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근길

"나는 선택받은 사람이야."

by 사아


“나는 선택받은 사람이야.”

처음엔 비웃었다. 직업도, 돈도, 지위도 없는 명백한 실패자. 그것도 모자라 자기애에 취한 놈. 나는 그를 그렇게 단정했었다.






정확히 언제부터였는지는 기억하지 못한다. 왼쪽 관자놀이 안쪽이 둔하게 울렸다. 처음엔 잠들기 직전에만 왔다. 어느 날부터는 눈을 떠도 꺼지지 않았다. 명치가 답답한 순간도 잦아졌다. 친구들에게 말해 봤다.
“다 불확실한 미래랑 돈 문제 아니겠냐? 다들 그러면서 살아.”
미래는 확실했고, 돈은 충분했다.
상담센터에도 갔다. 상담사는 검사지를 훑더니 경도 우울이라고 했다. 요즘 이 정도 아닌 사람이 없다고, 감기 같은 거라고. 약 봉투를 접어 주머니에 넣었다. 두 알씩 삼킨 날에는 이명이 멀어졌지만, 그 자리에 나른함이 아니라 공백만 남았다.
주말은 약속으로 막아 뒀다. 금요일 저녁부터 일요일 오후까지. 월요일이 되면 대화는 전부 증발했지만 캘린더만 빽빽하면 됐다. 비어 있지 않으면 괜찮았다.
일요일 밤이 문제였다. 마지막 약속이 끝나고 신발을 벗으면 증상이 심해졌다.
새벽마다 검색창에 단어를 갈아 끼웠다. 돌아오는 건 전부 같았다. 네 잘못이 아니다. 그 말이 싫지는 않았지만 내가 원한 건 위로가 아니었다. 그냥 이 소리에 이름이 있는지, 그것부터 알고 싶었다.


돌아온 금요일 저녁, 오래간만에 그를 만났다. 고등학교 때는 꽤 가까운 사이였지만 졸업 후에 연락이 뜸해졌다. 이유가 있었다기보다, 자연스럽게 그렇게 됐다. 그는 내가 통과한 문, 그 언저리에서 서성이는 쪽이었다.
그는 더 깎여 있었다. 핼쑥한 얼굴, 베일 듯 선 턱선, 멋과 지저분함 사이에 걸린 장발.
괜히 셔츠 소매랑 해진 운동화부터 훑었다. 예전처럼 속으로 급을 나눠 보려는 거였다. 끝까지 잘 안 됐다. 지나치게 또렷한 눈빛 때문이었다. 초라해 보여야 할 쪽은 분명 그였는데, 먼저 자세를 고쳐 앉는 건 나였다.
그래서 괜히 말이 삐딱해졌다. 음악 아직도 하고 있냐, 먹고 살 만하냐. 그가 나보다 더 불안하게 살고 있을 거라는 확신이 있었고, 그래서 상담센터 얘기까지 꺼냈다. 나도 가 봤는데 별거 없더라, 는 투로.
그는 어떠한 표정도 짓지 않았다.
“우울증. 그거 각아의 유전병이야.”
뜬금없는 말이었다. 관자놀이 안쪽이 한 번 크게 울렸다. 가르쳐들려는 태도에 기분이 별로였다. 급한 일이 생겼다고 둘러대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카페 문을 밀었을 때 찬 공기가 뺨을 때렸다. 그는 여전히 안에 남아 있었고, 나는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주차장까지 걸으면서 괜히 코트 깃을 세웠다. 각아. 그런 이름이나 붙이는, 지 세계에 취해 있는 인간. 나는 그렇게 정리하려고 했다. 주차장에 도착할 때쯤엔 거의 성공한 것 같았다.
차에 탔다. 아버지가 취업 기념으로 사준 차였다. 시동을 걸고 히터를 올리자 미간이 먼저 풀렸다. 라디오를 켰다.
집에 도착하니 거실에 불이 켜져 있었다. 현관에 신발이 나란히 있는 걸 보니, 다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엄마가 물었다.
“밥 먹었어?”
“카페에서 좀 먹었어. 괜찮아.”
여동생이 숟가락을 들며 나를 흘겨봤고, 아버지는 뉴스를 보고 있었다.
방에 들어가서 불은 켜지 않았다. 어둠 속에서 창문에 기대 섰다. 여의도 야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빌딩마다 빛이 정돈돼 있었고, 한강 위 다리 조명이 줄지어 있었다. 내가 사는 세계는 이렇게 반듯했다.
문득 현관에 벗어 놓은 신발이 떠올랐다. 가지런히 놨는지 기억이 안 났다.
누웠는데 잠이 안 왔다. 새벽 세 시에 검색창을 열고 각아라고 쳤다. 쓸 만한 건 당연히 안 나왔다. 그런 게 검색에 걸릴 리가 없었다. 창을 닫고도 손이 다시 검색창을 열었다. 결국 다시 닫았다.
사흘 뒤 내가 먼저 연락했다. 목요일에 다시 보기로 했다.
같은 카페였다. 자리에 앉자마자 말했다.
“각아?”
사아가 나를 천천히 훑었다. 물기 하나 없는 눈으로.

데미우르고스



(이 소설은 텀블벅을 통해 종이책으로 출간될 예정입니다.)


목, 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