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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란 무엇인가

정의를 정의하라

by THE RISING SUN

정의가 무엇인지 가르쳐 줄 것 같은 이 책은 우리에게 정의가 무엇인지 가르쳐 주지 않는다. 엄밀히 말하면 누구나 동의할 수 있는 보편적 정의를 가르쳐 주지 않는다. 이 책은 여러 가지 정의들을 설명해 준다. 즉 인류가 특정 행위의 규범이며 판단의 기준인 그것을 찾기 위해 고민하는 과정 가운데 발생한 수많은 관점에 따라 각각의 경우에 있어 정의가 무엇인지를 설명해 주는 것이다. 책을 읽어가다 보면 느끼겠지만 정의란 그 사람 자신 또는 처한 상황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종교인과 정치인의 정의가 다르고, 시어머니와 며느리의 정의가 다르고, 사장과 종업원의 정의가 다르지 않을까 생각해 보았다.


이 책을 읽으면서 문득 떠오르는 장면은 중고교 시설 윤리수업 시간이다. 범인들의 일상 속에서 행위 규범과 판단 기준은 각양각색이겠으나 학자들은 그 가운데 공통점들을 찾아 철학이라는 이름으로 묶어냈다. 이 책은 벤담, 칸트, 롤스, 아리스토텔레스 등 많은 철학자들의 이론을 소개하고 그 안에서 정의란 무엇인가를 보여준다.


여러 가지 정의를 설명해 준다는 말은 뒤집어 이야기하면 결국 정의란 무엇인지 가르쳐 주지 않는다는 말이다. 정의(正義)의 사전적 의미는 진리에 맞는 올바른 도리, 바른 의의(意義)이다. 그렇다면 정의란 절대적인 가치이며 적어도 특정 상황에 대해서는 단일한 기준일 것인데 여러 가지가 있다는 것은 이미 정의의 존재를 부인하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이 책에 대한 소개 기사, 홍보 문구 등을 보며 과연 세계적 석학이라는 저자가 이야기하는 정의란 무엇일까에 대한 호기심이 책을 집어 들게 했음을 고백한다. 그러나 앞서 밝혔듯이 저자는 명확하게 자신이 생각하는 정의를 이야기하지 않는다. 다만, 책의 말미에 저자의 주관적 호의가 어떤 이론에 있는지는 희미하게 언급할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가면서 어떤 종류든 판단을 내려야 하는 상황에 직면하는 이라면 일독을 권할만한 책이다. 특별히 자기 자신의 이해관계를 넘어 자신이 속한 집단 또는 사회 전반에 영향을 미치는 사안에 대해 판단을 내려야 하는 위치에 있는 이라면 반드시 일독을 권하고 싶다.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다양한 종류의 정의들을 정리해 보면, 어떤 이는 정의란 공리나 행복의 극대화, 즉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을 추구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어떤 이는 정의란 선택의 자유를 존중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 선택은 자유시장에서 사람들이 실제로 행하는 선택일 수도 있고(자유지상주의의 견해), 원초적으로 평등한 위치에서 ‘행할 법한’ 가언적 선택일 수도 있다(자유주의적 평등주의의 견해). 마지막으로 어떤 이는 정의란 미덕을 키우고 공동선을 고민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 책의 저자는 세 번째 방식에 공감을 표하면서(공감을 표한다는 표현은 확실한 답을 제시하지 않는다는 의미) 정의로운 사회에서 좋은 삶을 다 같이 고민하는데 도움이 될 만한 제안을 한다. 그것은 종교적 미덕과 공동선을 성이나 낙태 등의 영역에 한정 짓지 않고 보다 폭넓은 경제와 시민의 관심사의 영역까지 확장하는 것이다. 저자는 이 방면에서 주목할 만한 인물로 로버트 케네디를 언급하며, “물질적 빈곤을 없애려고 아무리 노력한들, 더 어려운 일은 따로 있습니다. 우리 모두를 괴롭히는 만족의 결핍에 맞서는 일입니다.”라는 그의 주장을 증거로 들었다.


대통령 후보 토론회에서 국민을 부자로 만들어 주겠다는 후보와 국민을 행복하게 만들어 주겠다는 후보가 있다면 나 역시 후자를 선택할 것이다. 그러나 숭고한 가치를 이루기 위해서는 그 아래 단계에 있는 가치들이 어느 정도 담보되어야 한다. 또한 이것이 정신적 가치를 최우선으로 추구하는 종교집단의 리더가 외치는 설교가 아니라 당장 하루 식사와 잠자리를 걱정해야 하는 생활인들이 포함된 국민과 그 나라를 이끌겠다는 정치 지도자의 웅변이라면 더더욱 그러할 것이다.


그래서 저자는 구체적인 실천방안을 다시 언급한다. 첫 번째 단계로 시민의식과 희생, 봉사를 들었다. 정의로운 사회에서 강한 공동체 의식이 필요하다면, 사회는 시민들이 사회 전체를 걱정하고 공동선에 헌신하는 태도를 키워야 한다는 것이다. 다음은 시장의 도덕적 한계를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불평등에 대한 관심과 해소를 위한 노력, 이를 위한 연대와 시민의 미덕이 필요하다. 마지막으로 도덕에 개입하는 정치(도덕을 개입시키는 정치라는 의미로 해석)를 언급했다.


결국 저자는 미덕을 키우고 공동선을 고민하는 것이 자신이 생각하는 정의라고 말했지만 현실 정치에서 그 정의의 부족한 점을 보완하기 위해서는 공리주의, 자유주의가 말하는 정의의 요소들이 포함되어야 함을 암시하고 있다.


정의란 무엇인가에 대해 내가 언급하고 싶은 것이 있다. 그것은 자신의 이익을 남을 위해 포기하는 것, 즉 희생이다. 이 또한 큰 범주에서 보면 미덕을 키우고 공동선을 고민하는 것에 포함되겠지만, 어쩌면 그보다 더 차원이 높은 정의이다. 자신의 이익을 구하지 않는 것만으로도 정의라 일컬어질 만한 시대에 남을 위해 자신의 이익을 포기하고 내어놓는 것은 정의의 완성이 아닐까 생각해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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