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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터칼과 소보로빵에 담긴 진심

추운 겨울에도 식지 않을 당신의 따뜻함

by 김해뜻




"OO아, 밖에 저거 이제 떼야겠다."


수능을 마친 직후, 나는 집 근처 프랜차이즈 빵집에서 아르바이트를 했었다. 그날은 새해가 시작되고 며칠 지났을 무렵이었을 거다. 사장님은 나를 부르더니 외부 유리창에 붙여진 크리스마스 홍보 스티커를 제거하고 오라는 명을 내렸다. 아르바이트 한 달 차, 뭘 모르던 나에게 사장님은 친절히 팁도 알려주었다. 뜨거운 물 받아서 뿌린 다음 떼면 잘 돼.


나는 뜨거운 물이 담긴 통을 들고 나왔다. 매장 안에서 입는 유니폼만 덜렁 입고 나왔더니 한파에 뼈가 다 시릴 지경이었다. 스티커 위로 물을 붓고, 손톱으로 끝부분을 공략하기 시작했다. 누가 붙였는지, 깨끗하게도 붙여놨다. 떼지지 않았다. 광고 모델의 실물 사이즈만한 스티커, 크리스마스 제품 광고 스티커가 매장 유리창 반을 다 채우고 있었다. 다 떼려면 족히 한 시간은 걸릴 느낌이었다. 아, 사장님. 왜 제게 이런 시련을. 속으로 원망했지만 하소연할 사람도 없었다. 나는 묵묵히 물을 뿌리고, 손톱으로 스티커를 떼내려고 애썼다.


광고 모델의 얼굴까지 겨우겨우 제거했을 때, 뒤에서 누군가 말을 걸어왔다.


"아이고, 그렇게 해서 언제 끝내려고. 이 추운 날에."


웬 할아버지셨다. 지나가시는 길에 내가 허둥대는 걸 보고 있으려니 답답하셨나 보다, 생각하며 어색하게 하하, 하고 웃었다. 그러게요. 저도 빨리 끝내고 들어가고 싶어요. 속마음은 직업 정신으로 내리눌렀다. 할아버지는 내 뒤에서 잠시간 나의 고군분투기를 보고 계셨다. 그러고는 어딘가로 사라지셨다.


분은 금방 나타나셨다. 이번에는 뒤가 아니라 내 옆이었다. 할아버지는 아무 말 없이 나타나, 스티커를 떼는 것을 돕기 시작하셨다. 손에는 어딘가에서 구해온 것인지 작은 커터칼이 들려져 있었다. 나는 급하게 할아버지를 말렸다.


"어, 안 도와주셔도 괜찮아요! 추우실 텐데!"


할아버지는 내 쪽은 쳐다보지도 않고 대꾸하셨다. 학생 입은 옷이 더 추워 보여. 셔츠 하나에 앞치마만 두른 내 모습을 안쓰럽게 보셨던 모양이다. 할아버지는 내가 손으로 쥐고 뜯어낼 수 있도록 스티커의 가장자리 부분을 칼로 살살 떼주셨다. 손으로 잡아당길 공간이 생기니 일이 훨씬 더 수월해졌다. 그분이 온 가장자리를 떼고 나면, 나는 뜨거운 물을 살살 무어 재빨리 잡아 뜯었다. 갑작스럽게 결성된 2인 1조의 팀워크는 나름대로 훌륭했다.


30분 걸쳐 스티커 제거 작업이 끝났다. 나는 연신 할아버지께 감사하다고 고개를 꾸벅 숙였고, 그분은 사람 좋은 웃음을 지으며 괜찮다 말했다. 스티커 쓰레기를 들고 매장 안으로 들어오는데, 사장님이 내 등 뒤에 있던 할아버지께 아는 체를 했다. 어리둥절한 눈으로 내가 쳐다보자, 사장님은 말했다.


"여기 건물 관리인 할아버지셔."


아, 그렇구나. 어쩐지 커터칼을 빨리도 구해오시더라. 건물 청소도 하시고 관리도 해주시는 할아버지셨던 것이다. 할아버지는 사장님과 담소를 나누면서 점심으로 드실 빵을 사러 왔다고 말씀하셨다. 그분은 빵 몇 개를 카운터에 올려놓고는 사장님과 건물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셨다. 나는 재빨리 빵을 다 계산하고선, 소보로빵 하나와 우유 두 개를 가져와 함께 담아드렸다. 계산은 몰래 주머니에 있던 내 카드로 처리했다. 봉투를 건네드리자 할아버지는 그제야 얼마냐고 물어보셨다. 이거 제가 사드리는 거예요, 감사해서요. 말하자 어이구, 안 그래도 돼. 하면서 카드를 막 건네셨다. 나는 이미 계산한 거라며 그분의 품에 빵 봉투를 안겨주었다. 계속 거절하시던 할아버지는 나의 고집에 결국 고마워, 학생. 하면서 웃으며 매장을 나가셨다. 사장님은 내 등을 두드리며, 아이구. 마음도 예쁘네. 하고 칭찬했다.


마음이 예쁘다. 나는 그 말은 내가 아니라 할아버지께 더 어울리는 말이라고 생각했다. 일면식도 없는 나의 일을 도와주려고 굳이 굳이 추운 날 함께 30분을 스티커를 떼주던 할아버지의 마음이, 그 누구보다도 아름답다고. 내가 건넨 빵과 우유는 그 마음에 대한 작은 보답일 뿐이었다. 그 30분 간의 추위를 견디게 해 줄 만큼 따뜻하고 다정했던 마음에 대한.


나는 봄이 되기 전, 아르바이트를 그만두었다. 겨울 내내 힘들고 고되기만 했던 아르바이트 생활 중, 드물게 따뜻함을 느꼈던 순간 하면 그 날이 떠오른다. 그리고 동시에 그의 묵묵한 선의를 생각한다. 상대에게 부담감을 주지 않으려 말없이 애써주는 배려를 떠올린다. 그분을 생각하고 나면 왠지 나도 그런 어른으로 크고 싶다 다짐하게 된다. 묵묵히, 자신의 마음을 베풀 줄 아는 사람. 아주 작은 선의와 정성으로 마음의 온도를 높여주는 사람이고 싶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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