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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에나 Feb 19. 2020

갑툭튀 선물에 담긴 엄마의 투박한 진심

(feat, 강남필통)







"아니! 이걸 왜 사?!!"

"그거야 네가 갖고 싶어하는 거니까."

"내가 언제, 누가 갖고 싶댔어?! 내가 무슨 여덟살짜리야? 여덟살 짜리가 좋아할만할 필통을 무슨 서른세살한테 사줘!!!"

"...."




"야! 너 좀 조용히해! 일단 출발한다."






지난 주말이었다. 이번 해에 초등학교에 들어가는 조카의 입학선물을 위해 백화점에 들렸다가 주차장을 빠져 나오는 길이었다. 포인트 적립을 못한 영수증이 있어 엄마와 언니가 조카의 책가방을 사는 동안 나는 고객센터에 들렸다 주차장으로 와서 언니차로 올라탔다.

 


순간 뒷자리에서 엄마가 의기양양하게 보조석의 나에게 쇼핑백을 하나 넘겼다. '뭐지?'하는 마음으로 열어보니 좀 전에 책가방을 고르며 구경했던 연보라색 필통이었다. 기가 찼고, 머릿 속 화의 게이지가 금방 풀업되었다. 그리고 위의 상황이 펼쳐진 것이다.










출처: 파스텔몰




"이게 요즘 강남에서 유행하는 필통이래."

"그래? 예쁘네... 뭐?! 삼만이천원?! 미쳤네 " 

"그러니까. 귀여운데 너무 비싸..." 



인터넷에서 강남에서 유행하는 필통이라며 한번쯤 본 필통을 언니에게 소개했다. 하트, 별, 토끼, 축구공, 우주선 등 귀여운 무늬가 알록달록한 색감으로 어우러져 올록볼록 엠보싱 처리된 고급 필통이었다. 도시락통에 맞먹을 만큼 크기도 컸고, 두툼한 두께와 화려함에 대비되는 앙증맞음이 아이들의 맘을 훔치기에 충분했다. 내가 좋아하는 연보라색도 있어 집어들어 구경했다.




"이것 좀 봐. 귀엽다! 근데 왜케 커? 일학년이 이렇게 큰 필통이 필요해?"

"완전 도시락통만하네."

"에이 그럼요- 고객님. 이 필통은 지금 아니면 못써요. 학년 올라갈수록 교과서도 많아지고 가방 무거워져서 못써요."

"아아...(그런 의미구나!)"

 


"귀엽기는 정말 귀엽네."


앙증맞은 필통을 구석구석 구경하다가 귀여움에 어울리지 않을 사악한 가격에 서둘러 만지작 저리던 필통을 내려놨다. 언니가 책가방, 실내화주머니, 필통 도합 18만원에 가까운 지출을 하는 걸 보다가, 시간을 아끼겠다며 고객센터에 들렸다가 주차장으로 합류하기로 하며 자리를 떴다.



그리고 다시 만난 이 필통..


화가 머리끝까지 난다는 기분은 이런 기분이었구나? 나는 요즘 예민하다. 결혼을 염두에 두며 경제적인 부분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했고, 다른 한편으로는 내가 떠난 집에서의 엄마아빠 역시 걱정스러웠다. 이렇게 센치해서 얄팍해진 마음에 갑자기 파문을 일으킨 필통!!!!! 나이들수록 돈이 권력인데, 엄마는 왜 돈을 안 아끼고 쓸데없이 이런 걸 사주는 거야!! 으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진짜 짜증나.









보조석에서 씩씩거리며 필통을 노려보는

나의 윽박에 몇마디 받아치다가 더이상 말을 하지 않는 엄마 

그 사이에서 운전을 하며, 한숨만 푹푹 쉬는 언니

뒷자리에서 나와 엄마의 대화를 들으며 눈치 보는 조카



대환장의 파티였다. 맘같아서는 당장 백화점으로 돌아가 환불받고 싶었다. 하지만 상황이 여의치 않았다.

하필 이날 남자친구까지 조카의 입학을 축하하려 오기로 한 날이었다. 우린 백화점에서 선물을 사고 다시 본가에서 남자친구와 아빠를 만나 다 함께 저녁식사를 할 예정이었다. 토요일 오후 백화점 주차장을 겨우겨우 빠져나오고, 그 주변 번화가를 빠져나오는 데에만 30분이 넘게 걸렸다. 서둘러 출발해야 모두의 약속시간에 늦지 않을 시간이었다. 죽어도 환불하고 싶었지만 언니에게 차를 돌려달라고 말할 염치도 없었고(언니에게 맞을까봐 무서웠다.), 그렇다고 차를 유턴시킬 언니도 아니었다. 뚱해져서 입이 오리주둥이처럼 나온 채 남자친구에게 카톡을 보냈다.



<호야. 있다가 애기 선물주고, 우린 바로 나가자.>

<응? 저녁 식사는?>

<아 엄마가 여덟살 짜리나 쓰는 필통 나한테 사줬어. 심지어 삼만 이천원이야. 진짜 짜증나!!>

<응??>


아무런 상황 보고 없이 메시지를 받은 남자친구는 얼마나 황당했을까.



삼만 이천원짜리 필통의 자태를 사진으로 찍어 남자친구에게 보냈다. 화는 여전히 나는 데 필통의 고운 색감과 귀여움을 살리려 굳이 필터 카메라를 골라서 사진을 찍었다. 이러는 내 모습도 웃기고, 어이가 없었다. 사실 말도 안되게 비싼 필통이 귀여웠다. 맘에 들었다. 이런 유치한 필통을 맘에 들어하는 내 모습도 짜증나.


그때였다. 엄마의 소심하지만 분명한 마음이 무심결에 내 마음의 빈틈을 치고 들어왔다.


"니가 아까 갖고 싶어하는 것 같은데, 내돈주고 사기에는 아까운것 같아 보이니까 엄마가 사줬지. 너 초등학교 입학할때 우리집 어려워서 그때 못해준 게 생각나서. 그리고 너 글 쓰잖아. 그럼 계속 필통이 필요하잖아.."

"아씨.."

"안 쓸꺼야?"

"....."

잠시 필통의 지퍼를 열어 구석구석 구경하는데, 조카가 나를 자극한다.


"할머니! 할머니!! 이모 안 쓰면, 나 쓸께! 나 쓸래! 나줘."

"그래. 이모 안쓰면 줄께. ** 써."

".....쓸꺼야."







이렇게 초등학교에 입학하게 되는 어린이 필통을 서른셋의 나이에 선물 받게 되었다. 덩치 큰 필통안에는 6색 돌돌이 색연필과 안전 가위, 연필 두자루, 자, 립스틱모양 지우개가 들어있었다. 저걸 어따쓰지?


잠시 생각해보니, 크기가 딱 다이어리 크기였다. 다이어리와 간단한 펜과 다이어리 꾸미기용 스티커를 넣어야지. 안 그래도 다이어리 스티커를 보관할 것이 따로 없어서 고민이었는데, 한큐에 해결!




그동안 이번에 필통을 선물 받은 것만큼이나 엄마는 우리 식구들이나 주변 사람들에게 뜬금없는 선물을 자주해왔다. 별다른 이유가 없어도 문득 고마운 생각이 들어서, 그저 좋아하니까 선물하고 싶어서 선물한다.


엄마가 건 낸 예상치 못한 선물, 그 안에 담긴 엄마의 투박한 진심, 상대방을 위하는 순수한 마음을 다시 한 번 생각해본다.





다이어리와 색깔과 사이즈가 찰떡!



나도 엄마를 닮아 갑툭튀 선물을 즐겨하는 편이지만.. 이렇게 실제 나이와 사용 연령의 갭이 큰 선물을 받게 될 줄이야. 그래도 아무튼 엄마 고마워. 잘 쓸께! (어디선가 오늘도 나 몰래 내 브런치를 보고있을 엄마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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