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주의 수호를 위해 반드시 부활해야 할
민주주의를 살아 숨 쉬게 하는 심장은 여러 개가 있겠지만 가장 크고 중요한 것은 다수결이다. 우리는 한 사람이 어떻게 다수결을 형해화해서 민주주의의 파괴를 도모하는지, 또한 다수결이 어떻게 그 시도를 무력화해서 분쇄하는지 목도하였다. 다수결은 민주주의 그 자체다. 다수결은 견제와 균형의 원리에 입각한 합의제다.
국가는 민주주의 정신을 구현하기 위해 행정부 내에 합의제기구들을 설치한다. 우리나라에는 선거와 국민투표, 정당에 대한 사무를 담당하는 중앙선거관리위원회, 공공부문의 결산·회계검사와 직무감찰을 담당하는 감사원(감사위원회의), 방송과 통신에 관한 정책과 규제를 담당하는 방송통신위원회, 인권의 보호와 향상을 담당하는 국가인권위원회, 국민 권리와 이익의 보호·증진을 담당하는 국민권익위원회가 있고, 기타 공정거래위원회, 금융위원회, 개인정보보호위원회, 원자력안전위원회 등이 있다.
합의제(合議制)는 의사결정구조의 측면에서 독임제(獨任制)와 구별된다. 우리나라에서 독임제의 일반적 형태는 부(部)·처(處)·청(廳)으로, 장관(長官)·처장(處長)·청장(廳長)이 기관장으로 임명된다. 독임제는 말 그대로 의사결정을 기관장 혼자서 한다는 뜻으로, 책임의 소재를 분명히 하고 사무의 통일성, 신속성, 융통성, 비밀성 등을 확보하는 장점을 갖는다. 독임제 기관의 장들은 임명권자인 대통령과 뜻을 같이 하고, 그 명령에 따라야 한다. 그래서 독임제 기관들이 추진하는 정책은 대통령이 추구하는, 또한 대통령이 속한 여당이 지향하는 색깔을 선명하게 띤다. 그들은 공공연하게 독립적이지 않고 중립적이지도 않지만 국민들은 그걸 비난하지 않는다. 국민들이 그 대통령을 선택했기 때문이다. 그 선택 안에는 국가 원수이자 행정부 수반인 대통령에게 합법적으로 주어진 지위와 권한의 행사에 대한 승인도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합의제는 상황이 다르다. 합의제는 위원회로, 의사결정을 기관장이 혼자 하지 않고, 위원들이 다수결로 한다. 장점은 민주성, 다양성, 신중성, 전문성 등이다. 따라서 합의제는 정파를 떠나 일관된 원칙과 기준이 적용되어야 하고 민주적 정당성이 확보되어야 하는 분야에 도입된다. 선거와 국민투표, 결산·회계검사와 직무감찰, 방송·통신 정책과 규제, 인권의 보호와 향상, 국민권익의 보호·증진 업무가 해당된다. 이러한 업무들은 정치적 색깔을 띠어서는 안 된다. 정권과 무관하게, 모두에게 동일한 잣대로, 항상 일관성을 유지해야 한다. 이를 위해 무엇보다 정치적 중립과 직무상 독립이 중요하다.
그런데 모든 합의제기구들의 정치적 중립과 직무상 독립이 철저히 무너졌다. 아니 무너지기만 했다면 차라리 나았을 것이다. 유린당했다. 위원회라는 위장막을 치고, 특정 세력의 주장이나 이익에 부합하는 의사결정을 내렸다. 그리고 위원회에서 다수결로, 합의로 결정했으니 공정하다고 국민을 기만하고, 반대 정파에 항변했다. 그러나 위장막 뒤에서 그들은, 동의하지 않는 위원을 회유하고 협박했으며, 그걸로 안 되면 아예 배제했다.
공공부문에 대한 결산·회계검사와 직무감찰, 방송·통신 정책과 규제, 인권의 보호와 향상, 국민권익의 보호·증진 등의 업무에 정치가 개입할 이유가 무엇인가. 이들은 하나같이 특정 정파를 떠나 일관되게 그리고 공정하게 추진되어야 할 지극히 근본적이고 원칙적인 업무들이다. 그런데 의사결정에 개입하기 위해 위원장과 위원들에 대한 인사권을 휘둘렀고 그것으로 안 되면 뒷조사를 하고 수사의뢰를 했다.
뿐만 아니다. 합의제기구들에게 뒷조사와 수사의뢰의 용역을 맡겼다. 국민은, 그리고 국가는 권력이 자칫 미끄러져 민주주의를 훼손하는 일이 없도록, 위원회라는 견제와 균형의 방어기제를 곳곳에 배치했던 것인데, 그걸 무장해제해서 오히려 독재의 선봉에 세워버린 것이다. 그리고 그것으로도 안 되자, 결국 군대를 보냈다. 45년 만이다.
합의제를 복구해야 한다. 형해화되거나 무장해제되지 않도록, 그래서 다시는 유린당하는 일이 없도록 재설계해야 한다. 그것만이 온전한 합의제의 부활일 것이다. 합의제는 다수의 위원으로 위원회를 구성하는데, 위원의 추천권은 여당과 야당, 입법부·사법부·행정부가 나눠 갖는다. 스태거링텀(Staggering term)을 적용해 위원의 임기가 차례로 만료되게 함으로써 다양성을 유지할 것이다. 또한 각계각층의 전문가들이 참여시켜 폐쇄적 관료제의 단점을 보완하고 행정의 전문성을 제고하게 할 것이다. 민주주의 정신 그 자체인 합의제기구들의 정치적 중립과 직무상 독립을 수호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