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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제의 피로와 미래

by THE RISING SUN

21세기의 주요 국가들은 서로 다른 체제를 운영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공통된 증상을 보이고 있다. 성장과 안정의 기반이 되었던 제도가 오히려 개혁을 가로막는 구조로 변모하는 역설을 마주하고 있다. 즉, 한때 성공적이었던 시스템이 이제는 자체의 경직성과 관성으로 인해 변화에 저항하는 틀이 된 것이다. 그것은 바로 시스템의 피로(systemic fatigue)다. 어느 체제든 일정한 시간 동안 반복되면, 효율이 떨어지고, 관성이 생기며, 스스로를 변화시키기 어려운 구조로 굳어진다. 자유주의 민주주의든, 사회주의 공화정이든, 권위주의든 간에 모두가 ‘작동은 하지만 나아가지 않는’ 상태에 빠질 수 있다. 오늘날 세계는 바로 그 상태에 근접하고 있다.


먼저, 정치 시스템의 피로가 눈에 띈다. 민주주의 체제에서는 반복되는 정권 교체와 단기적 성과 중심 정치 구조가 장기적 개혁을 어렵게 만든다. 선거 주기에 따라 변동하는 정책, 정당 간 극단적 대립, 국민 여론에 대한 민감한 반응은 전문성과 지속성을 요하는 구조 개혁에 대한 저항으로 이어진다. 반면 권위주의 국가에서는 체제의 안정성과 연속성은 보장되지만, 비판의 부재와 권력 집중으로 인해 정책 실패가 누적되고 방향 전환이 매우 더딘 구조적 경직성을 갖는다. 양 체제 모두에서 합리적 전환을 위한 정치적 설계가 부족하다.


경제 시스템 역시 마찬가지다. 세계화와 시장 중심 구조는 초기에는 효율성과 확장성을 제공했지만, 지금은 자본 집중, 기술 독점, 양극화 심화로 이어지며 사회적 갈등을 촉발하고 있다. 특히 대규모 다국적 기업은 국가 정책보다 앞서 움직이며, 조세 회피, 고용 유연화, 정치 로비 등을 통해 경제 질서의 왜곡을 고착화시키고 있다. 규제 강화와 산업 재편, 디지털 전환, 녹색 경제로의 이행은 모두 필요한 과제이지만, 기존 이해관계 구조와 기득권 연합의 저항 속에 속도 조절에 부딪히고 있다.


행정 시스템도 점점 더 비효율성과 관료주의적 병목에 시달리고 있다. 정보와 기술은 급변하지만, 행정의 절차와 법제는 그것을 따라가지 못한다. 디지털 행정, 민관 협력, 공공 서비스의 혁신 등은 모두 국가 운영의 효율성을 높이기 위한 개혁이지만, 실제로는 기존 조직의 저항과 변화 회피 심리로 인해 대부분 부분 개편에 머무는 경우가 많다. 이로 인해 시민의 행정에 대한 신뢰는 약화되고, 공공 부문의 역할에 대한 회의가 확산된다.


더 근본적인 문제는 사회적 합의 시스템의 피로다. 이념, 세대, 지역, 계층 간의 균열이 심화되면서, 개혁을 위한 국민적 공감대 형성이 매우 어려워지고 있다. 사회 구성원 간의 신뢰 부족은 협치를 가로막고, 정책의 정당성과 지속가능성을 떨어뜨린다. 특히 포퓰리즘과 극단주의가 득세하는 사회에서는 합리적 논의가 감정적 동원에 밀려 구조적 개혁이 더욱 지연된다.


문제는 이 모든 현상이 이미 ‘알려진 병’임에도 불구하고, 치료가 어렵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개혁을 위한 결정은 결국 기존 시스템 내부의 기득권에 의해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집권 세력은 개혁을 약속하지만, 실제로는 개혁의 타깃이 되는 제도 위에 올라서 있거나, 그 시스템의 수혜자이기 때문에 변화의 동력이 약하다. 따라서 시스템은 오래 지속될수록 더 강한 정당성이 필요한데, 역설적으로 시간이 흐를수록 그 정당성은 약화되는 경향을 보인다. 그리고 이러한 정체는 결국 국가의 역동성을 떨어뜨리고, 국제 질서 재편기에 주도권을 잃게 만드는 원인이 된다.


또한, 전 지구적 문제, 기후위기, 인공지능, 금융 불안정성, 팬데믹 등은 과거보다 훨씬 더 복잡하고 다차원적이기 때문에, 기존의 정책도구나 행정 조직만으로는 대응이 불가능한 상황이 많아졌다. 새로운 제도 설계와 융합적 거버넌스, 민간과 정부의 협업, 시민의 직접 참여 등이 요구되지만, 이를 제도화하는 과정은 느리고 복잡하며 종종 실패로 끝난다.


이러한 정체와 피로의 순환을 끊기 위해 필요한 것은 단순한 제도 개혁이 아니다. 그것은 국가를 다시 설계할 수 있는 능력이며, 변화의 필요를 인식하는 지적 용기, 그리고 기존의 질서를 넘어설 수 있는 정치적 상상력이다. 어느 체제든 완전하지 않다. 하지만 완전하지 않음을 인정하고 갱신할 수 있다면, 그 체제는 다시 강해질 수 있다. 문제는 피로가 아니라, 그 피로를 직시하지 않는 태도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새로운 체제가 아니라, 멈춘 체제를 다시 움직이게 할 새로운 동력이다.


체제는 스스로를 정당화하고 방어하는 데 익숙하다. 하지만 지금 세계가 마주한 문제는, 어느 체제가 옳으냐가 아니라, 어느 체제가 변화할 수 있느냐다. 자유주의 민주정은 이상에 갇혀 있고, 사회주의 공화정은 현실에 묶여 있다. 그러나 양쪽 모두, 정체된 시스템을 흔들 수 있는 설계의 힘을 가질 수 있다면 다시 전진할 수 있다. 그 상상력과 의지를 준비한 국가만이 다음 시대의 주도권을 쥐게 될 것이다. 이제 필요한 것은 이념이 아니라, 살아 움직일 수 있는 체제,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시스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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