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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빙산 May 09. 2024

널 떠나 보내기엔 아직…

유치원에 늦게 보내고 싶었던 아빠의 걱정, 현실이 되다.

새코너(?) Writier’s Now:

오늘도 아이들을 재우다 잠들어 집에서 유일하게 씻지 못한 자로서 새벽에 깨어 아빠의 마음을 기록합니다.
멋진 작가님께서 글도 읽어주시고 칭찬해주시고 구독도 해주셔서 신이 난 새벽입니다


아이의 말

아빠: ㅇㅇ아, 엄마 아빠가 좋아, 유치원 선생님이 좋아?
첫째: 유치원 선생님
아빠: 그럼 유치원 친구들이 좋아, 엄마 아빠가 좋아?
첫째: 유치원 친구들
아빠: … (으아악.. 안 돼!!)


1. 그 날은 예상보다 너무 일찍 찾아왔다.

혼자 걷지도 못했던 때부터 참석한 주1회, 학기제로 운영하는 ‘아기학교’.

다음학기면 만4세로 더 이상 올 수 없으니, 올해가 마지막.

외부체험학습으로 딸기농장에 간 날이었다.


이번엔 내가 휴가를 내고 함께 참석했다.

아내 컨디션도 안 좋고 해서 평소의 ‘아이 셋, 부모 둘‘ 혹은 ’아이셋, 부모 둘, 조모 하나‘ 조합이 아닌, ’아빠 하나 애 둘‘.

아직 가끔 넘어지는 둘째 손을 잡고 걷다보니 혼자 먼저가고 싶은 첫째.

애 둘 보는 아빠가 버거워보였는지 아기학교 선생님이 첫째 아이와 함께 다녔다.  


첫째 아이가 잘 다니길래. 물었다.


‘선생님, 좋아?’

-응


선생님을 면전에 두고 아빠가 좋아, 선생님이 좋아- 는 너무 유치한 것 같아서 당연히 하지 않았다.

애당초 난 엄마가 좋아, 아빠가 좋아? 라는 질문 자체를 싫어한다.


그러다가 점심시간이 되서 이런 저런 얘기를 하다가 첫째에게 물었다.


“유치원 선생님이 좋아, 엄마아빠가 좋아?”


그게 위 대화의 배경이다.

딸기농장의 딸기. (뒤) 둘째



2. 다시, 애착이론


<아이의 손을 놓치마라> (고든 뉴펠드, 가보 마테)에서 새로운 관점을 얻은 이후, 부모와의 애착, ‘부모지향성’을 잃게 되는 것을 늘 경계해왔다.


부모지향성이란 건 태어나자 마자 보게 된 대상을 (자연환경에선 엄마새) 쫓아다니는 본능이다.

쫓아가고, 닮고 싶어하고, 만지고 싶어하고, 사랑받고 싶어하는 애착의 저변에 깔려 있는 본능으로 해석한다.


토론 콘텐츠를 보다가 유튜브에서 알게된 조던 피터슨.

하버드 대학교, 토론토 대학교 교수시절의 심리학 강의​(20강)를 풀영상으로 유튜브에 올려뒀길래 다 들어봤다.

거기서 만 4세전까지 중요하다는 이야기를 새겨들었고, 육아에 대해 서로 다른 노선의 가보 마테도 같은 얘기를 했다.

그래서 최대한 늦게 보내고 싶었다.

(어쩔 수 없이(?) ‘어린이집’부터 보내고 있는 맞벌이부부님들에겐 죄송한 말이지만, 나에겐 ‘어린이집’이란 단어가 학교란 단어보다 ‘천사의 집’ 과 더 같은 뉘앙스를 주기도 했다. )


심지어 아내를 격려/설득하기 위해, 또 모든 걸 다 고려한 후 결정해서 후회하지 않게 하고 싶었기에 ’원노트‘에 장점, 단점, 리스크, 기대효과 ..를 장황하게 나열해서 토론(?)을 하기도 했다. 장점은 불과 3개였고, 10개의 단점에서 다 상쇄되었다. (하지만 장점을 찾는 건 아내가 했으니 불공평한 게임이었다는 건 인정한다. )


하지만 셋째의 출생 이후, 산후조리기간 중인 아내의 심신의 체력저하 등 현실적인 이유로 만3세의 첫째를 병설유치원에 등원시키게 된 지 2개월이 조금 지났다.


3. 적응인가 포기인가

사회성 발달이 지연되는 것에 대한 경계는 사실 거의 없었다.

부모와의 애착이 기반이 되어 타인과 미지의 세계에 대한 탐구를 늘려가면 되는 거라 생각했다.


둘째가 태어나 걷기 시작하니 둘이 놀게 되니 혼자가 아니었던 첫째.

또래 아이들과의 상호작용도 중요하다고 생각해서 1주일에 한 번 있는 ‘아기학교’라는 프로그램을 같이갔다.

또 또래 아이를 키우고 있는 지인들과의 만남도 주기적으로 갖으려 했다.

원래 사교성이 뛰어난 사람이 아니지만 아이들을 위해 노력했다. 더 다가가서 친해지려하고, 집으로 초대하고, 그러다보니 초대받기도 하고.


그렇게 코로나19시대에 태어난 아이 중 보육시설을 다니지 않은 아이 치고는 또래 아이들과의 만남이 결여되어 자라지 않았던 첫째.


덕분에 아빠도 오래 알고 지내던 형, 누나들은 물론 새로 알게된 육아동지 가정들과 새로운 차원의 친분이 생기기도 했다.


무엇보다 어차피 아이는 자아가 발달할수록 부모로부터 독립하려는 성향이 발현될테니

미리 부모가 주도적으로 거기에 드라이브를 걸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부모와의 애착, ‘bonding’이 먼저라고 생각했던 거다.


어린이집에 아이를 보낸 엄마들의 말:

‘아이가 처음엔 힘들어했지만 잘 적응하더라구요’

‘처음엔 가기 싫다고 울었는데 지금은 집에 안 가겠데요“

’요즘도 가끔 가기 싫다고 하면 안 보내요‘


적응.

적응이란 단어가 삶의 목표였던 13살의 나.


아이는 생존만 보장된다면, 어떤 환경에서도 적응한다.

육아대백과사전에서 신생아에게 적합한 실내온도를 이야기하면서 책마다 조금 다른 수치를 권장했다. 22도-24도 였든가.

그 때 든 생각은 동남아, 중동, 아프리카 아이들은 어쩌라고?

아이들은 태어난 환경에 적응한다. 그리고 주어진 환경에 적응한다.


신생아도 적응한다.

엄마 품에 있는 게 좋지만, 떨어지면 슬프지만, 떨어져 있으면 적응한다.

그 때 아이의 뇌, 아이의 ’마음‘에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우리는 정확히 모른다.

코티솔이 생성된다고 해서 정말 스트레스를 받는 건지, 트라우마와 같은 상황인지.

10분 울고, 20분 울고, 1시간 울다 지쳐 잠드는 걸 반복하다가

5분만 울고 잠든다는 그 수면교육.

(나중엔 혼자서 들어가고, 혼자 잔다는데. 요즘 인스타를 보니 또 어렸을 때 그걸 한애들이 3-4살 되서 문열고 나와 무섭다고 한다나.)


프랑스식 육아법을 말하는 책에선 그걸 자는 법을 배우는 거-라고 표현했다.

하지만 어쩌면 그건 포기를 배운 거일 수도 있다.

마테 가보 박사의 견해를 따르면.


기대하지 않는 걸 배운거라는 거다.


어린이집에 가는 아이도 적응한다.

엄마와 떨어지기 싫지만 엄마가 두고 가면 자기가 할 수 있는 선택지는 없다.

싫어도 있어야 하고, ’피할 수 없다면 즐겨랴‘ 라는 말도 배운 적 없지만, 주위의 사람들에게 착着(애착爱着의 착)’붙는 거다‘.

그게 선생님이나 또래 갓난쟁이들.


“집에선 낮잠 자자고 하면 안자요”


우리 부모들 중 일부는 여러 불가피한 상황 속에서 하루 근무시간 만큼 부모로서의 권위를 시설의 보육교사에게 양도했다.

아니, 할 수밖에 없었던 이들도 있을 거다.


그리고 부모로서의 본능은 그게 죄책감이 되고, 아이에게 단호해야 할 상황에 마음이 약하게 하는 걸로 작용하진 않았을까?

그렇게 사랑의 다이나믹이 붕괴되어 육아가 더 어려워지는 걸지도 모르겠다. (지극히 단순화된 모든 해석은 경계해야 한다.)


애착이 근간이 되면 자연스럽게 자신에게 사랑을 주는 대상(부모)를 기쁘게 하고 싶어서 자발적으로 할 지 모르는 행동들.

그게 안되니깐 어른의 기술인 협상, 협박, 회유로 아이들을 조종 하게 되는 건 아닐까.


아마 평생 확신을 할 수는 없겠지만, 그게 가보 마테 박사의 이론으로 바라본 우리의 현실이다.

아, 물론. 나 같이 육아를 위해 수입의 50%를 포기한 아빠가 붙어있어도 만2세-만3세의 ‘반항기’가 오긴 하니깐 상황파악을 잘해야겠다.



4. 유치원에 늦게 보내고 싶었던 아빠


유치원에 보내는 걸 늦추고 싶었던 건, 아직 아이가 스스로 화장실 뒷처리를 못하는 것도 있었고,

그걸 타인에게 맡기는 게 아이가 어떻게 느낄지에 대한 우려가 있었다.


집에서 건강한 음식습관을 들이는 것에 성공했는데 유치원에 보내는 순간 점심을 먹고 오니 여기서 또 리셋이 될 것 같은 것도 아까웠다.

(첫째 둘째가 좋아하는 간식이 아몬드, 캐슈넛, 브라질넛, 호두이고, 당근, 오이, 토마토, 상추, 배추, 청경채 … 고기 편식쟁이 였던 나로선 너무나 자랑스러운(?) 균형잡힌 음식섭취를 하고 있는 아이들. 허락된(?) 과자는 떡뻥류, 인공감미료가 안들어간 것에 한정)


또 아직 부모가 제대로 가르치지 못한 것들이 수두룩한데, 그 위에 또래로부터 배워올 안 좋은 것들이 우리 가정에 미칠 영향도 걱정됐다.


처음에 제대로 가르치는 게 얼마나 중요한지는 언어습득에서부터 알 수 있었다.

한국어 발음이 외국인 치고는 꽤나 자연스러워서 한국출생으로 오해 받기도 하는 아내. 처음부터 이중언어로 키우는게 유리할 것 같아 권유했지만 그녀는 자기 편한대로 하겠다며 한국어를 선택했다. 아내에겐 미안한 표현이지만 ’완벽하지 않은 한국어‘를 소통의 도구로 정한 거다.


그래서 첫째는 만 4세를 앞둔 채로 ’입혀줘‘ 대신 ’입어줘‘ 라고 하고 있고 그걸 따라 만 2세 둘째도 ‘옷 입어줘’ 하고 있는 상황.


옷을 입혀주며 ‘입혀주세요~‘ 하고 교정해보지만 그 때 뿐.


첫번째 인풋이 얼마나 중요한 지 알 수 있었다.

그 외에도  ”(주어)+이/가“를  주로 ㅇㅇ이가로 외웠던 건지, 대부분 ‘이가’를 붙여서 말하는 아내의 습관이 아이들에게 고스란히 전해졌다.

“도둑이가 들어오면 안되니깐”


…아빠가 조만간 한국어교원자격증도 따야겠다. 그럼 엄마가 일하고 싶어할 때, 거기서 아빠가 한국어교사도 하고 영어과외도 하면서 생계에 보탬해야지.


아니나 다를까, 집에서 친구들에게 하는 말투를 엄마 아빠에게 한다.


“내가 먼저 가지고 있었다고~!!”

“아이, 진짜!!”

“아익! 하지마!! “

“… 안놀아!”


‘ㅇㅇ아(첫쨰), ㅁㅁ이(둘째)는 ㅇㅇ의 제일 좋은 친구야’ 하면 끄덕이며 동생을 챙겨주던 모습이 사라지고, 역할 놀이를 하는데 동생이 유치원 친구 ㄷㅇ이 역인 상황도 생겼다.


유치원 선생님

은 굉장히 특수한 존재이다.

애정과 관심을 갈구하는 어린아이들을 다루지만 부모도 친척도 아니고 한 시설의 ‘직원’이다.

그리고 부모의 역할을 경험해보지 못한 20-30대의 경우가 많은 것 같다. 통계를 본 건 아니라 착각일 수도 있다.

그런 이들이 혼자 3-5명, 10명을 ‘관리’해야 하는 상황인거다. 점심시간, 퇴근길에 종종 회사 근처 어린이집 아이들을 데리고 두 세명의 선생님이 열명 이상의 아이들을 인솔해서 다니는 걸 보게 되는데, 늘 불안하다.


아이 다섯을 키우는 친구가 있다. 그집 첫째는 우리집 첫째보다 한 살 많다.


이 문장을 읽는 순간, ’아..힘들겠다‘ 라고 느끼는 게 당연한 반응일 것 같은데, 어린이집, 유치원은 그 이상의 수를 감당해야 한다.

부모조차 ’육퇴‘를 갈망하며 하루를 보낼지도 모르는데, 그들은 얼마나 퇴근을 기다리며 아이들을 돌볼까.


근처 쇼핑몰에 마실 나갔다가 우연히  지인과 팥빙수를 먹고 있는 담임 선생님을 본 첫째. 너무 반가워하며 좋아하면서도 부끄러운 듯 뒤에 숨어서 선생님- 하고 있었는데.


인사하고 지나 친 후, 놀다가도 다시 선생님한테 가야한다면서 징징 대다가, 집에 갈 시간이 되니, 선생님한테 다시 인사하고 갈거라며 다시 선생님이 있던 곳으로 우릴 끌고 갔었다.

다행히 마침 자리에서 일어나고 계신 선생님. 막상 데려가니 또 쭈뼛쭈뼛 인사를 못하고 배시시. 그렇게 뻘쭘한 부모가 선생님께 인사를 하고 주차장에 가는 엘레베이터를 타니, 인사를 제대로 못했다고 돌아가자고 한다. (어디있는 줄 알고?!)

징징대다가 선생님을 집에 초대하고 싶단다.


선생님이 좋은 우리 첫째.


그런데 아이의 애착대상이 부모가 아닌 ‘직원’일 때 생길 수 있는 또 다른 문제가 있다.

직원은 교체가 될 수 있다는 거다. 그리고 그 일이 유치원 2개월 차, 우리 첫째에게 생겼다.


지난 주 금요일, 퇴근 후 13시 하원에 맞춰 유치원에 갔다. 주로 보조 선생님께서 아이를 배웅하러 나오는데, 오늘은 담임선생님이다.


‘아버님, 제가 건강상의 사유로 다음주부터 새로운 선생님이 오실거에요’

-네?  

-ㅇㅇ아, 다음 주부터 새로운 선생님이 오신데.

(별로 반응 없음)


‘안녕히 가세요’


-아니, 안녕히 계세요- 하는 거야.


다행히 첫째 아이는 선생님이 바뀌는 게 슬프지 않은가보다.

목요일마다 아기학교 때문에 빠졌으니 주 4일. 40일의 시간은 충분한 애착이 아니었던 거였을까.


어제 하원 하는 아이를 데리러 갔더니, 새로운 선생님이 오셨다.

물어보니 예전에 계시던 선생님이란다.

아, 안그래도 고등학교 영어교사를 하는 지인이 그런 가능성을 제시했었다.

원래 선생님이 병가를 내고, 임시로 다른 선생님이 봐주신 게 아닐까?



5. 장황하게 설명했으나 예상했던 모든 일은 일어나고 있다.


아이는 떠나보내기 위해 키우고 있는게 맞다.

하지만 언제 떠나보내야 하는가.

얼마나 가르쳐서, 얼마나 준비된 상태로 떠나보내야 하는가.

스스로 배워야 하는 것과 미리 부모의 경험을 전해야하는 것의 구분은?


우리 공교육시스템은 괜찮은가?


조기교육 열풍이 문제이기도 했고, 발달심리학, 교육학에선 '공부'를 하는 건 학교에 가고나서 - 라고 하지만

과연 만3세, 만4세가 반나절동안 '아트 프로젝트' 만 하다 오는 게 과연 맞는 걸까?


엄청난 '흡수력'을 지닌 이 때, 뭘 배우는 게 좋을까.

누구에게 배우는 게 좋을까.


생각 많은 아빠는 고민하며 일출을 맞이한다.

(이제 다시 자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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