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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SH May 06. 2022

일어날 일은 일어날까? - 영화 <라이프 오브 파이>

#PSH독서브런치172

사진 = 네이버 영화 <라이프 오브 파이> 스틸컷


※ 영화 <라이프 오브 파이(2012)>의 내용을 다수 포함하고 있으니 읽기 전 참고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1. 엘리어트 파동 이론으로 개별 주식의 주가, 코스피 지수 등을 분석하고 예측하는 유튜브 영상을 보다 보면 "어떤 이유를 대서든 20월봉선을 터치하거나 전 고점 부근까지 조정 받을 것이다"는 말을 들을 때가 있습니다. 빅데이터 전문가 송길영 바이브컴퍼니 부사장은 <여기에 당신의 욕망이 보인다>에서 "지금 사람들이 선택하는 바를 알면 미래를 알 수 있다. ... 이것이 트렌드 예측이요, 데이터마이닝의 가치다"라고 했습니다. 이런 생각을 바탕으로 한국고등교육재단에서 '일어날 일은, 일어난다'는 제목으로 강연을 하기도 했죠. 경험적으로 과거의 사건을 돌이켜 보더라도 '일어날 일은 일어나게 되어 있다'는 생각이 종종 들 때가 있습니다.


2. '일어날 일은 일어난다'는 말은 이성적인 측면에서는 매우 한정적인 상황에서만 의미를 가지는 말입니다. 예컨대 '코스피 지수가 전 고점 부근까지 조정 받을 것이 확실하므로 공매도를 해야겠다'는 확신을 실제 행동으로 옮기고 이를 수익으로 연결시킬 경우 '일어날 일은 일어난다'는 말은 의미가 있는 말일 거예요. 또 빅데이터 분석을 활용해 사업 아이템을 발굴하고 대박을 치는 경우도 해당될 것이고요. 혹은 '빅데이터 분석으로 미래를 예측할 수 있다'는 메시지를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해 강의 제목을 위와 같은 말로 짓는 경우도 마케팅적 측면에서 의미가 있을 겁니다. 하지만 그 외의 경우는 별 다른 의미가 없는 말이라 생각해요. 허태균 교수가 <가끔은 제정신>에서 "우리가 어떤 일이 일어나기도 전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를 확신할 수 있는 경우는 거의 없다. 다만 일이 일어난 후에 이미 알았던 것처럼 착각하긴 쉽다. ... 이처럼 ‘사후예견 편향’이 일어나는 이유는 마치 자신이 모두 예상하고 있었으면 하는 마음 때문이기도 하지만, 근본적으로 어떤 사건이 일어난 후에야 그 인과관계를 명확히 파악할 수 있기 때문이다"고 지적한 것처럼요. 이외의 경우 이 말은 주로 이미 일어난 사건을 감정적으로 받아들이기 위한 측면에서만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여요. 알랭 드 보통이 <무신론자를 위한 종교>에서 종교의 기능 중 하나로 "항상 작고 무작위적이고 사적인 순간으로만 남을 수 있는 일에 규모와 일관성과 사회적인 힘을 준다"고 했는데, '일어날 일은 일어난다'는 말은 이와 비슷한 기능을 하는 말이라 생각합니다.


1+2. 영화 <라이프 오브 파이>에서 주인공 파이는 가족과 함께 캐나다로 이민을 가기 위해 배에 오르지만 폭풍우를 만나 가족과 모든 재산을 잃게 됩니다. 가까스로 구명보트에 오른 파이는 얼룩말, 오랑우탄, 하이에나, 호랑이(리처드 파커)와 함께 항해를 시작하죠. 굶주림에 시달린 하이에나는 얼룩말과 오랑우탄을 잡아먹고, 호랑이는 하이에나를 잡아먹습니다. 파이는 리처드 파커를 조련하며 생존을 위한 항해를 계속했고 그들은 결국 살아남았죠. 영화 결말 부분에서 동물들은 실제 동물이 아닌 사람들의 비유였고, 리처드 파커는 식인을 한 파이 본인의 비유였다는 것이 드러납니다. 즉, 살인과 식인이 벌어졌던 구명보트에서의 일은 매우 받아들이기 힘든 것이었기 때문에 생존자 파이는 이를 감정적 측면에서 받아들이기 위해 동물 이야기를 지어낸 것이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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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용태 작가는 <영화 읽어주는 인문학>에서 "만약 파이가 철저하게 이성만을 중시한 채 바다를 표류하였다면 호랑이라는 존재는 없었을 것이며, 홀로 바다를 외롭게 떠돌아다니다 죽었을 가능성이 상당히 높아진다. 반대로 파이가 신비적 체험만을 중시한 채 이성을 배제하였다면 식인섬에서 진작 잡아먹혀 죽었을 것이다. ... 파이는 이 둘의 조화를 이루어낸다"고 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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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프 오브 파이는 종교적 믿음에 관한 이야기이지만, '일어날 일은 일어난다'는 말을 우리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에 대한 힌트를 주고 있다 생각해요. 즉, 이성적 측면에서 커다란 의미가 없는 말일 수 있는 이 말이 감정적 측면에서는 큰 의미가 있을 수 있음을 이해하는 것과 동시에 특별한 상황에서는 큰 수익으로 이어질 수 있는, 어쩌면 '이성의 끝판왕'과 같은 말이 될 수 있음을 이해하는 태도를 가져야 한다고 말하고 있는 게 아닐까 싶거든요. 아주 어렵지만 우리가 지향해야 하는 태도가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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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https://brunch.co.kr/@thepsh-brunch/84

https://brunch.co.kr/@thepsh-brunch/1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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