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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빙산 Apr 19. 2024

육아의 관점에서 바라본 유전적 허무주의와 '재능론'

과학과 철학을 구분해야 하는 이유

1. 최근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과학 프로젝트를 위해 이런 저런 조사research 중 알게 된 생리학자 데니스 노블(Denis Noble) 교수님.


그가 참여한 토론과 강연을 듣다가 궁금한 부분이 있어 간단한 자기 소개, 내 육아철학 중 한 구석을 차지하는 ‘유전적 허무주의’에 대한 경계, 또 리처드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보다 훨씬 더 나은 메시지를 전해줘서 감사하다는 인사를 담아 메일을 보냈다.


그랬더니 하루도 지나지 않아 답장을 받게 되었다. (이번 글 커버로 사용)


답장을 받을 거라는 확신도 없이 그냥 보냈던 터라 의외의 감격과 감동이 있었다.


학자의 집안에서 태어난 게 아니라 재단사의 아들로서 생리학자가 된 사람이라서 겸허한 마음이 아직도 있는 걸까. 내가 '없는 집안'에서 자라서일까. 이런 배경의 사람들을 좋아하게 된다.


젊었을 때 하던 연구에서 발견한 유전자의 특이한 현상이 학계 패러다임에 맞지 않아 거센 비난을 받아 연구를 중단했지만, 노년에 그 연구 결과로 노벨생리학상을 수상한 바바라 맥클린톡 (아래 사진).  

그녀의 발견(Jumping Gene)을 토대로 시작된 후생유전학(Epigenetics)과 그걸 토대로 확장된 시스템생물학(Systems Biology). 유전자가 모든 걸 결정한다는 학계의 패러다임에 반反하는 연구결과들을 토대로 시작된 학문이다.


노벨생리학상 수상자 바바라 맥클린톡



데니스 노블 교수는 찰스 다윈은 절대로 ‘신다윈주의자Neo-Darwinist’가 되지 않았을 거라며, 현재 대중들에 의해 사실처럼 받아들여지고 있는 '다윈주의 진화론‘에 대해 비평한다. 그는 여러 실험결과들을 통해 유전자가 모든 걸 결정하는 게 아니라는 주장을 한다. (심장의 박동수를 결정하는데 큰 기여를 하는 유전자를 확인하고, 그 유전자를 없애도 심장박동수가 변하지 않는다는 실험)


 

진화론을 비평한다고 하면 흔히 종교인으로 오해하기 쉽지만, 그는 진화론자이며 종교가 없다.

(한국을 방문했을 때는 템플스테이를 하기도 하고, 불교철학에 매력을 느낀다고 말한바가 있긴하다.)



2. 만3세의 첫째 딸. 올해 3월부터 유치원 생활을 시작했다.

난 하필 애착이론 전문가와 트라우마 전문가가 함께 쓴 책 ’아이의 손을 놓지마라 (원제:Don’t let go of your kids)’ 에서 애착이론을 접하게 되었다.


유치원 같은 보육시설에 가능한 늦게 보내고 싶었다. 할 수 있다면 홈스쿨을 하고 싶었지만, 출근을 하는 아빠로서 아내의 자발적인 의지가 없이는 시도할 수 없는 도전이었다.


우리 아이들을 공교육시스템에 맡긴다는 게 아이들의 교육을 ‘외주화‘하게 된 것처럼 느껴졌다.

눈 앞에서 있는 ‘실체’가 아닌, 선생님이 ’밴드‘에 올려주는 사진 몇 장들을 보며 ’잘 지내는구나‘ 하고 믿어야한다.

어떤 음식을 먹는지 볼 수 없이 식단표에 있는 텍스트로 뭘 먹었는 지 안다고 생각해야 한다.

가정에서 우리가 가르쳐 준 것 외에도 다른 문화, 다른 가치관을 가진 가정에서 자란 아이들의 언행을 배워오기 시작한다.

옳고 그름, 갈등해결 방법, 삶 속에서 중요시 해야하는 것들 등 여러 가지를 교육기관의 ‘권위자’인 선생님들을 통해 배워 오기 시작하는 거다.


24시간 중, 자는 시간 8시간, 낮잠을 포함하면 10시간 정도. 남은 14시간 중 부모와 함께 하는 시간은 점점 줄어들거고, 학교에서 선생님과 또래들을 통해 배우는 것의 비중이 점점 늘어날 거다.


어쩔 수 없이 맞벌이하는 부부에게 큰 위로가 될 ‘절대량 보다 질quailty이 중요하다’ 라는 이야기를 하는 콘텐츠도 SNS에서 본 적이 있다.

하지만 ‘시간’은 절대량이 영향을 미칠 수 밖에 없다. 부정하고 싶어도 그게 사실이다.

대부분의 아이들이 자기와 더 시간을 많이하는 양육자와 더 친밀할 수 밖에 없다.


(아이들에 적용할 때 간과하기 쉽지만, 성인들의 관계에 적용시키면 뭐가 문제인지 확 다가올 거다.

어떤 부부가 평일 5일 간 얼굴도 못 보고, 대화도 안하다가, 주말에 2시간 ’고퀄high-quality’의 데이트를 한다고 해보자.

매일 얼굴을 보고 대화 하고 안아주고 같이 잠자리에 들고 일어나는 부부와 어느 부부가 더 친밀하겠는가?)


그저 친밀함에 영향을 미치는 게 아니라, ‘권위authority‘ 혹은 ’지향성orientation’의 관점에서도 그렇다.

아이들에게 부모가 아니라 ‘타인’이 말하는 게 더 옳다고 느껴지기 쉽게 하는 삶이 시작되려 하는 거다. (’실제로 유치원 선생님 말은 잘 듣는데 집에선 안 들어요‘ 하는 “육아동지”들의 말을 종종 듣는다)


엄마 아빠가 가르쳐준 것들 대신 또래들이 하고 허용되는 것들이 새로운 기준이 되서 ‘덮어쓰여진다’.



3. 그 중에서 우선 피하게 하고 싶은 것 중 하나가 바로 그 ‘유전적 허무주의(Genetic Nihilism)’로 이어지기 쉬운 ‘재능론’이다.


지금까지 만난 모든 학부모들은 ‘자질’, ‘성향’이란 단어를 쓰며 궁극적으로는 ‘재능’과 ‘유전’을 이야기했다.

모두가 아이의 자질을 빨리 발견해서 그 ‘재능’을 키워주는 것이 성공하는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회사에서 누군가에게 주워듣고 ‘너 4개 국어한다며?’ 하고 질문을 받으면 마치 내가 ‘어학천재’인 것처럼 오해받는 것 같아 늘 부담스러웠다.

특별히 뭘 외우는 걸 잘하지도 않고, 외우려고 노력하는 걸 즐기진 않았다. 하지만 꾸준했고, 지루하지 않도록 재미있는 것들을 통해 외국어에 다가갔다.

중국어는 생존을 위해서, 영어와 일본어는 재미있는 ‘쉬는 시간’을 통해서 늘려갔다.


물론 어느 시점엔 시험을 통해 객관적 평가를 받기 위해 문제집을 통해 공부를 하는 시간도 가끔 있었지만, 대부분 ‘놀면서’ 했다. 그런데 그 ‘노는 시간’이 많았다.

중학교시절부터 지금까지 소비한 콘텐츠 중, 한국어 콘텐츠가 차지하는 비중은 5-10% 정도 밖에 안 될 거다.


그 말은 대학생활과 군생활 할 때, 모두가 ‘무한도전’, ’1박2일‘을 보던 시간에도 난 다른 외국어콘텐츠를 즐기고 있었다는 거다.

물론 그래서 어떤 대화에 끼지 못했을 수도 있고, ‘동질감’을 느끼지 못했을 수도 있지만, 그게 내 “외국어능력”과 맞교환 한 거라고 생각한다.


농구나 기타도 마찬가지이다.

뭔가 천재적 재능이 보여서가 아니라, 재미 있었고, 꾸준히 연습했다.

처음부터 잘했냐고 하면 당연히 아니고, 얼마나 연습하고 나서 잘했냐고 하면 정확한 답변을 하기 어렵겠지만, 난 연습을 즐겼다.


평범한 개인의 사례는 그다지 근거가 되지 못하니 유명한 스포츠스타들을 생각해보자.


마이클 조던(Michael Jordan), 코비 브라이언트(Kobe Bryant), 김연아.

(코비 브라이언트는 매일 새벽 5시부터 저녁 7시까지 훈련했다)


이 사람들은 굉장히 엄격한 자기관리와 어마어마한 ‘연습벌레’로 알려져있다.

‘재능’만 있었더라면 그들은 결코 지금의 자리에 오르지 못했을 거다.


환경(부모의 안목/관찰력, 의식), 교육자/지도자의 역량, 개인의 노력, 그리고 천부적 재능.

대충 생각해봐도 결국 4가지 팩터가 있다. 그 비율을 몇 대 몇으로 정하는 건 과학적으로 가능할까?



4. 분명 재능이란 건 존재할 거다.

하지만 ‘재능’만으론 부족하다는 게 사실인 만큼, ‘꾸준히 노력할 수 있는 것도 큰 재능’이다.


나이가 어릴 때는 더더욱 그렇다.

아직 덜 발달했고, 미숙해서 서투른 걸 “재능”이나 “자질”, “유전”의 시선으로 볼 필요는 없다.


그게 사실이 아니더라도, 그렇게 믿고 살아가는 게 훨-씬 낫다고 생각한다.

적어도 "재능론"을 믿지 않아야 성급한 포기, 잘못된 예단을 피할 수 있다.

재능론을 믿지 않아야 최선을 다할 마음 가짐이 생긴다.

최선을 다해봐야 후회하지 않는다.


육아동지들(?)의 수다의 현장에서 귀에 들려오는 이야기는


"어머, 나 닮아서 수학머리가 없나봐"


-(속으로) 아니에요, 어머니. 처음부터 수학을 좋아하는 아이는 극히 드물어요.


"제가 영어를 못해서, 우리 아이도 영어 못할까봐 걱정되요."


- (속으로) 어떤 한반도 출신이 영어를 잘하는 '유전자'를 가지고 태어날까요...? 그 집 아이, 입양되서 미국에서 자라면 영어 잘하게 됩니다.


"아이가 나 닮아서 공부하는 걸 안 좋아하나봐요"


-(속으로) '세살짜리 남자아이에게 앉아서 공부하라고 하는 건 생물학적 본능을 거스르게 하는 것일 뿐입니다.'


"애들이 나 닮아서 운동신경이 없나봐"


-(속으로) '어렸을 때 개발하면 운동신경을 평균치까지는 올릴 수 있지 않을까요. 시냅스들을 자꾸 연결시키면 지름길이 생깁니다.. '


듣다보면 안타까움과 답답함이 쌓여간다.



5. 요즘 세상에 존재하는 많은 오해 중 한 가지이다.


20세기, 다윈의 진화론을 바탕으로한 사회진화론과 우생학이 발전하고, 왜곡된 니체의 글을 통해 군인들의 정신을 '가다듬었던' 나치독일이 유럽인들의 삶을 피폐하게 만들었다.


생물학적으로의 진화론과 철학적으로 진화론이 시사하고 있는 걸 잘 구분해야 한다.

생물학적으로 유전학이 설명할 수 있는 건 아직 제한적이기 때문에 후생유전학과 시스템생물학이 생겼다.


안젤리나 졸리 효과 (Angelina Jolie Effect)가 화두가 되었던 때가 있다.

BRCA1 유전자 변이를 가지고 있어서 '유방암이 발생할 확률이 87%, 난소암이 발생할 확률이 50%' .

영화배우 안젤리나 졸리(Angelina Jolie)는 그래서 아무 증상이 없는 상황에서 유방절제수술을 받았다.


어머니께서 유방암으로 돌아가셨으니 정서적으로는 공감이 된다.

하지만 그게 과학적인 선택이었을까?

아니면 지금의 학계 패러다임에 국한되어 널리 알려지지 않아, 부족한 지식을 근거한 판단이었을까.


많은 부모들은 과학으로서의 '유전학'이 아닌 '유전학적 허무주의'란 철학을 바탕으로 아이들의 숨겨진 재능의 싹을 자르는  '잠재력 절제술切除術'을 잘못 시행하고 있는 건 아닐까.


대기만성(大器晩成, 노자의 <도덕경> 41장 중)이란 말을 새겨야 할 때다. 영어로 하면 '늦게 피는 꽃', Late Bloomer.


알버트 아인슈타인(Albert Einstein)도 공무원 생활을 하다가 자신의 '재능'을 발견했다.

지금은 대작가된 스티븐 킹 (Stephen King)도 처음부터 작가로 먹고 살 수 있었던 건 아니다. 청소부, 주유소, 세탁공장, 영어교사 생활을 하다가, 아내의 격려를 통해 쓰레기통에 처박아 둔 소설 <캐리>을 판매하게 되고, 거기서 커리어가 시작됐다.


물론, 어렸을 때 재능을 발굴하면 좋다.

그렇게 성공하는 사람들도 분명 있다.


하지만 우리 부모가 '조기발견'이란 목적을 가지고 '메스(수술도)'를 들고 있다면, 성급한 판단을 하기 쉽지 않을까. 그게 본인의 성격이라면, 아이를 위해서 뭔가를 해보려 하는 거지만, 사실은 본인의 조급함이 아이의 미래에 영향을 미치는 '예단'을 한 게 되기 쉽다.


우리가 '어차피-'로 시작되는 단순한 판단을 경계해야 하는 것만큼이나 '유전적 허무주의'를 조심해야 하는 이유이다. 그걸 극복해내면 비단 우리 아이들을 바라볼 때만이 아니라, 우리 자신을 바라보고 새로운 가능성과 잠재력을 찾아낼 수 있을 거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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