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으로 살 수 없는 것을 위해 사는 아빠
注: 3부 <아이셋 아빠가 단축근무를 하다> 편은 2023년 셋째 출산 후 기록한 내용이다. 첫째, 둘째를 내가 재우고, 두 아이 사이에서 잠든다. 그러다가 누군가의 '펀치'와 '킥'에 맞아 심야에 깨면 글 쓸 기회로 삼고 있다. 하루를 삼등분으로 나눠서 살고 있어 피곤할 때도 있지만 그렇게라도 글을 쓰고 있다는 것에 감사하다.
1. 두 아이 사이에 누워 책을 읽어주고 잠이 드는 게 일상이 되었다.
아니,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읽어주다가 잠이 드는 경우도 굉장히 많다.
너무 피곤한 날은 누워서 읽어주던 책이 누군가의 얼굴에 떨어지는 경우도 있다.
책육아니 아이의 지능발달 등을 고려해서 하고 있다기보단 가장 편하게 아이들을 꿈나라로 유도하는 방법이기 때문이다.
지정된 시간이 되면 불을 끄고 깜깜한 어둠 속에서 강제취침을 하는 가정도 있고, 그 어둠 속에 안 자겠다고 울부짖는 아이들의 절규를 무시하고 십 수분 혹은 수십 분 간 자는 척하는 가정도 알고 있다.
우리 집은 그저 책을 선택했을 뿐이다.
캐나다의 아동발달 심리학자의 유튜브 세미나 영상에서 들은 내용이 떠오른다.
아이들이 잠을 자지 않으려 하는 이유는 당연해야 할 부모와의 영속성이 깨어지는 순간을 맞이하기 싫어서이다.
-고든 뉴펠드-
번역을 한다고 했는데 이해가 되지 않을 것 같기도 하다.
저분이 주장하는 바는, 아이들에게 부모와 함께 하는 시간은 너무나 당연한 시간인데, 잠이 들면 그 시간이 끝나는 것 같아 아이들이 거부한다는 거다. 아이들에겐 이 잠의 끝에 다시 엄마 아빠가 기다리고 있다는 미래의 사건에 대한 확신이 없는 거다.
순간에 충실한 게 아이들. 그런 아이들에게 엄마 아빠가 사라지는 어둠이 찾아오는 게 싫은 거라고.
그런 각도에서 봤을 때, 책을 읽는다는 건 좀 더 부드러운 접근법이었던 거다.
“자자” 가 아니라 “책 읽자. 누워” 가 키워드인 거다.
둘째 수준에 맞는 쉬운 책, 첫째가 좀 더 흥미를 가지고 듣다가 잠이 들기 쉬운 한 페이지에 더 긴 문단이 있는 책.
이렇게 두 권을 읽어주다가 보면 어느새 잠이 들어있는 걸 발견하는 게 대부분의 경우이다.
2. 한 번도 깨지 않고 네시까지 잘 수 있었던 어젯밤.
기침 때문에 깨지도 않고 네시까지 자다니!
감사한 밤이다.
병원을 가면 1주일, 병원을 안 가면 7일이라는 감기회복 패턴에 대한 속담 아닌 속담.
진짜 그랬다. 병원에 가면 감기가 뚝 떨어질 것 같아서 약을 받아오면 그날 밤도, 그다음 날 밤도, 비슷한 증상으로 기침을 하고 깨고, 달라지는 게 없었다.
열이야 해열제가 즉각적으로 내려주는 효과를 체험할 수 있지만, 이미 생긴 콧물이 기도로 넘어가는 걸 막는 건 그만큼 ‘효능‘이 적용되는 시간이 빠르지 않다
육아 시작한 지 4년 차, 지난번 감기에 드디어(!) 병원 안 가고 감기 극복에 성공한 경험을 바탕으로 이번에도 안 가는 중이었다.
지난주 수요일 밤에 열이 있었고, 아침엔 열이 내렸고, 그 후 기침 시작이었으니, 어제가 6일 차.
혹시라도 기관지염으로 넘어가는 리스크는 방지하고 싶으니 어제 어머니를 데려다 드리는 길에 ‘똑딱’ 앱으로 가던 소아과를 확인해 보니 대기인원이 없길래, 잠든 둘째를 어머니와 차에 두고 첫째를 데리고 병원에 갔다. 기관지염은 아닌데 약 먹고 3-4일 후에 다시 와보란다. 처방전은 받았는데 퇴근길에 차가 막히기 전에 귀가하기 위해 약국은 일단 스킵했다.
그래서 약을 안 먹고 꿀 먹고 ‘유칼리툽스 체스트밤’을 발라준 게 전부.
그저께 욕조에 물을 담아 목욕한 것도 기관지 회복에 한몫했으려나.
면역력이 감기들과 싸워 승기를 잡은 시점이었을까?
아니면, 이제 말을 곧잘 하는 만 2세 둘째가 했던 기도 덕분인가 ㅎㅎ
복합적인 시도를 했을 때의 결과의 단점은 인과관계분석이 어려워진다는 거다.
아무튼, 잘 잤다.
3. 아쉬운 게 있다면 씻지 못하고 잠들었다는 것.
두 달 전까지만 해도 상상할 수 없었다.
씻지 않고 잠든다는 건 나에게는 용납하기 어려운 비위생적인 게으름이었다.
그러다가 자다가 새벽에. 깨서 씻고 다시 잠들지 못한 나의 삶을 듣던 이웃 세 자녀 아빠/형님이 한 마디 했다.
“자는 것도 중요해.”
당연한 말이었는데, 나도 알고 있던 지식인데, 타인의 입을 통해 들었던 그 말이 내 마음의 스위치를 하나 꺼버렸는지 그 이후 새벽에 깨더라도 계속 자는 걸 할 수 있게 됐다.
씻지 않고 하루의 비위생을 버텨내는 힘이 생긴 거다.
그래도 4시까지 잤더니 필요한 체력회복지수는 획득한 것 같으니, 씻어보자.
씻을까? 글을 쓸까? 더 잘까? 선택지가 하나 늘었다.
오늘은 기침도 안 하는 것 같으니 각 잡고(?) 거실의 테이블에 아이패드와 블루투스 키보드를 놓고 ”나에게 기회를 준 브런치의 선택“에 부응해보려 했지만 갈등이 되었다.
결국 아이들의 침실 앞에 접혀 있는 범퍼침대 패드를 의자 삼아 방문 앞에 앉아 강의 시간 사이에 리포트를 마무리하는 대학생 마냥 불편한 자세로 앉아 나에게만 의미 있는 기록을 하고 있다.
4. 이번 주에 부서이동이 있었다.
어제가 돼서야 부서 전체 미팅이 있었는데, 요즘 유행하는 자율출퇴근시간제에 해당되는 사람들의 출퇴근시간을 공유하던 중에, 육아기 근로시간단축을 사용하는 나도 내 출퇴근 시간을 이야기해야 했다,
”8시부터 12시까지 근무입니다. “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한 여자선배가 말했다.
나 보다 결혼을 일찍 했지만 늦은 나이에 결혼을 한 선배이고 아이는 없는 딩크족이다.
Double Income, No Kids.
야, 그럼 월급도 반토막 아니야?
꼭 그렇게 까지 해야 해?
그렇죠.
월급 반토막이죠.
꼭 그렇게까지 해야 했나…..?
그 질문에 대해 그 자리에 하지 못한 답변을 여기에 남겨본다.
난 내 아내를 잘 안다.
아내가 마가렛 태처 수상처럼 철의 여인이었더라면 아마 난 자산증식에 도움이 되는 수입 최대화 노선을 선택했을지도 모른다.
아주 당연히.
그게 경제학적으로 옳은 선택이라고 판단했을 거다.
하지만 셋째를 임신 중이던 아내가 힘들어했고, 2킬로 반경에 사는 부모님이 매일 와주셔도, 1킬로 반경에서 출근하며 점심도 집에서 먹고, 애들 병원 갈 일 있으면 회사에 양해를 구하고 나와 애들만 데려가는 아빠로는 부족했다. 무엇보다 가정보육을 고수하고 있었으니, 당연히 힘들다.
아내의 부담을 덜어줄 수 있는 건 뭐든지 하고 있었다.
점심, 저녁길엔 집 근처의 여러 맛집들에서 저녁거리를 포장해 가고.
아내가 자기 전에 이런저런 마사지/안마도 해주고.
아이들이 잠들면 세탁기에 있는 빨래를 널고, 건조기를 돌리고.
‘반찬ㅇㅇㅇ’라는 배너광고에 혹해 반찬도 구독하고.
장인 장모님이 한국에 오셔서 한 달 함께 계셔보기도 하고.
하지만, 남편이 제일 든든하기 때문에 제일 편하단다.
누구에게 아이들을 맡긴 들 아빠만 못하다는 걸 잘 아는 거다.
그렇다.
이 육아기라는 시간은 아내에게도 남편이 가장 필요한 시기이다.
그 수고로움을 덜어주고 싶었다.
그게 남편으로서 옳은 선택 같았다.
아이들과의 시간은 덤이었다.
어쩌면 옳은 선택에서 따라온 행복이란 부산물이기도 했다.
아이들의 인생에서 나를 가장. 필요로 한 시간이기도 하다.
다행히(?) 가장 사랑스러운 시기이기도 하다.
함께하는 시간은 정서적으로 축적이 되기도 하고 내 아이를 알아가는데도 큰 도움이 된다.
아이가 뭘 좋아하는지, 어떤 것에 어떻게 반응하는지, 어떤 갈등에 어떤 표정을 짓는지,
어떤 걸 무서워하는지, 어떤 걸 꺼리는지.
(우리 집은 아내가 더 터프하기 때문에 주먹구구식으로 접근하는 아내 덕분에 아이들이 뭔가를 두려워하게 되는 경우도 있었다.
예를 들자면 머리 감기, 옷 입기… )
또 자기를 알아주는 이 ‘양육자’가 점점 더 좋아지는 게 당연하기도 하다.
5. 셋째를 임신하고 이사를 고민해야 되는 시점이 되었을 때, 어떤 친구는 교외 넓은 아파트를 추천했다.
형, 파주는 어때? 거기도 좋던데.
빚을 내어 공간을 사고 그 대신 시간을 출퇴근길에 버려야 하는 구조.
내가 함께 하는 시간은 줄어들고, 나를 제외한 가족들이 사용하는 ‘전용면적’이 넓어지는 공간.
아이들이 좀 더 독립적인 주체가 되었을 때는 그걸 긍정적으로 검토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아이들이 어린 지금 나에게 그건 현명한 선택으로 보이지 않았다.
아무리 넓고 예쁜 집이라도 아빠가 함께하는 시간이 줄어들어야 한다면?
그 예쁜 집을 더 중시하는 아내였더라면 그걸 마지못해 고려해야 하는 남편의 입장도 있었겠지만, 아내는 나의 가치관에 동조하는 비슷한 사람이다.
우리는 그래서 최소한의 타협을 했고, 가능한 선에서 최대한 함께 할 수 있는 시간이 줄어들지 않는 선택을 했다.
여기에 공감하지 못한 사람이 많다는 건 잘 안다.
시대의 흐름이란 게 그렇다.
부동산이 가장 중요한 것처럼 비치는 문화.
하지만 국제사회까지 바라보지 않더라도 이웃나라 경제사를 조금만 줌아웃해서 보면 그걸 최우선시할 필요가 없다는 걸 알 수 있다.
물론 ‘안다’와 ‘그렇게 산다’가 일치하려면 인생의 동반자님과 같은 가치관을 가지고 있는지가 중요하겠다.
6. 아무튼, 꼭 그래야 했나?
그러지 않았다면에 대한 시나리오는 크게 노력하지 않아도 떠오른다.
아내의 번아웃.
거기서 유발하는 아이들에 대한 태도 문제.
그런 태도로 자신을 대하는 양육자의 모습에서 유발되는 아이들의 정서장의 문제.
그리고 인생의 많은 문제들이 그렇듯, 저변에 깔려있는 이 잠재의식적인 것들이 아이들의 성장과정에서 미칠 수 있는 문제.
그게 나중에 아동상담이나 심리치료로 이어져서 ‘더 많이 벌어야지 ‘해서 모아뒀던 돈, 공부 많이 하신 고학력자 상담사들에게 드리는 미래를 그려보는 것도 가능하다.
해외에서 거주하던 학생시절, 커리어를 우선으로 한 외교관의 아내가 우울증으로 무너졌던 게 기억난다. 고등학교 때 알고 지내던 친구의 어머니 이야기이다.
물론 문제는 찾기 마련이다.
반대쪽으로 생각해서 ‘돈을 더 많이 벌어두지 않아서 생기는 문제‘들도 나열해 볼 수 있지만, 그건 내가 걷고 있지 않은 보편적인 길을 걷는 여러 사람들의 입술과 손가락에서 흘러나오고 있으니… 나까지 하고 싶진 않다.
무려 피천득 님께서 번역을 한 로버트 프로스트의 시 - A Road Less-traveled. 사람들이 더 적게 간 길.
난 그 길을 걷는 선택을 했고, 아마 이게 옳다는 걸 알고 있어서이다.
또 다른 책에서도 비슷한 글귀가 있었다.
넓은 길에 이르게 하는 좁은 문과, 좁은 길로 이르게. 하는 넓은 문.
난 좁은 문을 선택했다.
굳이 그 길이 넓어서 일거라는 아니지만
걸어보니 확실히 더 넓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