는 것이다.
그러니 정말 이 나쁜 상황을 어떻게든 해결하고 싶다면
그 일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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