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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he Maf Sep 02. 2023

감정은 신이 준 선물이다

참 자아는 에고를 통해 감정을 경험한다.


왜 하필 감정인가?


끌어당김의 법칙은 생각에 반응할까? 감정에 반응할까?



감정에 반응한다.



세계적인 베스트셀러 작가를 떠올리는데 마음이 계속 불안하다면 불안한 현상이 펼쳐지는 것이다. 생각은 아무런 상관이 없다. 생각은 단지 감정을 유발할 뿐이다.


사회적으로 나쁜 생각인데 본인이 너무나 순수하고 행복해진다면 그냥 순수하고 행복한 현상이 펼쳐지는 것이다. 자연은 사회적 가치판단을 하지 않는다. 그 가치 판단은 인간이 하는 것이고, 여러 번 강조하지만 끌어당김의 법칙은 바람과 비와 같은 자연 현상이다.


홍수가 인간에게 재앙일 수 있지만 사회악은 아니듯, 감정 또한 인간에게 선물도, 재앙도 될 수 있지만



감정 그 자체에는 선과 악이 없다.



끌어당김의 법칙은 단지 그 감정에 반응할 뿐이다.


그렇다면 왜 하필 감정인가?


고대부터 지금까지 인간은 몸의 형태도 바뀌고, 사회 형태도 바뀌고, 법규도 바뀌고 모든 것이 바뀌었다. 평균 키, 수명, 노예 제도, 여성의 정치 참여 등 물리적 형태나 사회적 가치판단은 백 년을 유지하지 못하고 계속 변한다.


하지만 고대부터 지금까지 인간에게 변하지 않는 것이 있다. 그게 바로 감정이다.



공룡을 만날 것 같은 두려움

성행위에 의한 쾌감

좋아하는 이성에 대한 사랑

양반에 대한 노비의 적개심

가족을 죽인 사람에 대한 분노



이 모든 감정들은 고대부터 현재까지 인간의 마음속에 변함없이 유지되고, 고대인이나 현대인이나 똑같이 인간으로서 감정을 느낀다.


그래서 고대 경전인 우파니샤드에서 인간의 감정을 조절하라고 한 것이고, 공자가 중용에서 감정인 희로애락이 발하기 전 상태가 중(中)이고, 제대로 발하는 것이 화(和)라고 말한 것이다.



[중용 1장]



그리고 고타마 붓다가 이야기한 나쁜 결과를 가져오는 세 가지 근원 akusala mula(아쿠살라 물라)의 탐진치라 번역되는 Raga, Dvesa, Moha 역시 감정이다.



[akusala mula]



감정은 이렇게 인간의 역사에 뿌리 깊게 박혀 있고, 변함없이 발현된다.


사회 제도, 신체 환경이 변해도 감정은 여전히 큰 변화가 없다. 그래서 석기시대에 부족장에게 느끼는 감정이나 현재 자기 팀장에게 느끼는 감정이 본질적으로 큰 차이가 없는 것이다. 족장이든 팀장이든



자신에게 잘해줬으면 하고,

그에게 인정받고 싶어 하는 감정을 느낀다.



그러면 왜 감정은 그 오랜 시간 동안 큰 변화가 없을까?


감정이라는 것을 정말 본질적으로 깊게 고찰하면 이 감정은 우리의 사고에 따른 신체 작용일 뿐, 감정이라는 것이 따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루돌프 슈타이너는 신지학에서 감각, 감정, 사고하는 기관을 신체, 영혼, 정신으로 나누었지만, 난 신체와 정신으로만 나눈다. 내가 생각하는 감정은



정신 작용에 따른 신체 반응이다.



갑자기 눈앞에 강도가 나타났을 때 심장이 빨리 뛰고, 근육이 경직되는 현상을 두려움으로 인지하는 것이다.   


인간은 신체를 통해 지각하고, 지각한 것을 사고하고, 이것을 기반으로 감정을 느낀다. 결과적으로는 신체와 사고에 녹아든 감정은 별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감정은 신체와 사고를 연결하는

연결 고리다

 








감정은 신체와 사고를 연결한다.




사고한 내용이 신체에 영향을 미치는 것을 감정이라고 한다. 감정은 정신 작용이지만, 그것을 인지하는 것은 몸이다. 와이프를 떠올리는 것은 정신작용이지만, 가슴이 뛰는 것은 몸이다. 와이프가 옆에 있어서 이러는 건 절대 아니다...


이성을 보고 가슴을 뛰는 것이 사랑이다.

호랑이를 보고 몸이 경직되는 것이 두려움이다.

야동을 보고 흥분하는 것이 쾌락이다.


예전에 기술사 채널에서 시험에 대한 두려움이 결과적으로는 신체 작용이라는 영상을 만든 적이 있다. 그리고 최근 김주환 교수의 영상을 접하면서 더 확신을 가졌다. 감정을 인지하는 것은 결과적으로 몸이다.


사고작용을 통해 몸에 변화가 오는 것이 감정이다. 심장이 펌핑이 되고, 몸이 경직되는 것이 두려움인 것이다. 아무런 신체 변화가 없다면 우리는 두려움을 인지할 수 없다. 호랑이가 나타났는데 몸이 너무나 평온하다면 두렵다고 할 수 있을까? 결과적으로 감정은 별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사고작용을 통해 발생하는 신체 변화다.








수행자들이 고행을 하는 데는 이유가 있다.


감정은 결과적으로 신체 반응이다. 그렇다면 욕체적 고통에 익숙해지면 정신적 고통에도 익숙해진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고, 인간은 인위적으로 몸에 고통을 가할 수가 있다.



그게 바로 운동이다.



나는 헬스, 필라테스, 요가를 할 때 몸에 지속적으로 충격을 가하는 동작을 선호한다. 10분 동안 이두근 터질 때까지 푸시업을 하거나, 10분 동안 허벅지 터질 때까지 런지를 하거나, 숨을 참고 잠영을 하면서 호흡 충동인 컨트렉션을 느낀다.





이걸 하면서 확실하게 느낀 것이 한 가지 있다. 현재 내가 느끼는 마음의 고통은 이 허벅지 터질 것 같고, 숨을 못 쉬는 고통보다 크지 않다는 것이다.


아무리 직장에 대한 정신적 고통을 호소하는 사람도 죽기 직전까지 호흡 컨트렉션을 느끼고 나면, 김 부장이 나에게 주는 정신적 고통은 고통이 아니게 된다. 이건 직장 생활과 물고문을 비교하면 답이 나온다.


한마디로 몸이 신체적 고통에 적응하기 시작하면 감정에 의한 고통도 적응하기 시작한다. 왜냐하면 어차피 감정에 의한 고통도 신체 작용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업에 실패해서 나락으로 떨어진 사람들이 운동을 통해 부활하는 것이고, 돈의 속성을 쓴 김승호 회장이 김밥 파는 CEO에서 남자의 힘은 가슴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가슴 근육에서 나오는 거라고 한 것이다.


내가 요가와 수영을 하는 것도 같은 이유고, 내 와이프가 죽을 고비를 한번 넘기고 슬로버피 800개를 매일 하는 것도 같은 이유다.


몸이 죽을 것 같은 느낌에 적응이 되면, 마음이 죽을 것 같은 느낌에도 적응이 된다.       

 







많은 사람들이 감정 때문에 어려움을 겪는다.


마음공부를 하지 않은 사람들은 감정을 자신과 동일시해서 어려움을 겪고, 마음공부를 하는 사람들은 감정을 제거하려고 노력하면서 어려움을 겪는다.


감정을 자신과 동일시해도 문제가 되지만, 감정을 제거하려고 해도 문제가 된다.


감정이 없으면 문학을 이해할 수 없고, 영화의 감동을 느낄 수없다. 감정은 문학을 이해하게 만들고 영화를 가치 있게 만든다. 인간에게 감정은 없애야 할 무언가가 아니다.



인간에게 감정은 신이 준 선물이다.



사람들이 감정을 억제하고 제거하려고 하는 이유는 나쁜 감정과 자신을 동일하게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건 몸과 나를 동일하게 생각하는 것과 같다. 몸이 나의 본질이 아니듯, 감정도 나의 본질이 아니다.


내가 불쾌한 것을 보고 발생하는 몸의 변화를 나와 동일시하면 그 불쾌함이라는 감정은 더 가중된다.


결과적으로 몸이 내가 아니다는 것을 깨닫고 나면, 자연스럽게 신체 반응인 감정도 내가 아니다는 생각에 도달할 수 있다.


감정에 의해 발생하는 몸의 변화들이 내가 아니다는 생각이 그 감정에 따른 몸의 변화들을 관조할 수 있게 만든다. 그래서 자기 자신의 몸을 자신의 본질과 분리시키듯, 자신의 감정도 자신의 본질과 분리시킬 수 있는 것이다.








감정이 발생하는 이유는 의외로 간단하다.


감정이 발생하는 이유는 내가 현상을 분별하기 때문이다. 분별이 없으면 감정은 발생하지 않고, 분별력이 있는 모든 사람에게 감정은 필연적으로 생길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분별을 하는 순간 호불호가 생기기 때문이다.  


감정을 간단하게 표현하면 호불호다. 이분법이 아니다. 원래부터 감정은 호불호, 쾌불쾌다. 거기서 엄청나게 많은 것들이 분화되어 펼쳐질 뿐이다. 그래서 루돌프 슈타이너가 신지학에서 호불호를 인지하는 기관으로 감정을 느끼는 영혼에 대해 이야기한 것이다.



분별력이 없는 참 자아는

감정을 느끼는 기관이 없다.



그래서 참 자아는 에고를 관조하며 감정을 경험하는 것이다. 즉, 감정은 분별을 하는 에고가 느끼는 것이고, 분별을 하지 않는 참 자아는 감정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감정을 느끼는 에고를 경험할 뿐이다. 그래서 참자아를 보고 감정을 느낀다고 하지 않고, 감정을 경험하는 주체라고 하는 것이다.


완벽한 존재인 신이 왜 불완전한 에고를 굳이 만들었을까? 이것에 대해 정말 오랜 기간 사색한 적이 있다. 내가 만약 신이라면 왜 굳이 불완하게 에고를 가진 인간을 만들었을까? 그냥 완전한 존재를 만들면 될 텐데.


정원을 너무 사랑하는 억만장자가 정원에 잡초가 보기 싫다면 정원사에게 그냥 뽑으라고 하면 그만인데, 그 잡초가 정원에 필요하다고 생각하니까 그냥 두는 것이다.  



이것은 현상계를 만드는 세 가지 기운(Guna)인 Sattva(사트바), Rajas(라자스), Tamas(타마스)라는 생각, 실행, 방해의 메커니즘을 이해하면 좀 더 쉽게 이해할 수 있지만, 이건 주제를 벗어날 가능성이 많아 나중에 다루도록 하고,


일단 내가 내린 결론은 에고를 만든 이유는 에고를 경험하기 위해서다. 결과적으로,



에고는 감정을 참 자아에게 제공하고,

참 자아는 에고를 통해 감정을 경험한다.



그래서 우파니샤드에서 나오는 새 두 마리는 항상 같이 존재하는 것이다. 그러니 에고와 자신의 감정을 배척하는 것은 옳지 않다.



  





감정은 사라지지 않는다.


참 자아의 상태에 이르면 감정이 사라진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 참 자아를 잘못 이해한 것이다. 참 자아는 감정을 느끼는 주체이고, 충분히 감정을 경험한다.


참 자아 상태가 되면 기쁨과 슬픔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기쁨과 슬픔을 있는 그대로 경험한다. 단지 기쁨은 좋은 감정, 슬픔은 나쁜 감정이라는 분별이 사라진다. 즉,



감정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분별이 사라지는 것이다.



에고를 없애고 참 자아를 찾는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참 자아는 에고를 보는 주체이며, 에고를 만든 것도 참 자아 아트만의 본질인 브라만이다.


분별을 하지 않는 참 자아가 왜 굳이 에고를 없애려 하겠는가?


분별하지 않는 참 자아는 에고를 나쁘게 생각하지 않는다. 단지 분별하는 인간이 에고를 나쁘게 인식하는 것이다.  



에고를 없애려고 하는 마음도

분별하는 우리의 에고다.



참 자아의 관점에서 보면 에고가 있든 없든 상관이 없다. 그리고 에고가 있어야 다양한 경험을 할 수 있다.


만약 전지전능한 신이 에고와 참 자아를 만들었다면 굳이 불완전한 에고를 만들 이유가 있을까? 신이 불완전해서? 신이 에고를 만든 데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우파니샤드 책 표지]



이것이 많은 종류의 우파니샤드에 계속 반복해서 나오는 두 마리의 새다.


한 마리는 열심히 열매를 따먹으면서 단 열매는 좋아하고, 쓴 열매는 싫어하면서 괴로움을 반복한다.


다른 한 마리는 열매를 먹는 새를 가만히 지켜본다.


여기서 열매를 먹는 새가 에고고, 관조하는 새가 참 자아라는 것이 우파니샤드의 가장 큰 Dharma(다르마)다.


그런데 이걸 가만히 깊게 들여다보면 참 자아가 관조하는 건 열매가 아니다. 참 자아가 관조하는 것은 열매를 먹는 새다.


결과적으로 참 자아는 현상계의 펼쳐지는 행위라는 열매를 보는 것이 아니라, 열매를 먹는 새를 보는 것이다. 즉,



참 자아가 보고자 하는 건

행위 그 자체가 아니라 에고다.



참 자아의 관심은 현상계의 물질이 아닌 것이다. 현상계의 물질에는 그 어떤 감정도 없다. 참 자아가 경험하고자 하는 건 현상계의 물질이 아니라, 현상계에 물질에 따른 에고의 행위와 감정이다.


에고가 없으면 감정이 없다. 에고가 없으면 참 자아는 감정을 경험할 수 없는데 왜 굳이 에고를 없애겠는가?








에고는 없어지지 않는다.  


에고는 감정을 느낀다. 자기가 만든 게임 캐릭터가 총에 맞아 고통을 받는 것이 안타까워서 게임을 지우면, 게임을 더 이상 하지 못한다.


게임 캐릭터는 열심히 돌아다니면서 경험치를 쌓고 여러 가지 경험을 플레이어에게 제공한다. 에고는 열심히 돌아다니면서 여러 가지 다양한 감정과 경험을 참 자아에게 제공하고, 참 자아는 아무런 분별없이 그걸 지켜본다. 그러니,



에고를 제거하려 노력하지 말고,  

참 자아가 되려고 노력해야 한다.



에고를 제거해야 참 자아가 되는 것이 아니라, 참 자아가 되면 에고를 분별없이 관조할 수 있는 것이다.


에고가 있으면 참 자아가 될 수 없다는 것 자체가 난센스다. 참 자아가 되면 어차피 에고가 있든 없든 아무런 상관이 없는 상태가 된다.  


에고가 없어져야 참 자아가 된다면 우파니샤드에 새 두 마리는 같이 존재할 수가 없다. 위에 있는 저 그림이 존재할 수 없는 것이다. 즉, 에고를 없애서 참 자아를 찾으려고 하는 사람은 우파니샤드의 참 자아 아트만을 잘못 이해한 것이다.


내가 만약 우주의 본질인 양자장 그 자체가 되면 그것이 입자화가 되든, 파동 상태로 남아 있든 무슨 상관이 있단 말인가?


내 정신이 만약 신과 같은 상태가 되면 인간 상태로 남아있는 내 육체와 에고가 소멸을 하든, 남아 있든 무슨 상관이 있단 말이가?


결론적으로는 에고의 존재 여부는 참 자아와 아무런 상관이 없다. 그러니 에고를 없애려고 하지 말고, 참 자아를 찾으려고 노력해야 한다.


대부분의 마음 공부하는 사람들이 참 자아를 찾는데 힘들어하는 이유가 감정을 배척하고, 에고를 없애려고 하기 때문이다.



감정은 배척하면 할수록 커진다.



감정은 관조의 대상이지, 제거의 대상이 아니다.








감정은 신이 우리에게 준 선물이다.   


우리는 감정이 있기 때문에 사랑을 하고, 가정을 꾸리고, 아이를 가지고, 감동을 받고, 눈물을 흘린다.


단지 좋은 것만 가지려고 하는 인간의 욕망이 감정을 배척하는 것이다.



감정에는 옳고 그름이 없다.



그것을 판단하는 사회적 가치관이 옳고 그름이 있고, 그것을 느끼는 인간이 좋고 나쁨을 분별할 뿐이다.


그러니 감정은 감정대로 느끼고 감정을 경험하는 나 자신을 분별없이 관조하면, 감정을 경험하지만 감정에 끌려다니지 않을 수 있다.


이것이 감정을 관조하는 참 자아의 본질이다.


이것에 가까워지면 신과 같은 참 자아와 유사한 수준으로 현상계에서 다양한 감정을 경험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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