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기억력은 이토록 나약하다
2024년 상반기 취업시장은 끝난 지 오래. 하지만 나의 이직 여정은 끝나지 않았다. 중고신입으로만 눈을 돌리니 공고가 없다고만 생각했는데, 나 이래 봬도 경력직이잖아? 경력으로 눈을 돌리니 완전 fit하지는 않지만 공고가 꽤나 보였다.
라떼시절 취업공고를 볼 때는 '자소설닷컴'을 제일 많이 이용했었다. 물론 지금도 1차 공고는 이 플랫폼에서 찾지만, 아무래도 경력직보다는 신입에게 좀 더 어울리는 플랫폼인 것 같다. 지금은 어떻냐고? 나의 즐겨찾기는 하나둘씩 늘어나는 중이다. 사람인, 원티드, 잡다, 잡코리아, 리멤버, 잡플래닛 등등.. 어느 하나 가리지 않고 다 가입해서 눈팅하는 중이다. 오늘은 어디에서 무슨 공고나 떴을까. 내 직무는 씨가 말랐네-
언제쯤이면 취업시장이 활성화가 될까? 내가 보기엔 매년마다 어려워질 것이라 본다. 물론 경제상황이 좋지도 않거니와, 5년 전만 해도 AI가 인간을 대체할거라는 세상이 뚜렷하게 그려지지 않았었다. 하지만, 지금은 시대가 달라졌다. 전문성을 요구하는 것도 AI는 인간보다 빠르게 계산하고, 답을 찾고, 알려준다. 비전문성인 것도 마찬가지다. 이젠 사람이 일일이 작업해야 했던 것들을 기계가 선별하고, 배달하고, 만든다. 점점 인간이 해야 할 일이 줄어들고 있다.
전에도 한 번 작성했지만, 처음 입사했을 때는 이제 다시는 자소서와 마주칠 일이 없다고 생각했었다. 이제 돈도 벌면서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커리어 부분이 아닌, 결혼이라든가 자가 마련이라든가 등등) 고민할 일만 남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니었다. 누군가가 싸한 느낌을 받는다면 과거의 나의 빅데이터와 미래의 내가 보내는 신호라고 했던가. 나는 나를 구원해 준 현회사를 나오기로 결심했다.
그토록 숱하게 써왔던 자기소개서지만, 나는 사실 글솜씨도 그리 뛰어나지 않거니와 그동안 글쓰기 실력도 많이 퇴화했다. 지원동기를 쓰려고 하면 왜 이렇게 엉덩이가 가벼운지.
그렇지만 경력직은 달랐다. 자기소개보다는 이력서와 경력기술서 작성이 동반되어야 했다. 자사 양식이 있는 곳은 손에 꼽았고, 대부분은 이력서를 첨부하면 쉽고 빠르게 지원할 수 있었다. 글짓기에 쓸데없는 시간을 소모하지 않아도 되어 안일하게만 생각했다. 실제로 내가 내 경력기술서를 객관적으로 바라보기 전까지는.
참고로, 경력기술서에 들어가야 할 내용은 다음과 같다.
주요 업무, 프로젝트, 성과, 핵심역량 등
그간 써왔던 업무 플래너를 쫙 펼쳐봤다. 그래, 뭔가 치열하게 나름 일은 해왔던 것 같다. 그런데 문제는, 내가 한 일만 있고 성과를 증명할만한 지표가 아무 데도 없다는 것이다. 플래너에 00원 절감, 00% 상승 등을 적어놨을까? 전혀. 그렇게 결과물을 만들기 위해 내가 오롯이 한 일들만 나열되어 있었다. 나의 성과는 무엇일까.. 이미 몇 년이 지나서 생각도 잘 안나거니와, 자리도 바뀌어 나의 과거 자료들은 다른 사람의 자리에서만 열람이 가능했다. 내가 한 걸 내가 했다고 주장을 못하는 꼴이 되어버렸다.
이렇다 보니 어디선가 봤던 말이 기억이 난다. 경력기술서는 1년마다 업데이트해놓으라고. 어떻게 될지 사람일은 아무도 모르는 법이다. 그때 그 말을 흘려들었으면 안 됐다. 다른 사람말에 일일이 맞다고 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어른들이 똑같은 말을 하는 데는 다 이유가 있나 보다.
그러니 나도 약간의 후회를 살짝 보태어 이 글을 읽을 누군가에게 얘기한다. 갓 입사한 신입사원부터 당장 이직에 생각이 없는 고인 물 연차까지, 경력기술서를 틈틈이 업데이트하라고. 세상 일은 어떻게 될지 모른다. 그리고 사람의 기억력은 이토록 나약하다. 나의 기억력을 믿지 말고, 지금 내가 생생하게 쓰고 있는 경력기술서를 믿자.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게 자기소개서라면, 유에서 유를 창조하는 데도 시간이 꽤나 드는 게 경력기술서다. 글은 쓰면 마음에라도 들지, 경력기술서는 글쎄- 내가 했던 일을 복기해서 작성하는데도 폼이 꽤나 든다. 원래 간략하게 보이는 게 제일 어렵다.
대퇴사의 시대, 대이직의 시대, 평생직장이 사라진 시대 - 이 세상에 안정이란 존재하지 않는 걸까? 오늘도 잠시 투정 부리고, 다시 쓰러간다. 자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