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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과 뼈, 아이리스

by 모즈

1926년, 조지아 오키프(Georgia O'Keeffe, 1887-1986)가 '블랙 아이리스Black Iris'를 발표하자 당시 기자와 평론가들은 앞 다투어 작품에 대한 평가를 쏟아 내었습니다. '진정한 미국 모더니즘의 탄생' 이라거나 '여성성을 극대화한 페미니즘적 작품' 이라고 말이죠.

하지만 이에 오키프는 단호히 말합니다. '내가 그린 것은 그저 꽃이다.'라고요.


블랙 아이리스, 조지아 오키프 1926년


내가 그린 것은 꽃이다


그녀의 단호한 입장과는 달리 평단에서는 여전히 이것이 여성의 생식기를 그린 것이라거나, 남성에 대항하기 위한 여성성의 표출이라는 제멋대로의 해석이 이어집니다. 오키프는 작가로 활동하는 동안, 아니 살아 있는 내내 이는 사실이 아님을 항변해야 했고 이 논란은 그녀가 이미 사망한 지금도 이어지고 있습니다.

안타까운 일이죠. 왜 작가의 의도를 있는 그대로 받아 들이지 않고 곡해해 버리는 걸까요. 이는 아마도 당시의 시대상과도 맞닿아 있을 것 같아요. 20세기가 되었다고는 해도 당시는 고작 1900년대 초에 지나지 않습니다. 여성의 사회 활동이 여전히 제한되었던 때예요. 또한 오키프의 그림은 당대의 일반적인 화풍과는 달리 상당히 실험적이고 진보적이며 추상과 구상을 넘나들기 까지 합니다. 평론가들의 상상력이 덧씌워지기 좋은 조건이지요.

평론가들이 색안경을 끼고 이 작품을 보게 된 데에는 그녀의 사생활적 요인도 있지 않았을까 해요. 조지아 오키프는 1924년, 유명 사진 작가인 알프레드 스티글리츠와 결혼합니다. 스티글리츠는 23살 연상으로 둘의 첫 만남은 1916년으로 알려져 있어요. 이때 스티글리츠는 52세로 이미 결혼한 상태였습니다. 그럼에도 두 사람은 예술적 영감을 공유하며 많은 공감대를 쌓기 시작합니다. 이러한 관계가 이어지다 1924년 스티글리츠가 첫번째 부인과 이혼하며 바로 이어서 오키프와 결혼을 하게 된 것이지요.


스티글리츠는 오키프를 뮤즈로 삼아 수백장의 초상화와 누드 사진을 찍습니다. 그는 오키프를 현대 여성의 모델로 삼고자 했어요. 특히 파격적인 오키프의 누드는 세간의 주목을 받기에 충분했습니다. 오키프는 이러한 스트글리츠의 행동에 무척 불편해 했지만 무명이었던 그녀에게 주목 받을 수 있는 기회가 되었던 것은 분명해요. 두 사람은 평생 동안 서로 사랑하기도 하고 증오하기도 하며, 보통의 사람으로선 쉽게 이해할 수 없는 부부이자 예술적 파트너쉽을 이어갑니다.

이렇듯 작품 외적인 부분들이 얽히고 섥켜서 본질은 망각된 채 한낱 가십으로 치부된 것만 같아요. 하지만 블랙 아이리스 꽃을 본다면 평론가들이 틀렸음을 단박에 알게 될 거예요.


블랙 아이리스

블랙 아이리스, 출처 www.longfield-gardens.com


아이리스(Iris)는 붓꽃과(Iridaceae)에 속하는 다년생 식물로 전세계 300종 가량이 분포하고 있어요. 주로 북반구의 온대와 아한대 기후에 넓게 펴져 자생하고 기후와 토양에 따른 적응력이 강해 어디에서건 쉽게 볼 수 있습니다. 색상 또한 흰색, 노란색, 보라색, 분홍색, 파란색 등 매우 다양하고요, 상업적으로도 품종 개량이 많이 이루어졌기 때문에 봄이면 꽃 시장에서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어요.


블랙 아이리스는 색소인 안토시아닌이 풍부해 검은빛을 띱니다. 정확히 검정이라기 보다는 짙은 남색이나 보라색이예요. 또한 붓꽃과의 꽃은 주로 구근이 많은 것에 비해 블랙 아이리스는 뿌리근인 경우가 더 많습니다.이는 건조한 토양에서도 성장이 가능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으로 보여요.

블랙 아이리스에도 여러 종이 있는데요 그 중 Iris ‘Before the Storm’ 라는 종은 가장 검은 빛깔에 가깝고 건조한 토양에서도 잘 자라기 때문에 미국의 남부지역, 특히 조지아 오키프가 주로 활동했던 뉴멕시코 지역에서도 잘 자랐을 것으로 예상이 됩니다. 오키프가 본 것이 이 종이라 단언할 수는 없지만 분명 블랙 아이리스를 직접 보고 그린 것 만은 확실합니다.


꽃을 가까이서 본 적이 있나요?


플로리스트인 저는 매일 많은 종류의 꽃을 다룹니다. 그러나 직업인 탓에 꽃을 만지거나 볼 때의 감흥은 그리 크진 않아요. 저에겐 꽃이 매일 대하는 일과 혹은 일 그 자체이기 때문이겠죠. 이렇듯 꽃의 예쁨을 잊고 사는 저 역시도 가끔은 그 아름다움에 매료되는 때가 있답니다. 꽃을 10cm 이내로, 나의 시력이 닿는 만큼 가까이에서 볼 때 예요.

코 끝에 꽃이 닿을락 말락하고 꽃의 내음은 온전히 콧 속으로 전해 지지요. 후각이 무뎌질 때면 눈 앞에는 작은 우주가 펼쳐 집니다. 노랑인줄 알았던 꽃잎의 색은 노랑이 아니고 그저 하얀줄만 알았던 꽃잎에는 여러 모양의 점들이 알알이 박혀 있습니다. 어떤가요? 이 장면만으로도 예술적 영감이 되지 않았을까요?

나의 꽃들, 제가 찍었어요 :)


아무도 꽃을 보지 않는다.
나는 그것을 크게 그려 사람들이 보게 한다.

조지아 오키피는 1929년, 뉴멕시코의 사막지대를 여행한 후 이곳의 자연에 매료되고, 뉴멕시코는 그녀 작품의 원천이 됩니다. 스티글리츠가 사망한 후에는 평생 이곳에 머물며 작품 활동을 이어가요. 사막의 독특한 지형과 그곳에서 줏은 죽은 동물뼈 등은 작품의 주요 소재가 됩니다. 물론 살아 있는 꽃 역시 그녀 작품의 중요한 모티프 임에는 변함이 없어요. 오히려 더 많은 꽃을 그리게 됩니다.


좌 Jimson Weed White Flower No. 1, 1932 / 우 Summer days, 1936


죽은 동물의 뼈 그리고 살아 있는 꽃을 번갈아 그리며 삶과 죽음, 자연과 도시(스티글리츠와 함께 지냈던 뉴욕), 사막과 건축물 등 상반되는 개념들에 대해 그녀만의 철학과 기법으로 표현합니다. 흔히 그녀의 그림을 '확대의 미학'이라 합니다. 크게 그리는 것 만으로 대상이 다르게 보이는 것이죠.


98세의 나이로 생이 다할 때 까지 오키프는 수 많은 작품을 남기게 됩니다. 살았던 시간이 오래인 만큼, 그리고 그녀가 지나왔던 시대가 여성으로서는 유난히 질곡이 많을 수 밖에 없었던 때이니 만큼 그녀를 둘러싼 소소한 잡음들은 끊이지 않았어요. 하지만 실없는 가쉽들 조차 그녀가 얼마나 당대에 영향을 끼친 인물인지 방증해 주는 것 같습니다.


오키프는 스스로를 구상화가라 했지만 사람들은 추상화가라 했고

여성운동에 대해서는 관심도 없었지만 사람들은 페미니스트라 했고

그저 사물을 크게 그렸을 뿐인데 사람들은 미국 모더니즘의 선구자라 했어요.


하지만 그녀 역시 몰랐을 거예요. 그녀가 부정했던 모든 것이 어쩌면 그 시대가 진정 원하던 바였다는 것을요.


꽃과 뼈의 화가, 조지아 오키프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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