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선증후군 (KID Syndrome) 아이와 함께 걷는 삶 (24)
Vascularization 진단 이후, 즉, 스위치 K가 켜진 이후, 하준이의 왼쪽 눈은 점점 그 빛을 잃고 흐려지기 시작했다. 진단의 내용을 눈으로 확인하게 된 것이다. '증명'이라는 과정을 좋아하는 나에게 이리도 저주스러운 확인절차가 있을까 싶다. 하준이가 보는 시야가 흐려졌을 뿐만 아니라, 겉으로 보이는 눈동자의 색도 다른 눈에 비해 그 선명도에 물이 빠지기 시작했다. 막 태어났을 때, 아마 그리고 돌 전후 정도까지, 아기들은 세상 모든 것을 비출 만큼 투명하고 깨끗한 눈을 가지고 있다. 나 역시 하준이의 그런 눈을 기억한다. 거울보다 투명해서 나 자신마저 비춰 보이는 맑은 눈동자의 하준이를 말이다. 그 맑았던 눈동자에 상처가 생기고 조금씩 뿌옇게 덮여가는 모습은 견디기 힘든 고통이었다.
가끔 하준이는 안쓰럽게도 한 손으로 오른쪽 눈을 가려가며 왼쪽 눈으로 얼마나 보이는 지 이리저리 눈동자를 굴리며 확인하기도 했다. 침울한 표정이 곧 뒤따랐다. 그리고 처연히 우리를 보는 모습도. 그러나 그렇게 자가 확인하는 빈도수는 점점 줄어갔고, 하준이 역시 자신의 왼쪽 눈의 상태를 받아들여가는 듯했다. 아이가 아픔을 받아들이는 것을 지켜보는 건 부모로서 참 힘든 일이다. 그 마음속에서 무엇을 삭여내고, 무엇을 견뎌내고, 어떤 굳은살들이 침전되어 가는지 감히 가늠은 해도 그 실체를 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나와 아내는 기회가 되는 대로 하준이의 왼쪽 눈 위에 손을 올려 기도했다. 부모라고 해도 해줄 수 있는 건 두어 손가락 안에 꼽혔다. 기도는 그중 첫 번째였다. 세안을 해줄 때나, 얼굴에 로션을 발라줄 때나, 자기 전 침대에서 뒹굴 뒹굴 할 때 우리는 늘 하준이를 위해 기도했다. 우리가 얹은 손의 온기에 하준이는 눈을 함께 감고 기도했다.
최초 진단 이후 4년이란 시간이 지난 지금, 하준이는 왼쪽 눈 시력의 90% 정도를 상실했다. 그 시간 동안 오른쪽 눈으로 보는 세상에 익숙해져서인지, 하준이는 더 이상 자신의 왼쪽 눈 시력을 체크하려 하지 않는다. 4년이면 이 녀석 인생의 40퍼센트에 달하는 시간이다. 그리고 4년이면 신체의 각 부분이 그 쓰임에 따라 적응하고 굳혀져 갈 만한 시간이다. 글씨도 4년을 쓰다 보면 주로 쓰는 손가락들에 두터운 굳은살이 배기 듯, 눈도 마찬가지이다. 하준이는 오른쪽 눈의 의존도가 워낙 높아서 오른쪽 눈은 눈동자를 움직이는 데에 제약이 없는 반면, 왼쪽 눈은 눈동자의 움직임이 둔해지고 있다. 예를 들어, 하준이가 정면이 아닌 다른 곳을 볼 때는 마치 두 눈동자가 다른 곳을 보고 있는 것 같을 때가 있다. 이를 보며, 괜스레 속상해진 나와 아내는 눈을 똑바로 뜨라며 애먼 잔소리를 하기도 한다. 그것이 하준이의 잘못이 아니란 걸 누구보다 잘 아는 게 우리다. 그럼에도 한 곳을 함께 바라보지 못하는 눈동자들에 온갖 생각이 스치우는 게 부모의 마음이기도 하다.
시력의 균형이 깨짐에 따라, 하준이의 원근감도 조금씩 둔해져 가기 시작했다. 입체적으로 보던 세상은 그 녀석에게 조금씩 평면화되기 시작했다. 이게 뭐 수학에서 3차원 입체공간을 2차원 평면에 대응시키듯 그리 직관적인 게 아닐 것이다. 서서히 바뀌는 변화였을 것이고, 당연히 하준이도 알게 모르게 체감하고 있었을 것이다. 아니, 분명 변화가 있다. 예전에 나와 함께 공놀이를 할 때 잘 잡던 공도 지금은 더러 놓치는 경우가 있다. 물론 평소에도 딱히 운동신경이 좋은 편은 아니었지만 시력에 둔화는 확실히 영향을 미쳤다. 뿐만 아니라, 그림 그리는 것을 좋아하는 하준이는 공룡과 로봇과 만화캐릭터들을 많이 그리는 데, 그 그림들에 음영을 넣고 입체감을 넣는 것을 매우 어려워했다. 하준이에게 입체감과 원근감은 더 이상 경험이 아닌 지식으로 접해야 하는 개념이 되어가고 있었다.
학교생활에서도 조금씩 불편함을 겪기 시작했다. 미국은 대부분의 공립학교에서 빔프로젝터와 크롬북 등을 이용해서 수업을 진행하는데, 디지털 기기에 반복적으로 노출되는 눈이 피로감을 쉬이 느껴 충혈되는 일도 잦아졌다. 오른쪽 눈이 홀로 책도 읽고 화면도 스캔해 내느라 고군분투했다. 부족한 시력을 메꾸기 위해, 하준이는 공부할 때면 늘 얼굴을 지면에 파묻듯이 가까이 가져대곤 했다. 집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책을 읽을 때 TV를 볼 때 하준이는 매체에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려고 했다. 그로 인해 시력이 더 저하될까 염려하는 건 부모인 우리의 몫이었다.
그러나 이렇게 그냥 둘 순 없었다. 하준이의 눈이 물리적으로 부족하다면, 이를 채우고도 남을 압도적으로 많은 사람의 수로 도와주기로 했다. '-1+x'이 수식을 늘 양수로 바꿔줄 필요가 있었다. x에 무언가 대입해야 했다. 그리하여, 하준이 주변에 모든 이들이 하준이의 또 다른 눈이 되어주기 위해 함께 노력하기 시작했다.
먼저, 학교 선생님들은 slant board라는 기울림판을 하준이에게 제공해 주었다. 조금이라도 하준이가 수업에 편하게 참여하도록 도와주기 위해서였다. 오른쪽 눈으로 칠판을 보는 하준이를 위해 책상 위치도 바꿔주었다. 또한, 선생님들은 컴퓨터로 시험을 치러야 하는 경우가 생기면 폰트사이즈가 큰 화면을 띄워주고, 수업자료도 하준이가 원하면 좀 더 큰 사이즈로 출력해서 줄 수 있다고 했다. 이미 청각과 스피치 쪽으로 많은 도움을 받고 있던 터라, 우리로선 그런 제안 하나하나가 다 고마운 일이었다. 공립학교에서 단 한 명의 학생을 위해 그렇게 신경 쓰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을 이해하기 때문이다. 한 선생님이 말하길, 이 또한 하준이가 학교생활을 너무나도 예쁘게 해내고 있어서 모든 선생님들이 하준이를 좋아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런 선생님들의 마음과 노력을 아는지, 한쪽 눈으로 생활하는 것이 불편하고 힘들어서 피할 법도 한데도 하준이는 군소리 한 번 안 하고 이겨내고 있었다. 학부모 상담차 학교에 가서 담임선생님과 대화를 해보니, 화이트보드와 스크린이 안 보이면 손을 번쩍 들어 담임선생님께 양해를 구하고 교실 제일 앞으로 나가 바닥에 앉아 수업을 듣기도 한다고 했다. 다른 수업도구들도 필요에 따라 요청하기도 하면서, 자신에게 가장 잘 맞는 수업환경을 추구하고 있다고 했다. 누굴 닮아 저렇게 적극적인지. 늘 생각하지만, 제 부모보다 더 긍정적이고, 더 밝고, 더 용기 있는 아이이다. 타고난 성실성과 우직함은 덤이었다.
우리 또한 가정에서 하준이를 돕기 위한 최선을 택하고 있다. 자주 충혈이 나는 눈 관리를 위해서 안약과 연고를 철저하게 투여하고 있고, 그 사이 안경도 두어 번 맞추었다. 안경을 맞춘 이유는 시력의 보조도 보조지만, 이물질로부터 오른쪽 눈의 표면을 한 번이라도 더 방어하고자 하는 측면이 더 컸다. 하준이의 안과의사인 Dr. Bordenca의 조언이었다. 여름에 수영장이나 바다에 가면 잠수하기를 좋아하는 하준이를 위해 수경 또한 필수였다. 아내는 하준이가 아침에 일어나면 따뜻하게 데운 안대를 눈에 씌워주고 밤 사이 휴식을 취한 눈이 갑자기 빛에 노출되지 않고 서서히 떠질 수 있게 도와주었다. 눈에 피로도가 올라가면 반대로 냉동실에 얼려놓은 안대로 부기를 가라앉혀주기도 했다. 모르긴 몰라도, 하준이와 두 살 터울 나는 동생 녀석도 하준이를 제법 챙기고 도와줬을 것이다.
어쩌면 이 모든 노력을 합쳐도, 하준이가 가지고 태어났던 그 맑은 눈에 못 미칠지도 모른다. 그 눈은 하준이에게 가장 완벽했고 가장 아름다웠을 눈일 테니까. 그래서 무엇을 x에 대입하든, 영원히 그 수식, '-1+x'를 양수로 만들 방법이 없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와 아내, 그리고 하준이의 동생을 비롯한 주변 모든 사람들은 줄다리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1'을 수직선의 오른쪽으로 잡아끌고 있는 것이다. 시력을 빼앗겼다 하여 어둠을 본다는 것은 어리석은 인과관계라고 외치는 것이다. 시력을 뺏겨도 빛을 볼 수 있다. 우리가 하준이의 왼쪽 눈이 되어줄 것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