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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먼트 Oct 10. 2024

스위치 K 파트 1

어린선증후군 (KID Syndrome) 아이와 함께 걷는 삶 (21)

K.I.D. Syndrome. 하준이의 병명이다.


Keratitis Ichthyosis Deafness의 줄임말이기도 하다. 단어의 순서대로 그 의미를 되짚어보면 각기 각막염(눈), 어린선(피부), 그리고 청력손실(귀)을 뜻한다. 각각이 뜻하는 바도 충분히 무서울진대, 이 모든 것이 한 사람에게서 동시에 발현되는 것이 K.I.D Syndrome이다. 성인병들처럼 자기 관리를 통해 예방하고 피해 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발현이 되고야 마는 놈들이다. 중증이든 경미하든. 그리고 애석하게도 현대 의학에선 마땅한 치료법이 존재하지 않는다. 


위에 열거한 세 영역 중에서 하준이는 태어남과 동시에 어린선증후군과 청력손실이 있음이 밝혀졌다. 그리고 당연히 나와 아내는, 그리고 관련 모든 의료진은 이 두 부분에 더 각별히 초점을 맞춰서 하준이의 건강을 관리해 왔다. 눈에 확연히 보이는 검증된 증상부터 관리하는 건 당연한 이치였다. 관여된 모든 사람들이 노력이 헛되이 되지 않고 빛을 발했기에 하준이는 조금씩 좋아졌다. 피부는 각종 연고와 로션 등으로, 청력손실은 보청기로 커버가 가능했다. 피부 관련 증상으로 머리카락이 많이 나지 않아서 여전히 외견상 남들과 조금 구별되지만, (그래서 때로는 차별을 받지만), 점점 부드러워지는 피부와 보청기를 끼고서 말하고 듣고 쓰기 시작한 하준이의 모습은 최악을 상정했던 과거에 비해 긍정적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준이의 저 병명은 여전히 K를 가지고 있었다. 그것도 첫 글자로 말이다. 어느 순간 툭 스위치가 켜져서 우리의 사랑스러운 아이를 괴롭힐지 몰랐다. 그 스위치가 하준이의 염색체 안에 숨어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마치 우리가 안도할 타이밍을 기다리고 있던 것처럼 말이다.


하준이가 6살쯤 되던 어느 날, 동네 친구와 함께 모래 놀이를 한 적이 있었다. 모래 놀이를 하고서 눈에 모래가 들어간 것인지, 그다음 날부터 왼쪽 눈을 계속 비비며 불편해했다. 하준이의 눈을 조금 들여다보니 눈동자 위에 아주 작은 흠이 생긴 것 같았다. 걱정되는 마음에 부랴부랴 안과에 전화를 걸어 예약을 잡고 어린 시절부터 하준이를 진료해 준 소아 안과의사 Dr. Bordenca를 만났다. Dr. Bordenca는 실력이 좋은 어린이 안과의사였다. 다만, 그의 병원엔 늘 진료환자가 많아서 우리가 원하는 질문을 마음껏 하지 못하고 나올 때가 많다는 것이 불만이라면 불만이었다. 아, 그리고 무지막지한 속도로 영어를 뱉어낸다는 점도.


하준이의 눈을 현미경과 여러 도구로 살펴본 Dr. Bordenca는 이 증상이 단순히 모래 알갱이로 인해서 생긴 것 같진 않다고 했다. 그리고, 애틀랜타 도심에 있는 큰 안과전문병원에 근무하는 Dr. Allen Lee를 소개해주면서, 이 의사가 K.I.D. Syndrome 아이를 진료해 본 적이 있으니 거기로 한 번 가보는 것이 좋다고 했다. 또 다른 전문의를 본다는 생각에 마음이 조금씩 더 긴장되기 시작했다. 보통 의사가 자신의 능력범주 외의 어떤 증상을 볼 때 다른 전문의를 소개하는 것이 일반적이니까. 병원에서 나와서 간호사가 준 카드를 보며 Dr. Allen Lee의 병원에 전화를 걸어 예약했다. 그 병원도 역시나 바쁜지 우리는 약 2주 정도를 더 기다려야 했다. 이럴 때마다 느끼는 것은 세상에 아픈 아이들이 너무나도 많다는 사실이다.


그렇게 우리는 Dr. Allen과의 예약날짜를 기다리며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 병원에 가기 며칠 전 아침, 하준이가 잠을 자고 일어나 우리 부부의 방으로 찾아왔다. 아침에 늘 하는 루틴이다. 우리 부부 사이에 파고들며 이불 안에 들어가 온기를 느끼는 것이 하준이의 아침 첫 일과이다. 이는 밤늦게 퇴근해서 아이들이 잠드는 모습을 보기 힘든 나에게는 보물과도 같은 순간이다. 마구 쓰다듬고 꼭 안아준다. 전날의 피로가 녹아내리는 시간이랄까. 그런데, 내 팔 안에서 기분 좋은 웃음을 짓던 하준이가 갑자기 표정을 바꾸며 조금은 슬픈 눈으로 나를 쳐다보며 말했다. 하준이가 이런 표정을 지을 때는 좋은 신호가 아니었다. 


“아빠, 나 눈이 안 보여.”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내가 이불을 박차고 일어나 하준이에게 되물었다. 내 육체가 낼 수 있는 반응속도의 한계를 상회하는 속도였다고 자신한다. 머리가 쭈뼛서며 섬뜩했다. 진짜 안 보이는지, 어디가 안 보이는지, 혹시 아픈지 등등 재촉하듯 하준이에게 질문을 쏟아냈다. 하지만, 만 6살짜리 아이가 어찌 자신의 증상을 자세히 다 설명하겠는가. 시간이 조금 지나자 하준이의 시선이 나에게 향했다. 초점이 맞았다. 눈을 껌뻑껌뻑 하던 하준이에게 주변이 서서히 보였나 보다. 다행히 앞이 보인다고 했다. 놀랬을 하준이를 안아주고 달래어 아침을 먹으러 아래층으로 내려가고자 했다. 하준이는 유달리 내 손을 더 꼭 잡고 있었다. 그렇게 첫 계단을 내려가려는 순간, 하준이가 발을 헛디뎠다. 아차 하는 사이에 하준이의 손이 내 손에서 빠져나갔다. 


“아빠!!!!!!”


비명소리와 함께, 하준이가 계단 앞쪽으로 다이빙하듯이 미끄러져 내려가고 있었다. 쿵. 쿵. 쿵. 쿵. 계단을 따라 하준이의 몸이 고통스럽게 들썩이며 가속이 붙고 있었다. 나 역시 하준이의 이름을 연신 소리치면서 급하게 쫓아내려 갔다. 거실 나무 바닥에 머리를 찧기 몇 계단 전, 내리막의 중턱에서 낚아채듯 하준이를 건져 올려 내 품에 안았다. 놀란  아이는 울음을 터뜨렸다. 다행히도 계단이 카펫으로 덮여 있어서 턱과 팔뚝에 약간의 타박상을 입었을 뿐 크게 다친 곳이 없었다. 큰 소리에 놀란 아내가 안방에서 뛰쳐나와 무슨 일이 있는지 물었다. 내가 하준이를 그렇게 애타게 부른 적이 없었다면서.


“나 잠깐 계단이 안 보였어.”


아침 식사를 하기 위해 식탁에 앉은 하준이가 울먹이며 말했다. 등을 타고 한기가 지나갔다. 온몸에 털이 곤두서고 있었다. 아직 Dr. Allen과의 진료는 거의 일주일을 더 기다려야 했다. 시간은 걷는 속도를 늦췄다. 밤은 길어지고 일과시간은 그저 눈앞의 처리해야 하는 일 때문에 걱정이 마음을 좀 먹는 광경을 못 보고 있을 뿐이었다. 그 와중에 내 본능은 끊임없이 나에게 무언가 말하려고 하는 듯했다. 독자들도 알겠지만, 이럴 때의 본능은  무서우리만치 정확할 때가 있다. 그 정확함을 증오했다.


이제껏 코끝이 시리도록 감사했던 하준이의 성장기 뒤에 숨이 있던 마지막 스위치.

스위치 K가 켜지려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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