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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he Maf Jul 25. 2023

진리를 스스로 만들다.

성공의 핵심은 실행력이다.


자연은 인간의 소망에 관심이 없다.


끌어당김의 법칙을 대부분이 부와 연관시키다 보니 어느 순간 부의 법칙처럼 되어 있는데, 내가 이해한 끌어당김의 법칙은 부와는 전혀 상관이 없는 그냥 자연 현상이다.


끌어당김의 법칙을 잘못 이해했을 때 발생하는 가장 큰 문제는 이 두 가지다.


우주에 원하는 것을 보내서 받는다.

특정 사람에게 원하는 것을 보내서 받는다.


자연은 인간의 소망에는 전혀 관심이 없다. 단지 자연의 이치를 자신의 소망에 이용하는 사람과 하지 않는 사람만이 존재할 뿐이다.


여러 번 강조하지만 원하는 것을 단지 떠올리는 것만으로 유의미한 것이 현실화되지 않는다.



이모를 떠올렸더니 이모에게 전화가 왔다.

람보르기니를 떠올렸더니 도로에서 람보르기니가 보였다.

스타벅스를 떠올렸더니 회사에서 스타벅스 상품권을 주더라.


이런 형태는 끌어당김의 법칙이라기보다는 풍뎅이 이야기를 들었더니 창문에 풍뎅이가 앉았다는 칼 융의 “동시성”에 가깝다.





이모를 떠올렸더니 이모에게 전화가 왔다?


“So What?”


 인 것이다. 정말 많이 리엑션 해줘도 “아. 그렇구나.” 정도이다. 이런 수준의 경험이라면 나는 거의 매일 겪는다. 점심으로 라면을 떠올렸더니 와이프가 라면을 끓여주는 수준이다.


이런 종류의 일들은 굳이 끌어당김에 법칙에 대해 전혀 몰라도 누구나 겪는다. 이건 무의식이 현상에 영향을 미치다는 건데, 조선시대 사람들도 겪고, 북조선에 있는 사람들도 다 겪는다. 무의식은 원래부터 현상에 영향을 미치고, 관련 서적도 도서관에 넘쳐난다. 예스 24에 “무의식”만 쳐도 나오는 책이 300권이 넘는다.


이렇게 무의식적으로 벌어지는 현상들을 끌어당김의 법칙에 관심이 없다면 단순하게 운이라고 생각하는 것이고, 끌어당김의 법칙을 아는 사람들은 끌어당김의 법칙이 현실화되었다고 고무될 뿐이다.


그런데 우리가 이모에게 전화를 받거나, 람보르기니를 보거나, 스타벅스 상품권을 타거나, 라면을 먹을 목적으로 끌어당김의 법칙에 대해서 미친 듯이 공부하고, 매일 확언을 하고, 힘들게 100일 동안 100번을 적고 심상화하면서 시간을 보내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분명히 말하지만



람보르기니를 보는 것이 아니라 타고 싶다면

생각들을 구체화해서 실행에 옮겨야 한다.





서울대에 합격시켜 주는 학원은 없다.


많은 사람들이 원하는 것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현실화된다고 믿다 보니 원하는 것을 시각화하고, 확언을 하고, 100일간 100번을 쓰면서도 구체적인 실행을 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것이 이루어지지 않았을 때, 아직도 내 마음이 부족해서 끌어당겨지지 않는 것인가를 고민하면서 계속 시각화 과정만 반복한다.



부족한 것은 시각화가 아니라 실행력입니다.  



원하는 것을 지속적으로 떠올리다 보면 그것을 추진하고 싶어 지는데, 떠올리기만 하면 이루어진다는 이론만을 믿다 보면 추진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


만약 지속적으로 떠올린 생각을 추진하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면 더 이상 전체적인 모양을 떠올리지 말고 그것을 구체화시켜야 한다.


그것이 정말 실행하기 어렵다고 느껴진다면 그것을 너무나도 당연하고 대수롭지 않게 여겨질 때까지 시각화를 해서 자기 능력으로 할 수 있을 정도로 중요도를 낮추면 된다.


결과적으로 그 대수롭지 않게 느껴지는 것을 구체적으로 실행에 옮기면 현실화될 확률이 높아지는 것이다.


끌어당김의 법칙만으로 모든 것이 다 이루어질 것처럼 이야기하는 사람들은 정말 무책임한 사람들이다.

진짜 그 사람들이 무엇을 하는지 한걸음만 물러서서 가만히 살펴봐라. 대부분 정말 열심히 영상을 만들고, 블로그를 만들고, 전자책을 만들고, 오픈 카톡방을 개설하고, 강의를 개설하면서 고객들을 모으고 있을 것이다.


본인들은 그렇게 열심히 경제 활동을 하면서 사람들에게는 생각만 하면 우주가 모든 것을 다 줄 것처럼 이야기하는 것이 이해가 되는가? 그런데 그것보다 더 이해가 되지 않는 건 그걸 믿고 있는 사람들이다.


본인의 끌어당김의 비법을 듣기만 하면 모두가 부자가 될 수 있다는 그런 이상한 이야기를 왜 믿는 것일까?


이 말은 우리 학원만 다니면 내신 5등급도 누구나 서울대에 합격한다는 말과 같은 말이다.


아무런 경제활동을 하지 않고 부자가 된 사람을 단 한 번이라도 본 적이 있는가? 난 없다.



아버지가 재벌인 사람들조차도

경제 활동을 한다.



그래서 내 브런치 첫 번째 글이 유의미하게 부를 축적하고 싶으면 정신 활동만 하지 말고, 경제 활동을 하는 생산자가 되라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서울대에 합격시켜 주는 학원은 없다. 서울대에 합격하는 학생만 있을 뿐이다. 그러니 서울대에 합격시켜 주는 학원을 찾아다니지 말고, 서울대에 합격할 수 있을 만큼 노력해야 한다.






차라리 종교를 믿어라


만약 지속적으로 우주에게 무언가를 보내서 무언가를 받는다고 확신하는 사람들은 차라리 끌어당김의 법칙을 믿지 말고 종교를 믿는 것이 더 효율적이다. 왜냐하면 종교인들은 기본적으로 자신의 소망을 특정 대상에게 보내는데 매우 특화되어 있다.


인지되지 않는 대상에게 소원을 비는 것은 쉬운가, 아니면 인지되는 대상에게 소원은 비는 것이 쉬운가? 당연히 인지되는 대상에 소원을 비는 것이 쉽다. 그래서 모든 종교시설에는 인지할 수 있는 그 무언가가 있는 것이고, 교회에 가면 십자가가 있고, 절에 가면 불상이 있는 것이다.



떠올려지는 무언가가 있어야

소원을 보낼 수 있다.



그래서 대부분이 우주에 무언가를 보낸다고 생각할 때 자신도 모르게 코스모스를 떠올리게 된다. 인지되지 않는 개념을 사용하려면 무조건 형상화를 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수학에 1,2,3이라는 형상화된 숫자가 있는 것이고, 칸트가 “내용 없는 사상은 공허하고, 개념 없는 직관은 맹목이다”라고 이야기한 것이며, 아인슈타인이 “신앙 없는 과학은 공허하고, 과학 없는 신앙은 맹목이다”라고 말한 것이다



결과적으로 우주에 무언가를 보낸다라고 생각하려면 무언가를 받는 우주를 떠올릴 수밖에 없다. 개념조차 떠올려지지 않는 대상에 무언가를 지속적으로 보내면 공허함만 느껴진다. 이것이 비로 칸트가 말한 “내용이 없는 사상이 공허하다”는 것이다. 개념조차 정립되지 않은 우주에 뭔가를 계속 보내면 공허함만 느낄 수밖에 없다


그래서 끌어당김의 법칙을 우주로 무언가를 보낸다고 생각하는 대부분은 공허함을 없애기 위해 저마다의 우주를 형상화하며 거기에 무언가를 보내게 된다.


그런데 우주를 떠올리는 것보다는 십자가나 불상을 떠올리는 게 더 훨씬 더 쉽고 구체적이다. 관련 상품이나 서적들도 넘쳐난다. 만약 우주를 떠올려서 무언가를 보내는 것이 자신의 적성에 맞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차라리 종교를 믿고, 믿는 그 신에게 무언가를 보내는 것을 추천한다.    






내가 조정할 수 있는 것은 상황뿐이다.


내 브런치를 완독 한 독자들은 잘 알겠지만 나는 2010년부터 시크릿을 처음 보고 논리적 증명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직감했고, 귀납적으로 증명하고자 여러 가지 실험을 했다.


끌어당김의 법칙으로 여러 가지 귀납적 실험을 해오던 시절 나도 가장 궁금했던 것이 사람을 끌어당길 수 있느냐는 것이었다. 그 결론을 3년 만에 정리한 것이 바로 이것이다.



2013년 5월 26일 생각노트



현실화. 2013년 5월 26일


지금까지 내가 한 수많은 경험들을 바탕으로 한 귀납적 증명


타인을 내 의지대로 통제하거나 조정하려는 행위는 모두 성공하지 못했다.

지속적으로 생각한 것은 그 속성에 상관없이 전부 현실화됐다.

내가 원해서 의식대로 추진한 것은 전부 현실화됐다.


이 증명을 바탕으로 한 현실화 방법


타인을 내 의지대로 구속하거나 통제하려 하지 마라, 내가 통제할 수 있는 존재는 이 세상에 나 자신뿐이다.

현실화할 목적이 아니라면 부정적인 생각이 발생하는 순간 그 즉시 생각을 멈춰라.

되고 싶거나, 하고 싶은 것이 있다면 최대한 자주 생각하고, 그대로 행동하고, 주저함 없이 추진해라


이것은 그 누구의 사상이 아닌 내가 한 경험에 따른 결론이다.



 


나는 2010년부터 마스터키 시스템의 여러 가지 수행들을 실천하면서 시각화를 통해 현실화되는 과정을 노트에 기록하기 시작했고, 정말 여러 가지 실험을 했지만, 타인을 의지대로 통제하거나 조정하려 하려 하는 모든 행위는 성공하지 못했다.


이 일을 김 과장이 대신해 줬으면 좋겠다.

김 부장이 눈앞에서 사라졌으면 좋겠다.

이 대리가 나를 사랑했으면 좋겠다.


이런 유형의 끌어당김은 다 성공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알 수 없다. 일단 특정 대상에 의지를 투입해서 무언가를 얻는 방식은 다 성공하지 못했다.


단지 내가 깨달은 것은 끌어당김을 통해 주변 대상들이 움직이는 방식은 내가 대상에 직접적으로 의지가 투영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 안배라는 상황을 통해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내가 무언가를 이루고 싶은 것이 있고, 그것이 너무나도 당연하게 여겨지면 안배라는 것이 발동이 돼서 주변인들이 움직이기 시작하는데 그건 내가 내 의지로 하는 게 아니다. 비가 오고 바람이 불듯이 그냥 그렇게 자연이 움직이는 것이다.


내가 스타크래프트 하듯이 사람들을 마우스로 찍어서 보내는 게 아니고, 그들은 본인들의 욕구에 따라 움직이는데 나에게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흘러가는 경험을 하게 된다.


결론은 사람들이 내 의지에 따라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내가 당연하게 여긴 그 상황들이 당연하게 발생되는 형태로 안배되어 움직인다는 것이다. 즉, 김 대리가 움직일지, 이 부장이 움직일지, 박 상무가 움직일지는 알 방법이 없다.


내가 당연하게 여기고 행동하는 것에 따라 주변의 흐름을 느낄 뿐이다.   


예를 들어 내가 좋은 이성을 사귀고 싶다는 생각을 가지고, 너무나 그게 당연하고 기분 좋은 상태로 있다 보면 뜬금없이 누가 소개를 시켜주는 상황은 발생이 가능하지만, 내가 특정 누군가를 찍어서 그 사람에게 내 의지를 투입하여 그 사람이 나를 사랑하게 만드는 방법은 자연에 없다.



그건 인간의 욕망일 뿐이다.



난 대학교 때 6년을 사귄 여자친구에게 차이고 나서, 커피숍에 틀여 박혀 계속 글을 썼는데 결과적으로는 그 커피숍 알바랑 결혼했다.


인간관계는 정하는 게 아니라 그렇게 자연스럽게 발생하는 것이다.






끌어당김의 법칙은 소원에 관심이 없다.


끌어당김의 법칙으로 모든 소원을 다 이룰 수 있다는 생각은 버려야 한다. 왜냐하면 끌어당김의 법칙은 인간의 소원을 들어주는 법칙이 아니다.


많은 사람들이 끌어당김의 법칙에 대해 하는 오해가 바로 이것이다.



끌어당김의 법칙은

내가 끌어당긴 것을 받는다.



그래서 소원을 보내서 받는다고 그 생각이 정말 많은 문제를 야기시킨다. 끌어당김의 법칙은 생각하는 무언가를 끌어당기거나 받는 것이 아니다. 내가 이해한 끌어당김의 법칙은 자연이 만들어졌을 때 세팅된 초기값이다. 그래서 인간의 소망에는 전혀 관심이 없다.


이걸 아는 사람들은 그 초기값을 자신의 소망을 이루는데 현명하게 이용할 뿐이다.



내 감정과 유사한 현상들이

발생활 확률이 높다



이것이 내가 이해한 끌어당김의 법칙의 전부다.


내 “소망“과 유사한 현상들이 발생될 확률이 높은 게 아니라, 내 ”감정“과 유사한 현상들이 발생할 확률이 높다. 그래서 끌려오는 것은 ”물질“이 아니라 ”상황“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인간의 소망은 과연 자연이 만든 것일까? 사회가 만든 것일까? 인간의 소망은 사회적 가치이지, 자연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갓 태어난 아이에게 쾌, 불쾌의 감정은 존재할 수 있지만, 간절한 소망 같은 것이 존재할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다.


여러 번 강조하지만 자연은 사회적 가치판단을 하지 않는다. 결과적으로 자연은 인간의 소망에 반응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소망을 떠올릴 때 그 감정에 반응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아는 일부의 사람들이 그것을 자신의 소망에 맞게 이용할 뿐이다.


그 이용하는 방식은 이전 글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니콜라 테슬라가 제품화 한 방식과 같이 실행되어야 한다.







자연은 선과 악을 판단하지 않는다..


많은 사람을 학살한 독재자가 천수를 누르면서 행복하게 잘 사는 이유는 무엇인가? 내가 내린 결론은 자연은 선악을 판단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선악에 대한 판단은 “신”이 하는 것이지, 자연의 구성 요소인 “원자”가 하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칸트가 신이 만약 존재하지 않는다면 만들어야 한다고 한 것이다.



내가 이해한 이 자연은 처음에 창조된 세팅값대로 그냥 흘러가는 프로그램과 같다. “모든 것은 원자로 되어 있다”는 말이나 “모든 것이 원자라는 언어로 코딩된 프로그램이다”라는 말이나 같은 말이다.


원자로 이루어진 자연은 사회적 가치판단을 하지 않는다. 사람들 죽이면 문제가 된다는 사람들이 소를 죽여서 한우로 먹는데 매우 만족감이 높고, 과거에는 피부색에 따라 사람을 노예로 부리는 것이 너무나도 당연했던 때도 있었다. 불과 100년 전만 하더라도 우리나라에서는 피부색도 같은 민족끼리 성씨가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노비로 삼는 것을 너무나도 당연하다고 여겼었다.


그렇게 사회적 가치관은 시대에 따라 변한다. 결과적으로 사회적 가치 판단은 자연이 아니라, 인간이 하는 것이다.   


독재자들은 본인이 직접 자기 손으로 사람을 죽이지 않는다. 그래서 살인에 대한 감정의 동요도 없고, 죄책감도 없다. 그러면 당연히 발생하는 감정은 죄책감이 아닌 것이고, 이것에 따라 펼쳐지는 현상도 죄책감이 아닌 것이다.


그렇다면 도덕적이지 않고 법을 어기면서 마음대로 살면서 죄책감만 전혀 없으며 문제가 안 되는 거 아니냐?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인간은 태아나서부터 사회적인 학습을 지속적으로 받기 때문에 사회적으로 비난받을 행동을 하면 기분이 나빠질 수밖에 없다.



이것이 학습화된 사회적 가치판단이다.



그리고 아무리 극악의 사이코패스라 할지라도 타인의 목숨은 아무런 문제가 안될 수 있지만, 자신의 몸이 구속되는 건 별개의 문제다.



내가 감옥에 가면 상당히 힘들 텐데



라는 느낌이 드는 순간 감정은 감옥에 가지 말아야 한다는 Tanha(땅하)라는 욕망이 생기고, 그것에 빠지져 Moha(모하) 상태가 되면 무감각했던 그 감정은 두려움으로 바뀐다.


즉, 대부분의 사람들은 사회 규범을 지키면서 사는 게 마음의 동요가 덜하다.


회사에서 내가 일을 열심히 하고 있을 때 긴장감이 덜할까? 아니면 책상에 발을 올려놓고 편안하게 쉬고 있을 때가 긴장감이 덜할까? 당연히 일을 할 때가 긴장감이 덜하다. 그러니까 일을 하기 싫을 때는 일하는 것처럼 서류들을 펼쳐 놓고 남들 모르게 쉬는 것이다.


그래서 직장인에게 긴장감을 늦추지 말라는 말보다 이상한 말이 없다. 대부분의 직장인들은 사무실에서 이완된 상태로 있는 것이 훨씬 힘들다. 대부분이 긴장된 상태로 일을 한다. 그런데 거기에 긴장을 늦추지 마라고 이야기하는 것은 경직된 상태로 일하라는 것과 같다.






진리는 결과적으로 인간의 믿음이다.


끌어당김의 법칙을 논리적으로 증명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경험적으로 볼 때 의식이나 감정이 펼쳐지는 현상에 영향을 미치는 사례가 너무나 많으니까 귀납적 판단으로 옳다고 보는 것이다.


기독교인들에게 “하나님을 증명할 수 있냐?”라고 묻는 것과 같은 것이다. 내가 볼 때는 정말 의미 없는 질문이다.



기독교인에게 하나님은 무조건 존재한다.



칸트가 순수이성비판을 통해서 자유의지, 신, 내세, 이 세 가지가 존재한다고 가정을 한 이유도 본인의 도덕적 가치관 때문이다. 원래 칸트는 도덕을 최고의 가치로 삼는 사람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도덕적 행동을 행할 “자유의지”

자신의 도덕을 판단해 줄 “신”

자신의 도덕적 행동을 보상받을 “내세”


기 필요했던 것이다.




그렇게 사람들은 믿고 싶은 것을 믿는다. “끌어당김의 법칙” 자체가 순수 이성의 영역이라 논리적인 검증이 불가능하다. 그래서 나는



내 의식이 현상에 영향을 미친다



라고 생각하는 것이 제 삶을 더 윤택하고, 선하게 만들기 때문에 그것을 선택해서 사는 것이다.


뉴턴이 만유인력의 법칙이 상대성이론으로 뒤집히고, 다시 양자역학으로 가면서, 법칙은 이론을 거쳐 학문으로 바뀌었고, 양자역학은 아직도 현대 과학으로는 설명이 불가능하다.


요새 많은 사람들이 끌어당김의 법칙을 이야기하면서 양자역학에 대해 이야기한다. 솔직히 무작정 끌어당긴다고 말할 때보다 장족의 발전을 이루었다고 생각한다.


끌어당김의 법칙을 십여 년 이상 판 입장에서 양자역학을 처음 접했을 때 “의식이 전자에 영향을 미친다”는 그 사실만으로도 엄청난 환희를 느꼈던 것도 사실이다.


그런데 양자역학을 조금 더 깊게 파보면 양자역학을 끌어당김의 법칙을 증명하는 도구로 쓰는 데는 분명히 한계가 따른다. 이전 글에서도 이야기를 했지만, 내 의식뿐 아니라 빛도 전자를 튕긴다.


내 생각이 원자에 영향을 미친다라고 하면 양자역학적으로 참이 되지만, 내 생각이 원자를 재배열해서 원하는 물질을 만든다라고 하면 양자역학이랑 아무런 상관없는 가설이 된다.  



진리라는 것도 순수이성이라

어차피 인간이 얻을 수 없는 그 무엇이다.



어차피 얻을 수 없다면  자신의 신념을 진리라고 생각하고 사는 게 나을 수도 있다. 그렇다고 해서 스스로 검증도 안된 남의 신념을 자신의 신념으로 착각하며 살아서는 안 된다.



돈키호테는 기사도 하나만을 미친 듯이 팠고, 대부분의 기사도 책을 섭렵했으며, 기사도에 대한 신념이 너무나 뚜렷했고, 기사도를 경험하면서 살고자 하는 욕구가 확실했다.


그래서 돈키호테는 기사도 경험을 하고 싶은데 현실에서 거인과 싸울 수 없다고 판단되니까, 풍차에 뛰어드는 것이다.


논리적으로 증명할 수 없다고 경험을 포기하는 것보다는



풍차랑 싸워보는 게 더 낭만적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으로 나는 하루하루 의미 있게 살아간다.


이 글을 읽는 사람들도 자신 나름의 신념을 가지고 의미 있게 살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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