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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자기 Apr 01. 2022

싫어하는 것을 해보기로 했다.

기록하는 2022년│Episode 59│2022.03.31

처음 이 일을 시작했을 때 회계공부를 같이 하면 나 스스로에게 훨씬 도움이 될 것이라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하지만 나는 배우지 않았다. 일단 숫자가 너무 싫었다. (내가 보기에 나는 완전 문과 성향이고, 사학과 신문방송학을 복수 전공했다. 어디에서도 숫자를 볼 일이 없었다.) 회계 공부를 할 시간과 여유가 있다면 차라리 영어공부나 더 하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혹시라도 내가 회계를 배우게 되면, 그래서 혹여라도 남들보다 조금 더 잘 알게 되면, 영영 이 업무를 벗어나기 힘들지 않을까 하는 멍청한 생각도 들었다. 그만큼 숫자를 보는 것이 싫었다. 어려웠다. 그 뒤로도 회계 공부를 해볼까 하는 생각이 몇 번 들기도 했지만, 그때뿐이었다. 마음을 다잡고 책을 펴자마자 '역시 이건 아니다.'라는 생각이 들어 바로 덮었다. 회계 공부를 계획할 때마다 결국 내게 남는 것은 회계 지식이 아니라, 다른 것을 준비해서 하루빨리 숫자를 하나도 보지 않는 업무를 해야겠다는 다짐뿐이었다.


그렇게 몇 년이 흘렀다. 나는 아직도 숫자를 본다. 달라진 것이라면 보던 숫자들이 눈에 익숙해졌다는 것이다. 매일 손가락으로 세던 숫자들이 한눈에 들어오고 나니 그 전보다 관련 업무가 많이 용이해졌다. 실무에 쓰이는 회계 관련 용어를 몇 개 알게 되었고, 고정적으로 하고 있는 업무에 한해서는 처리 방식 역시 익숙해졌다. 늘 하던 업무를 정해진대로 문제없이 처리하고 나면 마치 내가 뭔가를 조금 알고 있는 생각이 들 때도 있다. 하지만 당연히 아니다. 그냥 그런 느낌이 들뿐이지 실제로는 아무것도 제대로 아는 것이 없다. 실수 없이 하는 것 자체가 잘하고 있다고들 평했지만 나는 아니었다. 불안했다. 모래 위에 집을 짓고 있는 느낌이었다. 어쨌든 무엇인가를 계속 짓고 있는데 어느 한순간 무너져버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이 일을 하게 된 어느 순간부터 계속 들었다. 하지만 여전히 회계공부를 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러던 중 남편이 중국어 공부를 시작했다. 처음에는 학습지를 풀고 유튜브를 보는 것 같더니 얼마 전부터는 매주 화요일과 목요일마다 2시간씩 수업을 듣고 있다. (중국문화원 수업을 신청했는데 코로나로 인해 현재는 스카이프로 집에서 듣고 있다.) 처음에는 남편이 수업 듣는 동안 집안일을 한다거나 혼자만의 시간을 누렸는데 지난주에는 그 시간이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차곡차곡 중국어 실력을 쌓아가는 남편에 비해 내 시간은 버려지고 있는 기분이었다. 나도 그 시간을 활용해 무엇인가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문득 '회계 공부'를 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말이 거창해서 '회계 공부'지 그냥 회계 관련 책을 읽어보는 것은 어떨까 한 것이다. 그림 그리기라거나 일기 쓰기처럼 해야 할 일이지만 즐거운 것들은 굳이 시간을 내지 않더라도 하루 중 언제고 시간을 내서 하고 있는 나다. 반면에 회계 공부와 같이 정말 하기 싫은 것은 시간을 정해놓지 않으면 아마 내년까지 책 한 장 못 읽을 것 같았다. 그래서 그 길로 책을 샀다.(비전공자들에게 유독 도움이 많이 된다는 책을 골라서 샀다.) 그리고 남편의 중국어 수업 시작과 동시에 회계 원리 책을 폈다.

다른 책에 비해 쉽게 쓰여 있다는 것은 알겠는데 여전히 모르겠는 것은 똑같다. 몇 번이고 책을 덮을 뻔했는데 남편의 중국어 수업은 왜 이렇게 안 끝나는지. 가까스로 책을 읽어나갔다. 이해가 잘 안 되었지만, 계속 읽다 보면 언젠가는 알겠지 하는 마음으로 읽었다. 완벽한 것보다는 포기하지 않기를 목표로 삼았다.


남편의 중국어 수업이 끝났다. 내 회계 책 읽기도 바로 끝났다. 한 챕터는 읽은 줄 알았는데 막상 읽은 것은 열 장 남짓이다. 순간 재미있는 것만 하기에도 짧은 시간에 이렇게까지 안 맞는 것을 해야 하나. 에너지를 집중해서 다른 곳에 쏟으면 이것보다는 성과를 얻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과거에 회계 책을 처음 폈을 때보다는 친숙했다. 기분이 좋다. 싫어하는 것과 아주 조금은 친해진 기분이다. 


내가 지금 배우는 회계 원리를 앞으로 쓸 일이 있을지, 다시 볼 일이 있을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회계는 기업의 언어라 하고, 또 내가 무슨 일을 하건 기본적인 회계 지식은 중요하다(내가 읽은 회계 원리 책에서 그랬다.)고 하니 기본은 알아두는 것은 좋을 것 같다. 기회가 된다면 아주 쉬운 회계 관련 자격증도 하나 따 보고 싶다. 회계를 좀 더 알고 싶다는 마음보다는 몇 년간 정말 싫어했던 회계를 극복해보고 싶다는 마음이다.


중국어 수업을 마친 남편이 집 근처 공원으로 운동을 하러 가자고 한다. 역시 싫다. 방금까지 머리를 썼으니 드러누워서 밀렸던 드라마를 보고 싶다. 남편이 끈질기다. 회계 공부도 했는데 운동은 왜 못하겠냐는 거다. 그래. 이왕 이렇게 된 것 오늘은 싫어하는 것을 잔뜩 해보는 날이다.


공원에 도착하니 밤공기가 좋다. 밟고 있는 푸릇푸릇한 인조잔디를 보니 마음이 들뜬다.

남편은 곧장 공을 차기 시작한다. 나는 줄넘기를 넘는다. 줄넘기를 좋아했던 나인데 살이 찐 이후로는 싫어하게 됐다. 전보다 훨씬 힘들고, 털렁털렁 거리는 살이 유독 심하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오늘은 싫어하는 걸 해보기로 한 저녁이니까 악착같이 줄넘기를 넘었다. 


줄넘기를 넘다가 힘들어서 벤치에 누웠다. 10시가 넘어 조명은 꺼졌지만 하늘은 밝다.

물론 오래는 안 했다. 30분 정도 줄넘기와 걷기를 번갈아가며 했을 뿐이다. 밖으로 나오는 것 자체가 싫었지 막상 나오니 좋다. 어쨌든 몸을 움직였다는 것이 뿌듯하다. 


남편과 집으로 돌아오는 길, 야경이 꽤 멋지다. 우리 동네가 이렇게 멋졌나. 새삼 낯선 풍경이다.

겨우 책의 첫 장을 펴놓고, 극복한 것 같다느니 친해진 것 같다느니 한다는 것이 조금 부끄럽기도 하다. 하지만 어쨌든 나는 내게 관대한 편이고, 이 정도면 오늘은 꽤 뿌듯한 저녁이다. 회계원리 책 읽기, 다 씻었는데 운동하러 밖으로 나가기, 줄넘기 하기. 싫어하는 것을 세 개나 했다. 생각보다 싫지 않았다. 웃기지만 뭔가 이긴 기분도 든다. 싫어하는 것을 해보기로 한 것은 잘 한 일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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