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대, 아직도 따뜻한가
그와 처음으로 동거를 시작한 곳은 호주 멜번이였다. 멜번은 젊고 낭만적인 도시였고, 우리는 그곳에서 청소 일을 시작했다. 헬스장을 쓸고 닦았고, 경기가 있고 난 후면 스타디움에 나가 쓰레기를 주웠다. 더러운 것을
만지는 일이였지만, 그와 함께 할 수 있는 일이라서 좋았다. 젊고 낭만적인 멜번같은 것에는 눈길이 가지 않았다. 이미 내게 김영학은 공간이 되어버렸고 나는 그 속에서만 행복하거나 슬프거나 외로웠다. '한 번도 상처받지 않은 것처럼' 사랑하고 싶었지만, 한 번도 사랑해본 적 없다는 듯이 서툴렀다.
캠핑카를 타고 뉴질랜드 남섬을 한 바퀴 돌 때에도, 호주 퍼스(Perth)에서 두번째 워홀 생활을 시작할 때도 그와 함께였다. 여기서 시간이 멈췄으면 좋겠다, 싶은 순간들에 내 옆에는 그가 있었다.
퍼스(Perth)에서 각자의 일을 찾았다. 그의 일이 밤 12시를 넘어 끝나면 새벽 한 두시에 집에 돌아오는 날들이 허다했다. 그의 몸에서 나는 땀냄새와 음식냄새와 담배냄새의 조합이란 것이 얼마나 고약했던지를 기억한다. 그래도 나는 영학이가 자꾸 기다려져 11시 반쯤부터는 바깥문 소리에 귀를 쫑긋 세우거나 집주인이 현관 불을 끌 때마다 다시 불을 켜놓으면서 영학이를 기다렸다. 냄새 따위야. 방문을 열고 들어오는 그의 얼굴만 봐도 기분이 좋아졌다. 그가 얼른 씻고 와서 나를 안아주면 한 뼘 더 기분이 좋아졌다. 그런 밤날마다 나는 그를 꼭 안고 잠들었다.
미운 날엔 다신 보고 싶지 않을만큼 그가 미웠다. 그가 날 사랑하는 것보다 내가 그를 사랑하는 마음이 더 크다는 불공평함을 견딜 수가 없을 때마다 그를 괴롭혔다. 하지 말았어야 했을 뾰족한 말들을 끄집어내어 보이지 않는 그의 마음을 향해 다트던지듯 사정없이 내던졌다. 습관처럼 헤어지자, 말했다. 언젠가는 헤어질 남자라며 스스로 달랬다.
사랑에 빠지는 것은 쉬웠다. 그러나 사람을 신뢰하는 일은 달리기 경주에 엿을 먹이고 싶은 거북이가 매번 뒷것음질 치다가 드물게 한발짝 앞으로 가주는 속도의, 결승선에 가닿는 일이 영원히 불가능할 것만 같은 과제였다.
우리는 돈을 벌면 여행을 떠나자고 서로에게 다짐했다. 그와 나는 호주에서 번 돈을 들고 안나푸르나를 올랐고 따오섬의 수심 30m를 유영했다.
그와 함께본 것들이 참 많다. 야간 스쿠버 다이빙을 하던 중에 스패니쉬 댄서라는 수중 생물을 본 적 있다. 춤추는 댄서의 치마자락처럼 너풀너풀 빨간 춤을 추는 바닷 속 생물. 나는 스패니쉬 댄서의 빨간 춤을 보면서 산소통의 공기를 가장 많이 썼다. 어두컴컴한 바다 속에서 붉은, 얇고 길쭉한 것이 팔다리도 없이 열심히 춤을 추는데, 외계인을 본 듯 흥분됐다. 돌집을 지어 사는 니모 가족을 볼 때도, 노란 얼굴이 곧 터질 듯한 복어를 볼 때도 신기해서 기뻤다. 내가 사는 땅 위의 세상만이 다가 아니였다. 바닷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무수하고 다양한 생물들을 목격하면 이런 마음이 든다. 헤엄이나 치며 살아야지. 이렇게 세상이 아름다운데.
혼자서 헤엄치는 건 재미는 덜하고 힘만 더 들어서 가만히 생각하길, 얘랑 같이 헤엄치며 세상 구경하다 죽으면 어떨까. 얘 마음에는 어떤 그림들이 왔다가는 중일까.
그와 함께한 모든 순간들이 좋지는 않았다. 좋은 순간들이 많았다. 그와 함께 보고 느끼고 감동하고 이야기 나눴던 시간들을 떠올릴 때, 가장 따뜻하다. 바랄 게 더 없고 이대로도 괜찮지 않나 싶다."
그를 만나 우리가 같이 산지 2년쯤 됐을 때, 위의 글을 쓰면서 브런치를 열었다. 아직도 좋은 순간들이 나쁜 순간들보다 훨씬 많고 더 바랄 게 없을만큼 행복하냐고 누가 물어봐줬으면 좋겠다. 대답은 완전 NO!
그러나 삶은 NO처럼 깔끔하고 단정할 수 없어서 나는 울고 웃으면 그와 동거 중이다. 앞으로 이어지는 이야기들은 지극히 개인적인, 그리하여 하나의 작은 이야기로 남겨두고 싶은 기록들이다. 부끄러움을, 나의 부끄러움 뿐만 아니라 그의 부끄러움도 함께 드러내는 일이 좋은 일인지는 모르겠다. 누군가 우리의 이야기를 읽고 ㅋㅋ하고 비웃어준다면 그것으로 족하다. 그래도 내 옆에서 같이 그 비웃음을 사줄 한 사람이 있음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