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을 멈추고 커튼을 걷고 조명을 켜라
미국은 적자를 감내한다. 그것도 그냥 적자가 아니다. 수십 년간의 막대한 무역적자다. 그러면서도 망하지 않고 세계 최강국의 지위를 유지하고 있다.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나라가, 가장 많은 빚을 지고, 가장 많은 수입을 한다. 아이러니다. 하지만 이는 우연도, 단순한 실패도 아니다. 스스로 짠 판이고 구조적인 특권이다.
그 이유는 하나. 미국이 기축통화국이기 때문이다. 전 세계는 달러로 무역하고, 달러를 외환보유로 갖고, 달러로 국제 결제를 한다. 이 말은 결국, 전 세계가 달러를 쓸 수밖에 없는 구조이기 때문에, 미국은 달러를 계속 외부에 공급해야 한다는 뜻이다. 어떻게? 수입을 통해. 미국은 외국 상품을 사들이고, 그 대가로 달러를 내보낸다. 미국의 무역적자는 달러 패권을 유지하기 위해 자발적으로 부담하는 불가피한 비용이다.
게다가 미국은 세계 최대의 소비시장이다. 좋은 물건, 멋진 브랜드, 최신 기술은 늘 미국을 향한다. 수입이 늘어나는 건 어쩌면 당연하다. 또한 미국은 세계 최대의 투자시장이다. 세계는 미국에 제품을 팔아 달러를 벌어들이지만, 그 달러를 다시 미국의 국채, 기업 투자, 금융 자산 등으로 돌려보낸다. 달러는 영구적으로 미국을 떠나지 않는다. 잠시 외출했다가 다시 돌아오는 순환 구조 속에 있다
더구나 달러 패권은 단지 신용만의 문제가 아니다. 미국은 자국 통화로 국제 거래를 유도하며, 타국이 거래할 때도 달러를 거쳐가게 만든다. 원유는 달러로만 사고팔 수 있다. 국제 제재도 달러 결제망을 이용해 발동된다. 전 세계가 달러를 쓰기 위해 미국의 국채를 사들이고, 미국은 금리가 낮아도 돈을 끌어올 수 있다. 달러가 기축통화라는 이유 하나로, 미국은 수십 년간 국력 이상의 소비를 했다. 적자였지만 그로 인한 이익은 상상 이상이다. 세계를 지배하고 있다.
그런데 이 구조, 어딘가 낯익다. 19세기 대영제국도 만성적 적자를 안고 있었다. 영국은 산업혁명으로 세계를 제패했고, 해군력으로 바다를 통제했으며, 파운드로 무역을 장악했다. 하지만 대륙으로부터의 수입은 많았고, 식민지 유지 비용은 천문학적이었다. 결국 19세기 중반, 영국은 아시아 특히 중국과의 무역에서 적자를 보기 시작한다. 중국은 차, 도자기, 비단을 팔면서도, 영국 제품을 사지 않았다.
이때 영국이 선택한 방법이 아편이었다. 인도에서 재배한 아편을 중국에 팔고, 그 수익으로 중국 제품을 사들이는 구조. 무역수지를 강제로 역전시킨 방식이었다. 하지만 청나라는 아편을 금지했고, 영국은 무력을 동원했다. 1840년, 아편전쟁. 그 결과는 난징조약, 개항, 홍콩 할양, 그리고 망국의 시작이었다. 무역적자를 견디지 못한 제국이 선택한 폭력적 흑자 회복 전략. 그것이 아편전쟁이었다.
그리고 지금, 미국은 무역적자를 이유로 관세전쟁을 선포했다. 특히 중국을 집중적으로 공격하고 있다. 미국을 병들게 하고 있는 마약 펜타닐의 원료가 중국산이라는 점, 대중 무역적자가 막대하다는 점 등이 그 이유다. 하지만 무역적자도 중국에 대한 공격의 근거도 모두 표면상의 명분일뿐, 진짜 속내는 자국 패권의 공고화를 위한 정치적 셈법이다. 불법 아편과 합법 통화, 펜타닐과 무역흑자, 무역전쟁과 아편전쟁, 그 구조는 다르지만, 기시감은 선명하다.
1944년, 브레튼우즈 체제. 전후 세계를 재설계한 미국은 달러를 금에 고정하고, 세계 통화의 기준으로 삼는다. 그리고 1971년, 닉슨 쇼크. 달러와 금의 고리를 끊고, 신뢰만으로 작동하는 ‘종이 패권’을 수립한다. 이때부터 미국은 적자를 내면서도, 패권을 유지할 수 있는 세계 유일의 국가가 된다. FRB는 달러를 찍어내고, 세계는 그 달러를 가지고 다시 미국을 향한다.
하지만 이 구조는 결코 무한하지 않다. 대영제국은 식민지를 무역의 기반으로 삼았지만, 결국 쇠퇴했다. 기술을 따라잡은 독일과 미국이 산업경쟁력에서 앞서자, 영국의 해양패권은 무너지고, 금융 중심지도 런던에서 뉴욕으로 이동했다. 미국 역시 지금, 산업 공백, 과소비 구조, 정치 양극화, 기축통화에 대한 대안 추구(위안화, 유로화, CBDC) 등의 위기에 직면해 있다. 단지 달러를 찍어낸다고 해서 세계가 계속 받아주지는 않을 것이다.
대영제국은 강압적 무역 전략이 아니라 산업 경쟁력을 회복했어야 했다. 금본위제에 집착하기보다 통화 유연성을 확보하고, 식민지의 비용보다 공동체적 무역질서를 먼저 고민했어야 했다. 미국은 같은 실수를 반복해서는 안 된다. 달러 패권은 아직 유효하지만, 산업 기반을 되살리고, 공급망을 재편하며, 동맹과 협력을 통해 무역 질서를 조율할 수 있는 전략적 조정자가 되어야 한다. 적자는 손해가 아니라 큰 이권에 대한 사소한 비용에 불과했지만, 그 구조가 영원하지 않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달러를 찍는 힘보다, 세계가 그 달러를 믿게 만드는 힘이 더 중요하다. 제국은 흥망보다 설계가 중요하다. 그리고 미국은 이제 그 설계도를 다시 그려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