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틴이 되어버린 푸어오버

01 취향정리:커피

by thetwentytwelve


귀찮지 않으세요?


출근하자마자 내가 하는 일은 선반 위에 둔 드리퍼와 서버를 꺼내고 커피포트에 물을 끓이는 것이었다. 원두를 분쇄하고 드리퍼에 필터를 끼워 린싱하고 젖은 필터 위 갈아둔 원두를 담고서 끓여둔 물을 붓는다. 뜨거운 물이 커피에 닿는 순간 커피가 일제히 부풀어 오르는 모습을 보면서 멍을 때린다. 회사에 도착하여 여기까지 무의식으로 행동하다가 커피 향이 올라오면 그제야 잠에서 깬 것 같다.


입사 초기에는 커피를 내려마시는 것을 신기하게 보는 사람이 많았다. 매일 내리는 게 귀찮지 않냐고 묻는 사람도 있었고 커피 내리는 것을 구경하다가 나눠마시는 사람도 있었다. 시간이 흘러 나 말고도 내려마시는 동료가 생기고 누군가 멀리 여행 갔다 오면 원두를 사 와서 같이 마시게 되었다. 회사에서 드립커피를 마시기 시작한 것은 출근하자마자 바로 일하기 싫어서였는데, 어느새 루틴이 되어 커피를 내리지 않으면 하루를 제대로 시작하는 느낌이 들지 않는다.


어릴 적 독서실에서 잠 깨기 위해 인스턴트커피를 마셨고, 언제부턴가 생겨난 프랜차이즈 카페에서 아메리카노를 처음 맛보며 무슨 맛으로 먹는지 의아해하던 때도 있었다. 그로부터 몇 년 뒤 오전 수업부터 야작 하러 가는 등굣길에는 1리터 커피를 사서 하루종일 마시거나 교내 카페를 들락거리며 카페인 수혈하듯이 아메리카노를 들이부었다. 직장인이 되고서 회사 근처 스페셜티 커피로 유명한 리브레가 있어 매일 맛있는 라떼를 마실 수 있었고, 집 근처에 세계 각국의 원두를 직접 로스팅하여 푸어오버 방식으로 내려주는 카페가 생겨 방앗간처럼 들렸다. 국내 커피 시장의 성장과 함께 내 입맛도 변했고 여행을 다니면서도 그 나라의 커피 맛을 찾아다니게 되었다.


Slow Coffee Style Speciality(SCS-S04), KINTO / Moka Express Coffee Pot, Bialetti

다양한 커피 맛을 알아가며 카페를 갈 때마다 내 입맛에 맞는 커피를 발견하면 원두를 사 왔다. 처음에는 오래전 이탈리아 여행 기념품으로 사 온 모카포트를 이용하다가 점차 드리퍼, 그라인더, 커피포트 등을 모으며 드립커피를 마시게 되었다. 사실 커피 맛도 맛이지만 커피를 내릴 때 공간을 채우는 향이 좋다. 신선한 원두를 분쇄하면 나는 향부터, 뜨거운 물이 닿으면서 나는 향 그리고 마실 때 코 속에 퍼지는 향까지 이 과정 전체가 나에게는 커피를 마시는 것이 되었다.


요즘 스페셜티 커피를 경험할 수 있는 카페를 쉽게 찾을 수 있고 전문가가 내려준 커피가 더 맛있지만, 온전히 그 과정을 즐기며 커피를 마실 수 있어 직접 내려먹는 것을 선호하게 되었다. 집에서 내려 마시던 습관대로 회사에 가져가 마시다 보니 누군가에게는 커피 덕후처럼 비쳤고 이 때문인지 퇴사선물의 대부분이 커피 관련 제품이었다. 아직 커피 덕후라고 말할 수 있는 수준은 아니지만 다음날 아침에 마실 커피를 기대하며 잠들면서 내 입맛에 맞는 커피를 찾아가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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