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아 중 마주하는 업무 분담/분장에 관해
돈으로 살 수 없는 걸 위해 사는 아빠 (5)
1. 남녀는 평등하다.
하지만 동일identical 하지 않다.
그게 생물학적 차이, 또 그 생물학적 차이가 심리학적(으로 해석될 수 있는) 차이과 연관되기도 하고, 사회경험의 차이와 신체 능력 차이로 이어지기도 한다.
그 차이를 없다고 생각하고 ‘평등’만 적용하며 그걸 가정에 대입시키면, 현실과 동떨어진 문제해결법을 제시하거나, 그렇기 때문에 해결되지 않는 문제를 안고 끙끙대며 속앓이 하며 살아가는 게 아닌가 생각한다.
2. 민감한 단어라 사용이 조심스럽지만, 난 어린 ‘페미니스트’ 였는지도 모른다.
남녀차별은 나쁘다는 걸 무슨 수업시간에 배워와서 여동생을 둔 손자를 편애하는 할머니에게 ‘남존여비’가 나쁘다는 걸 주제넘게 훈계하던 초등학생.
초등학생시절 어머니가 읽던 어떤 잡지에서 ‘이름 없는 여자’ 에 관한 글 (ㅇㅇ엄마로 불리는 여성에 대한 이야기)에 공감했던 기억이 있다. 그리고 그 기억이 아직도 잔향을 남겨 지금 육아를 하며 알게 되는 ㅇㅇ 엄마/아빠라는 호칭 대신, 이름을 부르고 있다.
그게 묘하게 ‘기사도’라는 개념과 혼재되면서 ‘남녀평등’을 위해 노력하면서도 ‘여성을 보호해야 한다’는 정작 페미니스트들의 다수(혹은 일부)가 들으면 기분 나쁠 태도를 가지고 초등학교 시절을 보내온 건 같기도 하다.
페미니즘이란 단어 안에 포함되는 스펙트럼이 넓어지면서, 이 단어가 맞는 단어인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난 그런 조숙한(?) 초등학생이었다. (국민학교로 시작했으나, 학교 간판이 초등학교로 바뀌었다)
3. 육아를 하는 회사 여자 선배들의 한탄을 듣다 보면 ‘똑같이 일하는데, 왜 나만 가사노동을 더 해야 되는지 모르겠다. 화가 난다’라는 내용이 굉장히 많았다. 육아 및 가사노동(이라고 부르는 게 좀 싫기도 하지만)에 굉장히 많이 시간을 투여하는 남편으로서 같이 어이없어하며 공감하는 편이다.
그러면서 왜 남편들은 아내를 만족시키지 못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분명, 그 남자들도 군대 있을 때는 엄청난 ‘살림꾼’이었다. 청소와 옷정리, 빨래 …그 모두 다 결혼생활에 큰 도움이 되는 ‘스킬’을 장착하고 제대했던 사람들인데, 사람취급 못 받으면서 군복무를 할 때는 잘하다가, 왜 자기가 사랑하는 여자랑 같이 살면서는 못하는 걸까.
남자선배의 말이 떠오른다.
‘내가 청소하려고 했는데, 청소하면 성에 안 찬다고 걔(아내)가 다시 하더라고.’
‘내가 설거지하려고 했는데, 먼저 하더라고’.
기다림의 문제인가.
기준 standard의 문제인가.
4. 그럼 난 어떤 태도로 결혼생활을 대하고 있나?
나와 아내는 ‘한 몸’이다.
눈, 코, 귀, 입, 손, 발.. 모두 중요하지만 다 다른 역할을 한다.
한 ‘팀’이다.
같은 직장에서 같은 보수를 받는 동료 직원으로 생각하게 되면 왜 ‘같은 대우’를 받지 못하느냐 -라는 것에 예민해질 수 있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스포츠팀의 비유가 좀 더 적절하다.
농구로 설명하자면, 두 사람이 같은 ’ 포지션‘을 할 수 없는 경우가 많다는 거다.
5명 다 센터로 구성된 팀이라든가, 5명 다 가드로 구성된 팀 (… 이건 요즘 유행하는 ‘스몰볼 라인업‘에 가끔 나오긴 한다)은 이상하다.
누군가는 좀 더 리바운드를 하고, 누군가는 3점 슛을 쏘고, 누군가는 돌파를 하고, 누군가는 스크린을 걸어주고, 패스를 하고, 그렇게 해서 득점을 하는 거다.
‘누가 밖에서 돈을 벌어오는가-’ 같은 경제적인 촛점만 가지고 ‘가치’를 비교하면 “극복해야 프레임” 안에서 싸우는 게 된다. 돈만 중요한 게 아닌데, 돈만 보면서 누가 더 큰 희생을 하고 있는지 비교하면 서로 불행해질뿐이다.
아무리 섬세하고 꼼꼼하고 자애롭고 여성적인 남성이라도, ‘출산’과 모유수유를 대신할 수 없다.
여기서부터 시작하면, 남자는 그걸 대신할 수 없는 만큼, 다른 쪽에서 더 분발할 필요(혹은 의무)가 있는지도 모르겠다.
아내가 푸시업을 3개 (.. 이것도 비현실적이지만) 할 수 있다면, 남자는 10개는 할 수 있는 근력차이가 있다.
그럼 그 체력으로 더 할 수 있는 걸 하면 된다.
내가 힘이 더 세니깐, 내가 키가 더 크니깐, 내가 더 꼼꼼하니깐, 내가 더 소통을 잘하니깐 -
자신의 특성을 인지하고, 그걸 바탕으로 자신의 역할을 찾아가면 되는 게 아닐까.
아이가 하나일 땐, 출산과 수유하는 게 너무 고생스러워 보여서, 모유수유를 제외한 거의 모든 걸 내가 했다.
(요즘 조정석 님이 애를 그렇게 봤다는 인터뷰 내용을 봤는데, 마치 내 모습 같았다)
심지어 첫째 아이가 두 돌이 될 때까지 아내가 아기 목욕을 시켜본 적이 거의 없다.
그때는 코로나19로 재택근무 하던 시절이니 그게 가능했다.
아이가 둘이 되니 어쩔 수 없는 분담률이 좀 달라지긴 했다.
두 아이 목욕은 계속 내가, 아이들 식사 준비는 아내가, 우리 식사준비는 내가 (포장 혹은 배달….).
설거지는 서로 하고 싶어 했다.
그때는 이어폰으로 뭔가 들으며 (아내의 경우, 보며) 아이들을 등지고 있을 수 있으니.
아이들과 코로나19를 겪으며, 내가 첫째를, 아내가 둘째를 재우는 분담이 시작되었고,
셋째 출산 후에는 내가 첫째, 둘째를 재우고, 아내가 셋째를 재우는 분담 중이다.
아직도 첫째, 둘째 목욕시키는 걸 담당하고 있는데, 여자아이들이다 보니 엄마가 씻기는 게 좋지 않을까 - 고민되어 요즘 들어 ‘양보’하고 있다.
그리고 화장실에서 ‘무서워-’ , ‘뜨거워-‘, ’으앙-‘ 소리를 들으며,, 밖에서 ‘터프한’ 엄마와 샤워하며 또 어떤 트라우마가 생길까 걱정하고 있다.
그런 트라우마가 생기면, 또 그걸 극복하는 건, 조던 피터슨의 심리학 강의 2학기 분을 다 들은 아빠가 …
옷 입는 것, 머리 감는 것, 목욕하는 것…. 휴우
5. 어떤 사람들은 ‘아내에게 좀 더 많이 맡겨도 되지 않을까?’ 넌지시 말하기도 한다.
내가 없을 때, 내가 못할 때, 아내가 많이 하니깐.
아내보다 내가 정신력이 강하니깐.
내가 더 많이 분담해도 된다고 생각하는 이유는 계속 찾을 수 있다.
물론 아내가 자기 영역으로 선포한 주방(요리)에 대해서는 존중해주고 있다.
아니, 요리까지 내가 진출하면 아내가 정말 ‘오빠가 다 잘하니깐, 난 그냥 쉴게’로 나올까 봐 …
일부러 몸을 사리고 있다.
제품명, 레시피를 읽지 않고 감으로 요리하고 있는 사랑스러운 그녀를 볼 때…
요리는 재능이 아니라 성격이 반영된다는 걸 요즘 들어 깨닫고 있다.
나에게 요리는 과학.
정확한 양. 온도. 시간.
레시피대로….
하지만 그녀는 좀 더 낭만적인 어프로치를 한다.
군대 밥도 맛있었던 미각이 둔한 나는 사실 다 맛있다. 괜찮다.
아이들도 나처럼 뭐든지 잘 먹는 사람으로 잘하는 것에 기여할 것이기 때문에 이 또한 감사하다.
6. 요즘 아내와 자주 부딪히는 부분은 ‘우선순위’
아내에게는 시각적 깔끔함이 굉장히 중요하고, 난 화학적/생물학적 위생이 중요하다.
아내는 아이들이 어질러놓은 장난감들을 정리할 때, 이사 후 청소하듯 한쪽으로 모든 걸 몰아놓고 시작을 한다.
그 과정에서 서로 다른 분류의 장난감과 책들이 혼재되어 한 더미가 된다.
나는 그 혼란 속에서 분류에 따라 장난감들을 제자리에 복귀시키는 전략을 취한다.
아이들의 수면시간이 다가오면 과감히 정리를 하는 걸 포기한다. (어차피 내일 또 꺼낼 거잖아!)
아내는 ‘지금 당장’ 깔끔한 상태를 즐기고 싶어 한다.
나는 ‘지금 당장 치우는 속도가 느리더라도, 아이들이 스스로 치우는 걸 가르쳐야 해’ 라며 아이들의 참여율을 높인다.
그래서 처리 속도가 느리다.
아무튼 우리는 꽤나 다른 사람이란 걸 삶의 여러 영역에서 깨닫는다.
자라온 환경이 다르고, 걸어온 길이 다르고, 아는 게 다르고, 할 수 있는 게 다른 두 사람.
그럼에도 우리는 하나의 가정을 이루고 서로 사랑하며 아이들을 잘 키워보려 노력한다.
7. 서로 다른 장, 단점이 있으니, 서로 잘하는 걸 하자-라는 어설픈 결론은 싫다.
이건 누군가가 계속 더 힘들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가는 핑계가 되기 쉽다.
서로의 장점이 있으면, 서로 상대방의 장점을 닮아가는 게 상향평준화 아닌가.
근데 또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과 그러고 싶지 않은 사람의 조합이라면, 그게 또 피곤하겠다는 건 알겠다.
요즘 들어서는 서로의 단점을 닮아가는 하향평준화가 진행되어 가고 있는 것 같기도 한데……
우리 인류(?)는 언제나 그랬듯이 이 문제를 극복해 나갈 것이다.
아무튼, 서로의 수고를 잘 알아주며, 배려하며, 사이좋게.
유치한 결론 같지만, 많은 정답은 유치해도 괜찮다고 생각한다.
어느 누구도 우리를 서로 결혼하라고 등 떠밀지 않았다.
우리 두 사람의 자발적인 선택으로 서로를 배우자로 맞이했고, 세 아이를 이 세상으로 불렀으니 그에 상응하는 노력을 해야 하는 게 당연하다.
더 이상, ‘포기할 수 있는 삶’의 소유자가 아닌 거다.
그래서 1:99부터 49:51까지 다 ‘괜찮은’ 분담률의 범주 안에 포함시킬 수 있다.
우리가 유지하고 있는 삶은 그만큼의 가치가 있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