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피의 온도_22

by 슬로우

김재훈은 35세였다. 중소기업 마케팅 팀에서 일한 지 6년째이다. 언뜻 보면 안정된 직장인이었고, 어느 정도 성과도 내고 있었지만, 요즘 그의 머릿속은 시도 때도 없이 어지러웠다.


‘이직을 해야 하나.’

‘지금 이 타이밍이 맞을까.’

‘이직하면 연봉은 조금 오르겠지만, 거기 가면 또 야근일 텐데.’


중소기업은 빠르게 굴러가지만, 그 안의 사람은 자주 멈춰 있었다. 한 명이 네 명 몫을 해야 할 때도 있었고,

성과는 언제나 숫자로만 평가되었다. 주말에 울리는 카톡 메시지 하나가 온종일 마음을 잠식하는 날도 적지 않았다.


그는 책상 앞에서 모니터를 보며 마우스를 굴리다가, 탭을 전환했다.


채용공고 사이트.

북마크 해둔 기업 페이지.

자기소개서 파일.


반쯤 작성한 이력서가 화면에 떠 있었다. 그는 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돌렸다. 마음은 이미 지쳐 있었고, 머리는 이직을 생각하고 있었고, 몸은 회사를 다니고 있었다. 그 모든 게 따로 놀고 있는 것 같았다.


그날 저녁, 그는 평소보다 일찍 퇴근했다. 뭘 하고 싶은 것도 아니었고, 집에 빨리 가고 싶은 것도 아니었다.

그냥 퇴근을 했고, 어딘가로 가야만 했다.


자연스럽게 걸음을 옮긴 곳은 ‘더 슬로우’였다. 요즘 들어 자주 찾고 있던 조용한 공간이자 마음에 안정을 주는 공간이었다. 딱히 말 걸 사람도 없고, 그렇다고 완전히 혼자라는 느낌도 들지 않는 장소, 그곳이 바로 ‘더 슬로우’였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도윤이 카운터에서 고개를 들었다.


“어서 오세요. 오늘도 아메리카노, 진하게?”


재훈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오늘은… 조금 더 진하게요.”

“진심이 느껴지네요.”


도윤의 말에 재훈은 피식 웃었다.


창가 구석 자리에 앉아 커피를 마시며, 그는 핸드폰을 꺼냈다. 그리고, 이력서를 다시 열었다. 그의 손가락이 미세하게 떨렸다. 재훈은 작성 버튼을 누르려다 멈췄다.

그 순간 누군가 다가왔다. 도윤이었다.


“아메리카노 진하게 탔어요.”


재훈은 놀란 얼굴로 도윤을 올려다보았다.


“아, 네. 고맙습니다.”


도윤은 커피를 테이블에 놓고는 조용히 물었다.


“요즘 고민이 많으신가 봐요.”


재훈은 순간 당황했지만, 이상하게 부정할 힘이 나지 않았다.


“네… 이직을 고민하고 있어요. 근데 생각보다 어렵네요.”


도윤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 나이쯤 되면, 많은 게 고민이죠. 커리어도, 삶도, 워라밸도.”


재훈은 눈을 내리깔며 중얼거렸다.


“그래도… 뭔가 바꾸고 싶긴 하거든요. 지금은 뭔가 계속 마모되는 기분이에요. 일은 익숙한데, 사람이 지치는 느낌이랄까요?”


도윤은 잠시 생각에 잠기다 말했다.


“저도 예전에, 그런 기분을 느낀 적 있어요. 회사에서 나를 필요로 하는 것 같았지만, 나는 점점 나를 잃어가고 있다는 느낌이요. 그래서 멈췄어요.”


재훈은 놀란 눈으로 도윤을 봤다.


“사장님도요?”

“네. 저도 퇴사라는 단어를 몇 년 동안 가슴에만 품고 살았거든요.”


커피를 한 모금 마신 재훈은 창밖을 보았다. 밤거리가 조용히 불빛을 밝히고 있었다.


“그래서요. 멈추고 나니까 좀 나아졌어요?”


도윤은 웃었다.


“당장은 더 불안했죠. 근데요, 적어도 내가 왜 불안한지는 알겠더라고요. 그전엔 그냥 막연히 답답했는데 불안한 이유를 아니 좀 나아졌어요.”


재훈은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오늘, 이력서 제출하려다가 멈췄어요.”

“잘하셨어요.”

“왜요?”

“망설임도 선택이거든요. 선택을 하지 않는 게 아니라, ‘아직’이라는 시간을 선택한 거죠.”


그 말에 재훈은 처음으로 가볍게 웃었다. 그는 커피잔을 손으로 감싸 쥐고, 작게 중얼거렸다.


“요즘은 그런 말이 위로가 되네요.”

수, 토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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