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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블루밍드림 May 03. 2024

우수아이아 '세상 끝에서 길을 묻다' ②

세계여행 에세이: 아르헨티나 우수아이아 (2화)

뜻하지 않은 순간, 머릿속에 찍혀 버린 고정관념의 사진들


"그냥 아무거나. 뭐든 말해도 돼. 마음속의 말도 괜찮고, 행복하지 않은 얘기라도 괜찮아. 내가 세상의 끝에다 버려두고 올 테니까." 보영(장국영)에게서 상처를 받는 아휘(양조위)를 지켜보던 장(장진)은 대만으로 돌아가기 전에 아휘에게 이렇게 말하고는 녹음기를 건네었다.



"1997년 1월 난 마침내 세상의 끝에 도착했다.... 갑자기 집이 그립다. 아휘의 슬픈 일들을 여기에다 버려두고 오기로 약속했는데, 그날 밤 아휘가 무슨 말을 했는지 알아들을 수가 없다. 녹음기가 고장 났는지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어떤 사람이 우는 것 같은 이상한 소리가 날 뿐이다."



영화 '해피투게더'(1997년)를 연출한 왕가위 감독이 이런 말을 했다. "마침내 우수아이아라는 곳을 발견했는데 아주 멋졌다. 그곳은 세상의 끝이었다. 세상의 끝에서 이 영화를 끝내면 되겠다..."


아휘와 장이 그려준 세상의 끝에 대한 '바람직한' 모습은, 아마도, 매일밤 각기 다른 사연에 뜬눈으로 꿈을 꾸는 수많은 이들의 로망이 되고, 동경이 되었을 것이다.




세상의 끝을 찾아 나도 떠났다


부에노스아이레스 공항을 이륙한 아르헨티나항공 비행기는 서울에서 홍콩까지의 비행시간만큼이나 날아서 리오그란데 공항에 착륙하였다. 우수아이아 공항으로 바로 가는 편리한 방법을 마다하고, 순례자인양 굳이 티에라델푸에고의 험준한 산맥을 넘어 우수아이아로 입성하려는 허튼 짓거리였다.


티에라델푸에고(Land of Fire). 거대한 버려진 땅이었다. 칠레와의 국경을 1880년에야 그었고, 1902년부터 죄수들을 동원해 정착촌을 건설했다. 기업에는 세금을 감면해 주고, 근로자에게는 임금을 올려주는 식으로 본토 주민들을 이주시켰다. (칠레 쪽은 만명도 살지 않고, 푼타아레나스가 땅끝 역할을 담당한다.)


우수아이아엔 공장들이 들어섰고 많은 주민들이 그곳에서 일한다. 원래 낭만과는 거리가 먼 그런 땅이었다.


(출처 : WorldAtlas.com)


일이 터졌다. 리오그란데에 내리자 왼쪽 옆구리가 아파와 서 있기도 힘들었다. 어찌하여 병원을 찾았더니 여의사가 결석 같다며, 난 병원에서 엉덩이 까는 방법을 잊어버린 지 오래다만, 굳이 바지를 내리게 하고 주사를 놓았다. 한국 가면 병원에 바로 가 보랬는데, 그 후로 같은 부위가 아픈 적이 없다.


통증이 가시자, 변방의 작은 도시 같지 않게 파인다이닝 분위기 살짝 나는 Nistro Resto Bar에 들러 우아하게 요기를 한 후, 세 시간은 족히 걸릴 우수아이아를 향해 출발하였다.



황량한 평원을 지루하게 가로지르는 길을 한참을 달려, 동서로 뻗은 길이가 98km나 되는 원시의 파그나노 호수(카미 호수) 동쪽 연안의 작은 마을 톨후인(Tolhuin)에 다다랐다. 트레킹 아니 하이킹이라도 하러 눌러앉고 싶었지만 갈 길 먼 여행객에게는 가진 시간이 부족했다.


멀지 않은 카이켄(Kaiken) 호스테리아에 들러, 텅 빈 식당 햇살 좋은 창가에 자리 잡고서, 창너머 거대한 호수를 벗 삼아 커피 한 잔으로 내 머릿속도 텅 비워버렸다. (A cup of coffee heals everything.)



눈 덮인 산들을 넘어서야 했다. 그렇게 두 시간여 더 달려야 했다. 기세등등 남(南)으로 뻗어내려온 안데스 산맥이 티에라델푸에고 땅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겸손해졌다. 그래도 산속은 한겨울이고 눈길 닿는 곳 어디도 백설이 덮이지 않은 데가 없다. 안데스가 가진 기개만큼은 잃지 않은 것이겠다.


파소 가리발디(Garibaldi Pass)를 넘다 보니 에스콘디도 호수가 내려다 보였다. 떠나온 한국은 뙤약볕 내리쬐는 한여름일 텐데, 난 한참을 8월의 크리스마스 감성 속에 서 있었다.



산 넘고 물 건넜더니 우수아이아에 도착하였다.


우수아이아 Free Image



낯선 땅 세상의 끝에서 외로운 여행자이고 싶었다


잔뜩 찌푸린 날의 늦은 오후 우수아이아는 이 땅을 먼저 찾은 왕가위 감독의 말처럼 으스스하고 을씨년스럽기만 했다.


흔한 관광지 안내판, 아니 Fairy Tale 같은 '세상의 끝'을 알리는 'Fin del Mundo' 안내판 앞에서 기념사진부터 찍었다. 세상의 끝에 드디어 도착했다는 중대한 사실을 스스로 재확인하는 승리의 세리머니였다.


하지만, "세상의 끝까지 와버렸다. 이제 어디로 가야 하지?!"라는 준비된 멘트를 비장하게 내뱉어야 할 순간을 완벽하게 놓치고 있었다. 외롭지가 않았다. 진실된 세상의 끝이 아니란 듯이 말이다.



인적 끊긴 바닷가 보통의 식당에서도 킹크랩을 맛볼 수 있었다. 미식이 주는 기쁨으로 인해 그간 잘 길들여지고 훈련 잘 된 '세상의 끝' 감성이 한순간 본성을 잃고 반짝반짝 빛나는 새로운 무언가로 변질되어 버렸다.


킹크랩에 홀린 사이 창밖으론 폭설이 내리기 시작하였다.



긴 하루 지친 몸을 하룻밤 뉘일 숙소를 항구가 내려다 보이는 Arakur Ushuaia 리조트 너무 멋진 곳으로 잡은 것 또한 패착이었다. 자본주의의 산물과 세상의 끝 감성 간의 괴리를 깨닫는 것은 너무 쉬운 일이었다.


우수아이아의 눈 내리는 밤에 나는 생각을 정리할 겨를도 외로울 기회도 없었다.



자유로워지기 위해서다. 그런데, 그 대상을 모르겠다


아늑한 침대에 누워 잠들기 전 잠시 "침대에 홀로 누워 규칙적으로 반복되는 벽지 무늬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호텔의 벽지를 기억하는 사람은 한없이 외로운 여행자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라는 어느 여행 소설의 한 대목을 기억해 내었다. 왜 그랬는지는 나 자신도 잘 모른다.


 '내일 항구에서 보트에 올라 비글해협 그 유명한 등대를 찾는다면 어떤 기분일까?'라고 생각했다. 그리고는 이내 잠이 들었다.





다음 편에서 세상의 끝 우수아이아 마지막 이야기가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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