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뒤, 늦은 오후. 배달 주문이 잠잠한 시간, 백승아는 앞치마를 입은 채 가게 앞 의자에 잠시 앉아 있었다. 그때 '더 슬로우'에서 서지윤이 커피 한 잔을 들고 나왔다.
두 사람은 몇 번 얼굴을 본 적은 있었지만, 인사를 나눈 적은 없었다. 지윤이 고개를 숙이며 스쳐 지나가려던 순간, 승아가 먼저 말을 걸었다.
“요즘은… 커피도 약간 위로가 되죠?”
지윤은 놀라며 고개를 들었고, 멈칫하다 작게 웃었다.
“네… 맞아요.”
승아는 자리를 가리켰다.
“괜찮으면, 앉아서 드세요. 여긴 바람도 잘 불어요.”
지윤은 잠시 망설이다가, 조용히 의자에 앉았다. 두 사람은 말없이 각자의 컵을 들었다.
“치킨집 하시죠?”
“네. 1층 옛날통닭이요. 거기 사장이에요.”
“자주 봤어요. 커피숍에서도, 여기서도.”
승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근데 말은 오늘이 처음이네요.”
지윤은 웃었다.
“저… 요즘 조금씩 다시 시작해 보는 중이라서요. 여기도 그 과정 중 하나예요.”
승아는 지윤의 눈빛을 보며 자신과 닮은 무언가를 느꼈다.
“혼자 있으면 자꾸 생각이 많아져서 저도 커피를 자주 마셔요. 누가 보면 커피 마시는 척하는 사람 같을걸요.”
지윤도 따라 웃었다.
“저도요.”
그들은 더 많은 말을 나누지 않았지만, 서로를 조금 더 알아보게 된 날이었다. 서로 닮은 고요한 시간을 가진 사람들끼리, 그날 저녁, 처음으로 같은 자리에서 같은 바람을 나눴다.
다음 날 아침, 백승아는 가게 문을 열기 전, '더 슬로우'에 들렀다. 커피를 주문하던 중, 창가에 앉아 있던 서지윤과 눈이 마주쳤다. 이번엔 지윤이 먼저 인사했다.
"좋은 아침이에요."
승아는 짧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네요. 어제보다 조금 더 괜찮은 아침이죠."
지윤은 커피잔을 들어 올렸다.
"이거 덕분일지도 몰라요."
승아는 도윤에게 받은 커피를 들고, 잠시 그녀의 테이블 옆에 섰다.
"잠깐만 앉아도 될까요?"
지윤은 자리를 정리하며 웃었다.
"그럼요."
두 사람은 각자의 커피를 마시며, 말보다 긴 침묵으로 서로의 하루를 시작했다. 처음엔 어색했지만, 이상하게 편안한 공기였다. 그날 이후, 둘은 종종 마주쳤다. 가끔은 인사만 건넸고, 가끔은 커피를 함께 마셨다.
그리 대단한 말은 오가지 않았지만, 둘은 서로에게 커피처럼 느린 위로가 되어갔다. 그리고 백승아는 점점, 혼자가 아니라는 감각을 익혀갔다. 누군가와 커피를 나눌 수 있다는 것이, 어쩌면 오늘을 버티는 새로운 방법이 될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