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패를 저지르고 갑질을 일삼다가 낙하산을 타고 내려가는
정부에는 각 분야별로 중앙행정기관이 있다. 그런데 산하에 투자나 출자 또는 재정지원을 통해 공공기관을 설립해 운영하고 있다. 최근 통계에 따르면 중앙행정기관 직원 수가 약 80만 명, 인건비가 약 60조 원인데, 별도의 조직을 또 만드는 이유는 뭘까. 정부는 이렇게 설명한다. 중앙행정기관은 정책을 담당하고 공공기관은 사업을 담당하는데, 국가 경제, 국민 생활에 반드시 필요한 공공성이 높은 분야지만 초기에 막대한 투자비가 들어가거나 구조적으로 수익이 날 수 없어 민간에 맡길 수 없는 사업들을 공공기관을 설립해 추진·관리한다.
전국에 고속철도를 건설하는 국가철도공단, 기업과 가정에 전기를 공급하는 한국전력공사, 국민들에게 의료서비스를 제공하는 국립중앙의료원 같은 곳들이 해당된다. 막대한 사업비가 들어가지만 수익을 담보할 수 없고, 적자가 날 수밖에 없는 구조지만 국가와 국민을 위해 누군가는 반드시 해야만 하는 사업이다. 민간기업이 사업성이 불투명한 분야에 투자할 리는 없기 때문에 정부가 공공기관을 설립할 수밖에 없다. 또한 중앙행정기관이 직접 철도를 깔고 전기를 공급하고 의료서비스를 제공할 수는 없으니 별도의 기관이 필요한 것이다.
여기 한 중앙행정기관이 있다. 산하기관으로 50개 공공기관을 거느리고 있다. 한국○○공사, 한국○○개발공사, 한국○○정보원, 한국○○정보진흥원, 한국○○관리공단, 한국○○기술원, 한국○○연구원, 한국○○교육원, 한국○○품질관리원, 한국○○재단, 한국○○진흥재단, 한국○○연구진흥재단 등이다. 기관명을 달리 하려고 부단히 노력한 흔적은 보이는데, 거의 비슷비슷하다. 굳이 조직도나 업무내용을 들여다보지 않아도 "그 사업이 이렇게 까지 쪼개서 여러 개의 공공기관을 만들 일인가" 하는 생각이 든다. 이런 공공기관 내지는 공직유관단체가 총 1,549개다.
앞서 ‘지방자치제도’에서 행정부와 입법부의 중앙권력이 지방 곳곳, 시군구까지 실핏줄처럼 뻗쳐있는 자신들의 영향력을 잃지 않기 위해 입만 열면 지방분권을 부르짖으면서도 실질적인 행동은 하지 않고 있음을 지적했는데, 공공기관도 중앙이 틀어쥔 권력이 공공성이라는 미명 아래 법과 제도를 내세워 감쪽같이 숨기고 있는 또 하나의 거대한 모럴 해저드다.
중앙행정기관에게 공공기관은 대기업의 계열사 같은 거다. 법적으로 엄연히 독립된 기관이지만 결코 독립할 수 없다. 그 이유는 첫째 중앙행정기관이 그 공공기관을 탄생시켰기 때문이다. 나를 낳아준 어머니 같은 존재다. 그러나 평생 나에게, 자의가 아닌 타의에 의한 가혹한 부양의 의무를 지우는 어머니다. 둘째 공공기관은 사업, 예산, 인사 등 전반에 대해 중앙행정기관의 관리와 감독을 받아야 한다. 며느리와 시어머니 관계 같은 느낌이다. 셋째 중앙행정기관 출신들이 고위간부로 포진하고 있다. 물리적으로도 강력하게 연결되어 있는 것이다.
중앙행정기관은 어떻게든 공공기관을 만들려고 한다. 대기업이 계열사를 만들 때는 자금이 투입되고, 그래서 사업성, 수익률을 따져야 한다. 그런데 중앙행정기관이 공공기관을 만들 때는 아무것도 따질 필요가 없다. 내 돈이 들어가지 않고, 수익이 나는 말든 나와는 무관하기 때문이다. 오직 필요한 것은 명분, 그리고 그 명분을 그럴듯하게 만들어줄 논리다. 명분은 공공성이다. ‘국가의 미래와 국민의 행복을 위해 반드시 필요하다.’ 그리고 논리는 온갖 통계와 급조한 수요조사 결과 같은 것들이다. 빠뜨린 게 하나 있다. 공공기관 설립의 마지막 대미를 장식하는 결정적 조건은 역시 정치다. 대통령실이, 국회가 승인을 해줘야만 한다. 그들의 반응이 긍정적이면 허술한 명분과 논리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고 부정적이면, 아무리 완벽한 명분과 논리도 국가 미래와 국민 행복을 위한 실질적 필요성도 모두 무용지물이다
그렇게 설립된 공공기관은 딴 주머니다. 과거에는 사적 영역에서 은밀하게 이뤄졌다. 인사 청탁 뒷돈, 명절 떡값, 휴가비 등이 연중 오고 갔다. 하지만 최근에는 대부분 근절됐고 아직 남아있는 게 회식비 대납 같은 거다. 자신의 목줄을 쥐고 있는 담당자가 언제 어디서 회식이 있을 예정임을 미리 귀띔한다. 그러면 공공기관에서는 법인카드로 마치 자신들이 회식한 것처럼 선결제를 해둔다. 아니면 회식날 가서 결제를 하기도 한다. 그날은 최고급 한우 먹는 날이다. 그 외에도 돈을 써야 하는데 집행 목적과 금액을 공개해야 하는 예산을 사용할 수 없을 때 수시로 동원된다.
또한 공공기관은 하청업체다. 원청과 하청은 계약을 맺고, 원청은 일을 시키며 하청은 맡은 일을 하고 공사비를 받는다. 공공기관은 중앙행정기관이 시키는 온갖 잡다한 일들을 처리해야 한다. 자료를 만들어 갖다 주고 물건을 배달하며 행사를 준비한다. 그런데 계약을 맺은 바 없고 일이 끝나고 대가를 지급받지도 않는다. 하지만 시키면 뭐든지 다 해야 한다. 앞서 밝혔듯이 관리·감독을 받기 때문이고, 인사권으로 목줄이 잡혀 있기 때문이다.
공공기관은 중앙행정기관 퇴직자들에게 좋은 일자리를 제공한다. 더없이 좋은 명분이 있다. “오랜 기간 관련 정책을 입안하고 추진하면서 전문성을 갖췄고 조직을 운영하고 관리했던 경험을 갖고 있다.” 낙하산 인사라는 언론의 비판과 노조의 반발을 뭉개는 단골 명분이다.
드러나지 않는 유용한 비자금 저수지고, 귀찮은 일들을 처리해 주는 용역사이며, 심지어 퇴직 후 좋은 일자리를 제공해주기까지 하는데, 중앙행정기관은 공공기관을 만들지 않을 이유가 없고, 아니 어떻게든 만들려고 발버둥을 친다. 자신들의 일거수일투족을 관리·감독하고 인사권과 예산을 쥐고 있으며, 언제든 거기서 상관이 내려올 수 있는데, 공공기관은 중앙행정기관에게 끌려 다니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아니 바짝 엎드려야 한다. 그렇게 만들어지고 끌려 다니는 공공기관 내지는 공직유관단체가 총 1,549개라는 얘기다.
물론 언제나 그렇듯이, 모든 공공기관이 필요하지 않다거나 모든 중앙행정기관이 산하 공공기관을 상대로 부패, 갑질, 낙하산 인사를 한다는 건 아니다. 꼭 필요한 공공기관이 있고, 오늘도 밤낮없이 국가와 국민을 위해 일하고 있는 공공기관 직원들이 있으며, 그런 공공기관이 제 역할을 다하도록 물심양면으로 지원하는 중앙행정기관이 분명히 있다. 하지만, 앞서 언급했던 문제들 역시 분명한 사실이고, 만연해있다. 그리고 거기에 소요되는 모든 비용은 세금을 내는 국민이 감당하고 있고, 그로 인해 야기되는 비효율, 불공정, 불합리의 대가도 결국은 국민이 치르게 될 것이다. 바꿔야 한다. 국가 경제와 국민 생활을 위해 꼭 필요한 분야에만 공공기관을 설립해 운영하고, 그들이 온전히 자신들의 역할에만 충실할 수 있게 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