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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Whalestar Jul 08. 2020

직선을 그리는 남자 곡선을 그리는 여자

난독증 작가의 서가 (2)

난독증 작가의 서가(2)


서면 인터뷰를 고집하는 이유 중의 하나는 유창하지 못한 나의 말솜씨 때문이다. 난독증의 증세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말하기 장애의 특성을 띠기도 한다. 이 부분은 워낙 미묘하게 나타남으로 대부분의 사람들이 모른 채 지나가서 증세를 알아채는 이들은 많지 않다.


오늘은 출간 기념회가 있는 날이다. 체면치레를 위해 적합한 선택을 위한다면 이곳에 나오지 말았어야 했다.

반복되는 일상들은 나를 정상인의 범주로 망각시키고 이곳으로 발길을 향하게 했다.

하지만 인터뷰를 진행할 때마다 번번이 기자들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듣기 어렵습니다" 또는 "조금 더 천천히 차분하게 얘기해 주시겠습니까?"라는 요구를 하기 일쑤다. 생각할 시간을 충분히 가지지 못하는 자리란 걸 왜 자각하지 못한 것일까. 자책해도 소용없이 절망의 시간은 흐른다.


그들의 눈은 처음에는 기대로 지금은 의구심이 가득하다. 마치 글을 쓴 저자가 당신이 맞는지 되묻고 있다. 책의 정서와 나의 일관되지 못한 언행 불일치에 사람들은 수군거린다. 평면적인 나의 대답이 그들의 기사에 생산성 없는 내용만을 제공하고 있었다. "질문 감사합니다. 생각해보고 서면으로 답변을 드려도 될까요?" 이런! 몇 번째인가! 또 멍청한 대답을 내놓았다.


기자들은 나의 대답이 불성실하다고 느꼈는지 혀를 비비 꼬며 "그래, 어디 한번 나도 서면으로 받아볼까 이럴 거면 출간 기념회는 왜 한 걸까요?" 나지막한 소리로 말했지만, 이곳저곳에서 하나둘 조소가 터져 나온다. 끔찍한 상황을 스스로 자초하고 있다. 내면의 대화를 기대했을 그들의 눈에는 그저 난 남의 말에 귀 기울이지 않는 괴짜일 뿐이다.


긴장감이 나의 사고를 더 경직시킨다. 정신이 아득해져 갈 즈음 올곧은 시선으로 질문을 던지는 한 여성이 보인다. 그녀의 자세와 눈빛에서 미지의 세계를 바라보는 듯한 호기심이 느껴진다. 다듬지 않은 붉은 긴 머리는 마치 석양처럼 빛난다. 아니 구원의 메시아처럼 보인다. 나에게 조소를 보낸 기자들의 머리는 이제 그저 까만 미역바위처럼 보일 뿐이다. 그 생각을 하니 잠시나마 긴장감을 내려놓을 수 있었다.


작가님이 쓰신 책 멀티 페르소나에 비춰 본다면 '일하는 나와 즐기는 나' 중에 어떤 정체성이 본인과 더 부합한다고 생각하시나요?


그녀의 질문에 나의 마음은 분위기를 전환한다. 앞에서 들려준 어눌하고 멍한 대답에도 실망감을 드러내지 않은 그녀에게 선물 같은 대답을 전하고 싶다. "질문 감사합니다. 생각해보고 서면으로 답변을 드려도 될까요?" 똑같은 평면적인 대답이다. 하지만 이 안에는 드러나지 않은 나의 깊은 심연이 놓여있다. 기꺼이 개인 메일까지 보내는 수고스러움을 감당하리라. 현장 분위기는 다시 술렁거렸지만, 대답을 들은 여기자는 아무런 미동 없이 나를 지긋이 바라보았다.


 "네 답변을 기다리겠습니다" 짧은 대답과 함께 자리에 앉으며 보인 표정에서 옅은 미소가 번지고 있었다. 지금은 그녀가 어떤 생각으로 웃음 지었는지 감히 추측할 수도 없다. 당장 이 자리에서 내가 할 수 있는 말과 생각은 아무것도 없다.


명함을 건네받고 밀린 대답을 위해 만남을 뒤로 한 채 가는 발걸음을 서둘렀다. 그제야 자발적인 언어들이 하나둘 머리에 쌓인다. 전하고 싶은 입말이 차곡차곡 머릿속에 글자로 쓰이기 시작한다. 심장이 근질근질하다.

서가에 돌아와 상기된 얼굴로 이메일을 확인한다. 그녀인지 단번에 알 수 있었다.



TO. 안녕하세요. 스텔라 기자입니다.

작가님은 현장에서 평면적이거나, 직선적인 대답만을 하셨지만 쓰신 멀티 페르소나의 세계관으로 본다면 그 또한 태도에서 삶을 대하는 곡선의 답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말 한마디로 정의할 수 없는 정체성은 언어들로 표현되지 않는다는 것을요. 언어들의 접근 방식을 다르게 가져야겠다고 생각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답변의 기회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출간기념회 현장에서 한 질문을 아래 첨부합니다.


현장에서 보인 나의 직선적인 태도와 언어에서 그녀는 역설적으로 다양한 곡선의 페르소나를 확인한 것이었을까? 장애를 들킨 것일까? 아니면 그저 나의 가면을 본 것일까? 어떤 방향이 되었던 그녀가 나에게 대답해 줄 시간을 내어줬다. 이제 직선에서 곡선으로 다시 되돌려 줄 나의 차례. 기록되지 못한 활자들을 풀어줄 시간이다.


탁 탁 탁 탁

스텔라 기자님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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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독증 작가의 서가 (3)

.https://brunch.co.kr/@thewhalestar/73

난독증 작가의 서가 (2)독증 

난독증 작가의 서가 (1)

https://brunch.co.kr/@thewhalestar/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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