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가 우리를 망쳐 놨지만 그래도 상관없다
History Has Failed Us, but No Matter
‘역사가 우리를 망쳐 놨지만 그래도 상관없다', ‘고향은 이름이자 강력한 말이다. 마법사가 외우는, 혹은 영혼이 응답하는 가장 강력한 주문보다 더 강력한 말이다.’
첫 문장부터 가슴에 와닿는다. 당연한 사실이지만, 삶의 터전은 안정감과 지속성을 보장하는 곳이어야 한다. 먹고살기 힘들었던 고향 영도, 피식민자 차별의 땅 일본. 일본에 체류하고 있는 天仁으로서, 소설 파친코와 찰스 디킨스의 고향에 대한 정의에서, 삶의 터전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되었다.
“왜 일본은 아직도 조선인 거주자들의 국적을 구분하려고 드는 거야? 자기 나라에서 4대째 살고 있는 조선인들을 말이야. 일본 정부는 아직도 전쟁 범죄를 인정하지 않고 있어!” 솔로몬과 결혼한 후 일본에서 살려고 했으나, 포기하고 미국으로 돌아가는 재미교포 연인 피비의 항변 속에 일본 정부의 비인도적 행위와 재일교포의 현주소가 잘 함축되어 있다. 모자수의 두 번째 부인인 일본인 아내 에스코 조차도 14살 아들 솔로몬이 외국인 등록증을 발급받기 위해서는 지문을 날인하고, 등록증을 목에 걸고 다녀야 함에 분개한다. 외국인등록증(지금은 ‘재류카드’라는 이름으로 바뀌었다)은 조선 출신의 재일한인들이 한반도의 남과 북은 물론이고 일본으로부터도 배제당해 어느 쪽 국민도 아닌, 난민으로 전락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신사 참배를 거부한다는 이유로 모진 고민을 받으며 옥살이를 하다가 죽음을 앞두고 집으로 돌아온 이삭이 곧 임종하는 장면에서는 일본 놈들의 악랄함에 치가 떨린다. 감옥에서 죽으면 치우기 곤란하니 돌려보냈다는 것이다. 죠센징(朝鮮人)이기를 거부하고, 명문 와세다 대학에 진학하면서 일본인으로 살아가던 선자의 첫째 아들 노아. 결국 파친코에서 일하게 되고, 극단적 선택을 하게 되는 장면 또한 충격이었다. 노아의 양아버지 이삭은 "너를 한 인간으로 인정해주지 않는 사람 들과 부대끼며 살아간다는 건 아주 용감한 일이야"라고 유언을 남겼지만, 조선인이 아니라 그냥 인간이 되고 싶었던 노아는 정체성과의 괴리로 삶을 마감하고 만 것이다. 나가노에서 숨어 지내면서도 가족도 모르게 이삭의 묘지에 매달 다녀갔다는 끝 대목은 더 가슴을 아프게 한다. 캘리포니아 대학에서 경제학을 전공한 수재 솔로몬이 영국계 일본 회사에서 부당하게 해고를 당하고, 한계를 절감하며 아버지 모자수가 경영하는 파친코로 돌아오게 되는 장면에서도 화가 치밀어 오른다.
츠루하시(鶴橋)의 옛 지명은 이카이노(猪飼野)
지금은 바뀌었지만, 오사카의 코리아 타운인 츠루하시(鶴橋)의 옛 지명이 이카이노(猪飼野)였다는데도 적잖이 놀랐다. '이카이노'에는 돼지를 키우는 마을이라는 본래의 뜻 이외에도 죠센징들이 판잣집에서 냄새나는 돼지와 함께 살아가는 마을이라는 비하의 의미도 들어있기 때문이다. 파친코가 가난과 범죄의 상징이라면, "돼지들과 조선인들만 살 수 있는 곳"인 이카이노는 피식민자에 대한 기득권의 횡포와 불평등의 표본이다.
한국계 미국 작가 이민진의 대하소설 '파친코'는 버락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이 페이스북에 ‘공유하고 싶은 책’으로 추천해 더 유명세를 탔다. 1930년대 부산 영도에서 오사카로 건너간 재일교포들의 삶이 4대에 걸쳐 펼쳐진다. 어디에도 속할 수 없는 이방인의 분노와 슬픔을 그려내며 2017년 뉴욕타임스 베스트셀러에 올랐고, 뉴욕타임스·BBC '올해의 책 10'에 선정되기도 했다. 작가인 이민진은 1968년 서울에서 태어나 7세에 가족과 함께 미국으로 이민을 갔다. 일본계 미국인인 남편을 따라 2007년부터 4년간 일본에 거주하면서 '파친코'를 완성했다. (조선일보, 인터넷)
일반적으로 ‘재일교포’는 ‘해방 이전에 일본으로 건너가서 정착한 한국인 및 그 후손들’을 뜻한다. 지금은 일본에 체류하는 기업의 주재원, 유학생 교포들도 많이 늘었는데, 이들은 ‘체류 한국인’이라 부른다. 일본에서는 재일교포를 자이니치 강코쿠진(在日韓国人) 또는, 자이니치 죠센진(在日朝鮮人)이라고 부른다. 1945년 해방 이후 일본에 살고 있던 교포들에게 일본은 ‘조선’이라는 국적을 부여했다. 1965년 한일 국교 정상화 이후에 비로소 ‘한국’이라는 국적이 생겨났다. ‘죠센징(조선인)’이라는 용어가 한국 사람을 비하한다는 뜻으로 반감을 갖게 되기도 하지만, 일본에 귀화하지 않은 재일교포 중에는 ‘조선인’으로 불리기를 원하는 이들도 있다. 조국이 분단된 국가가 아니길 바라면서 ‘조선’이라는 나라 이름에 한민족의 의미가 들어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재일교포들은 정당한 세금과 사회보험료를 내고 있지만 참정권이 없다. 나아지기는 했지만, 직업에도 제한이 많았다. 그래서, 일본인들이 꺼리는 직업인 파친코, 야키니쿠야(焼肉屋), 고물상 등의 개인사업을 할 수밖에 없었다. 연예인, 운동선수와 같은 혼자 할 수 있는 일에도 많이 종사하게 되었다. 天仁 주변의 재일교포들도 자신의, 가족의 이념에 따라 각기 다른 삶을 살아가고 있다. 정치적 이데올로기 문제로 일본으로 건너가 엘리트 사업가로 성공하였지만 귀화하여 일본인으로 살아가는 이가 있는가 하면, 한국 국적을 유지하면서 힘들게 특별 영주자로 살아가는 사람들도 있다. 이 모든 것은 본인들이 판단하고, 결정하여 감수해야 할 몫이다.
일본 사회에서 재일 한국인들은 각계에서 많은 활약을 하고 있다. 파친코 재벌 마루한 한창우(韓昌祐) 회장, 소프트뱅크의 손 마사요시(孫正義) 회장, 일본 프로야구계의 레전드 하리모토 이사오(張本勲, 장훈), 한국 국적으로 최초의 도쿄대 교수가 된 강상중(姜尙中, 일요일 아침 시사프로그램 선데이 모닝의 고정 패널) 교수, 인기 작가 이쥬인(니시야마 다다키, 조충래), 배우 미나미 카호(南果歩, 영화 파친코에서 모자수의 아내 에스코 역할을 맡을 예정이라고 한다), 탤런트 이가와 하루카(井川 遥) 등등 셀 수없이 많다. 재일 교포들이 어느 국적을 유지하는지는 본인들의 의지다. 국적이 어디이든 그들이 원하는 삶을 성공적으로 살아가기를 기원한다.
일본에 살고 있으면서도 알지 못했지만, 소설 파친코는 이미 일본어로도 번역되어 출간되어 있었다. 출판사가 책의 판매를 위해 분명 광고를 했을 텐데, 파친코가 많이 알려지는 것을 두려워하는 일본 정부의 눈치를 보는 언론이 알아서 보도를 자제했던 것은 아닐까. 그래도, 29개 국어로 번역되어 전 세계의 많은 사람들에게 침략의 역사를 반성하지 않는 일본을 잔혹성을 알리고 있다니 희망적인 일이다. 우리도 쇄국의 조선시대에서 세계 10위 경제대국으로 발전했다. 일부 극우 정치인들에 의해 일본이 너무 우경화되고 있어 안타깝지만, 과거를 반성하고 미래의 발전적 글로벌 동반자가 되기를 기대한다.
일본의 파친코 점포수는 2019년 말 현재 4,412개
# 일본의 파친코 점포수는 2019년 말 현재 186개 기업이 4,412개를 운영 중인데, 최근 4년간 소폭 감소 추이에 있다. 작년부터 코로나로 영향으로 경영에 애로를 겪고 있는 곳이 늘어나고 있기도 하지만, 재일교포를 중심으로 파친코로 성장한 기업들은 신사업 발굴을 위해서도 노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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