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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빙산 Mar 10. 2024

2년 후, 어느새 5인가구가 된 후

감사라는 태도에 대해

2 Years Later…


시점은 2024년이 되어 셋째를 키우며 셋째 이야기만 적자니 둘째, 첫째 이야기가 아쉬워 결국 다 녹여서 한 시점에 추억과 회상을 섞어 기록하려 합니다.



1. 우리에게 주어진 하루하루.

그게 너무 평범하다고 생각해서 아무 감흥 없이 살아가다가, 뭐 하나 맘에 안 드는 걸 마주하면 불평하는 것.

그게 오히려 보편적인 태도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결혼 후, 두 아이의 아빠가 된 후, 나에게 하루하루가 평범한 적은 없었던 것 같다.

감성파가 아니기에 늘 감격에 벅찬 하루하루를 보내는 건 아니지만, 일상의 저변에 어느덧 “감사”가 깔려 있는 걸 발견한다.


내 의지로 뛰고 있는 게 아닌 심장을 의식하게 된 건 대학을 졸업하고 나서였던 것 같다.

그때 하루하루 살아 있다는 것에 대한 기본적인 감사함을 얻게 된 것 같다.

종종 어떻게 이렇게 다른 두 사람이 만나 평생을 함께하겠다고 덤벼들었나- 싶기도 하지만, “이런 나”와 “그런 너”가 가족을 이루게 된 것 역시 이 조합이 아니면 상상이 되지 않게 되었다.

그 안엔 그 이전에 이뤄지지 않았던 다른 이들과의 ‘조우’와 달리 순조롭게 결혼이라는 깰 수 없는 약속을 선언한 이 사람이 있다는 것에 감사함이 얹혔다.


출처에 대한 기억이 모호하지만 정말 그랬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날 좋아한다는 것 자체가 큰 기적이란 유치 찬란한 말에 진심으로 공감하려면 수많은 착각과 짝사랑과 포기와 미련의 늪을 건너야 했다. 이 문장에 공감하지 못하는 당신에게 해줄 말은 한마디뿐이다.


You are so lucky.


아내에게 “박사 학위까지 따고서 자기 나라로 돌아가 대학교에서 교수직 코스를 밟으며 그 간의 학업의 성취감”을 누릴 수 있는 길을 걷게 해 보고자 국제장거리결혼이라는 묘한 형식의 신혼생활을 수개월 한 적이 있다. 하지만 아내도 나도 안다. 경제적 수익보다 더 중요한 인생이 있다는 걸. 그런 사람을 만났으니 차도 집도 없이 결혼을 한 거다


2. 그리고 큰 노력(?) 없이 자연스레 첫째 아이가 생기고, 또 별 노력 없이 둘째가 생기고, 이 둘을 키우다 얻은 잠시의 여유(?)에 셋째가 생겼다.

삼 남매의 장녀로 태어난 아내이기에 원래 셋째까지 생각은 있었다고 한다.

난 사실 자녀계획은 남편이 할 수 있는 게 아니라고 생각했었던 사람이라 0명에서 N명까지 별 생각이 없었다.

그게 결혼의 본질이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이들이 생기고 건강하게 자라나고 그 변화하는 모습 속에 큰 사고와 질병이 없다는 건, 종종 잊게 되지만, 그게 잊을만하면 또 작은 병치레를 통해 건강의 소중함을 깨닫게 된다.

아무것도 못하는 아이의 숨소리.

살포시 손을 얹으면 느껴지는 아이의 심장박동.

눈만 마주쳤을 뿐인데 행복해하는 아이의 눈웃음.

아직 “엄마, 아빠“ 한 마디 못하는 주제(?)에 할 줄 아는 유일한 모음인 ’아‘를 가지고 30분 동안 쫑알거리는 언어인지 노래인지 알 수 없는 소리.


심지어 배설물이 하루에 한 번 제대로 나오는 것조차도 감사함으로 마주할 수 있게 하는 게 아이를 키우면서 얻게 되는 것이다.


정치적 색깔을 드러내는 조언 때문에 종종 듣기 거북하지만 다른 유대인 랍비를 알지 못해서 가끔 듣는 팟캐스트가 있다.

그 랍비는 이런 말을 했다.

신이 아이를 주신 이유는 부모가 더 나은 사람이 되게 하기 위해서이다.


아이가 생겼기 때문에 갑자기 인품이 훌륭해진다는 말이 아니다.

아이를 키우면서 마주하게 되는 시련을 겪어가며 더 나은 사람이 되어갈 기회가 주어지는 거다.

하지만 이걸 혼자 해내야 한다면 그 시련이 감당하기엔 너무 크기에 자신을 보호하고자 하는 생존의식이 너무 커져 모성애(혹은 부성애)의 ‘포기’로 이어질 수도 있다.

우리 인간은 너무나 나약한 존재이기 때문에.

나 역시 그렇게 될 수 있는 연약함의 잠재력 혹은 “악의 잠재력”을 지니고 있는 인간에 불과하다.

그렇기 때문에 파트너가 있다는 게 감사한 거다.


3. 결혼 전엔 지적이란 게 그렇게 싫었다.

하기도, 듣기도.


하지만 결혼이란 약속 안에서 ‘지적’은 희망의 표시이다.

지적을 한다는 것은 그 사람이 날 보고 있다는 것이 되고, 그 사람은 내가 더 나은 사람이 될 거라고 믿고 있다는 것의 상징이 되기도 한다.

(그걸 예쁘게 말하면 건설적 비평이 될 수 있겠지만, 일상의 대부분에선 결국 ‘지적질’로 받아들여지기 쉽기 때문에 굳이 지적이란 단어를 쓴다)


한편 디즈니 콘텐츠부터 일본 애니까지 포스트모더니즘이 출처인지 에피큐로스가 ‘그라운드제로’ 인지 모르겠지만, 너무 따뜻하게 느껴지는 그 말.

“있는 그대로의 너로 괜찮아”


한 때 이게 감동적이라고 생각했던 적도 있고, 늘 평가당하며 부정당하는 사춘기 청소년에게는 이 말이 울림일 수 있겠지만,

결혼이란 평생을 다짐한 부부 사이에서 두 사람이 정말 너무나 완벽한 사람이 아니고서야 ’ 있는 그대로의 나‘나 “있는 그대로의 너”나 그대로 내버려두면 둘 다 힘든 구석이 잔뜩 있다는 걸 발견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것들이 우리가 부모의 역할을 감당할 때 어떤 악영향을 미칠지 예측이 되기도 한다.


난 당신이 더 나은 사람이 될 수 있을 거라 믿어.


아무리 가슴을 후벼 파는 단어로 내뱉어져도 그 마음속 깊은 곳에는 상대방의 가능성, 잠재력, 미실현의 선(未实现の善)을 믿는다는 게 숨어있다.

그 듣는 귀에 ‘액티브 노이즈 캔슬링’을 장착할 수 있게 되면 그런 ‘지적’을 하는 상대방의 아픔을 알 수 있게 되는 게 아닐까 싶다.


내가 지적을 더 많이 듣는 사람인 것 같은 인상을 줬을지 모르겠으나, 생각이 많고 더 분석적이고 더 건설적이고자 노력하는 피곤한 인간이 나이기 때문에 …

감동은 접어주시면 좋겠다. 제가 죄인입니다.


하지만 그렇게 두 사람이 서로가 서로의 언행의 ‘본질’을 알아채주면, 일상의 아픔 속에서도 서로가 있음에 감사할 수 있게 된다고 생각한다.



4. 셋째가 나오기 전, 둘째를 키우며 겨우 8개의 글을 브런치 서랍장에 남길 수 있었다.

아이에 대한 내 사적인 기록보다 더 중요한 이슈가 있다고 생각했기도 하고, 물리적인. 시간이 부족하기도 했다.


차가 생기고 운전자가 된 이후, 수면부족은 나의 안전뿐만 아니라 가족의 안전에 직결된다는 걸 체감하게 한 사건도 있었고.


육아의 기록을 실시간으로 남길 수 있는 분들은 정말 대단하다.

자신의 정신력이 부족하다고 생각해 본 적은 없지만, 그게 가능하신 분들에 비하면 아마도 난 유약한 존재일 거다.


나에겐 아이들을 재우고, 아침에 일어나 출근 전에 아이들이 먹을 계란, 고구마, 당근 같은 걸 찜기에 넣어놓고, 우유와 견과류를 테이블 위에 놓고,

점심을 다 먹어가는 아이들의 오전과 오후의 경계 사이에 도착해서, 낮잠을 재우고, 데리고 나가 놀아주고, 자기 전에 씻기고… 이 일상만으로도 이미 가득 차있다.

버겁지 않기 때문에 버겁다는 단어는 피했다.


물론. 아이들이 건강할 때의 이야기이다.

어제, 오늘, 그저께, 아마 내일까지, 기침을 하며 깰 아이들 사이에서 자고 더 수면이 부족해지면, 물론. 버겁다고 말하고 싶을지도 모르겠지만.

난 꽤나 튼튼하다. 감사하게도.


그래서 가끔 (아니 아주 자주) 아이 같은 아내를 포함한 네 명이 모두 투정을 부려도 흔들리지 않는 튼튼한 무언가와 같이 모두를 지탱해 나갈 수 있다.

물론 이런 나를 지탱하는 건 또 내가 알게 모르게, 보이는 세계 밖의 보이지 않는 영역의 힘이 있기 때문일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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