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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블루밍드림 May 05. 2024

우수아이아 '세상 끝에서 길을 묻다' ③

세계여행 에세이: 아르헨티나 우수아이아 (최종화)

세상 끝에서의 이튿날. 밤사이 눈이 그쳤다. 그래도 여전히 잔뜩 흐린 날이다.


이과수 폭포를 포기하고 우수아이아로 올 만큼 세상의 끝에 대한 로망과 동경과 기대는 무척이나 강렬했다. 그런데, 내가 간과한 게 있는 듯하다.


세상의 끝 바닷가에 서 있어야 할 사람은 찢어진 청바지와 땀에 젖은 티셔츠에, 해진 배낭을 둘러 맨 젊은 날의 나. 하지만, 정작 이 아침 고급 호텔의 눈 덮인 정원에서 멀리 우수아이아 도시 전경을 내려다보고 있는 이는 이제는 젊다고 할 수 없는 아저씨이다.

  



상처는 소리 없이 아문다


가족 누군가 우울증 병을 앓는다면, 그건 가족 모두에게 지옥이(었)다. 술에 취하고, 비뚜로 나가는 짓을 하고, 또는 지쳐버린 무관심으로 각자 치유하려 든다면, 그건 스스로 갇힌 무간지옥이(었)다.


지옥을 지옥인 줄 모르고 "서울대 가라" 기대와 요구만 있을 뿐이다. 맥 빠진다. 야간자율학습이면 이놈 저놈 비싼 오디오 강의 귀에 꽂고 앉았고, 난 카세트테이프 음악이나 들으련다.


대학 입시시험 전날 학교 앞 문방구에서 중고 화학 문제집 한 권 사서 풀어본다.


친구 놈 대학 원서 쓰다가 담임에게 한 소리 듣는다, "재수해서 서울대 가야지." 내겐 같은 말을 하지 않는다. 둘은 같은 대학에 입학한다. 재수 없다.


오래 버텼다. 회사 부서 야유회 날, 고기 굽다가 우울증의 결말을 통보받는다. 눈물은 흐른다. 이건 다시 팔열팔한(八熱八寒)지옥이다.


결혼을 앞두고 분가할 집 계약까지 마쳤는데, 다 무른다.



    


자유로워지기 위해서다. 그런데, 그 대상을 모르겠다


뜻밖의 행동을 한다. 호텔 컨시어지에게 차 한 잔 마실만한 멋진 곳을 묻고는, 마르티알 빙하(Martial Glacier) 쪽으로 가 보기로 한다.


택시에서 내린 곳은 쿰브레스 델 마르티알 산장(Cumbres del Martial - Villa de Montaña). 주위는 온통 은세계다. 아닌 게 아니라 멋진 곳이다. 순간 이동이라도 해서 오스트리아 어느 시골 마을로 들어온 듯 착각에 빠진다. 지나쳐온 우수아이아 풍경은 금세 잊어버린다.



이른 아침의 카페는 손님 한 명 보이지 않고, 이런저런 차와 커피를 소개하며 낯선 손님은 무엇을 주문할까 기다려보는 메뉴판이 탁자 위에 놓여 있을 뿐. 정적이 흐른다. 여름이라면 빙하 트레킹하는 사람들로 무척이나 북적거릴 것이다.


"바람 속으로 걸어갔어요. 이른 아침에 그 찻집. 마른 꽃 걸린 창가에 않아 외로움을 마셔요." '그 겨울의 찻집' 노랫말을 바로 여기로 옮겨온 듯하다. 갑자기 집 생각이 난다.



카페를 나와, 구름 사이로 간간이 보이는 푸른 하늘로 인해 군데군데 반짝거리는 멋진 도시를 내려다본다. 이제야 보이는 세상의 끝 풍경.


살아가면서 만나는 모든 것에 시작이 있고 끝이 있다면, 끝으로 알고 찾아온 이곳에서 사는 사람들에게도 과연 이곳은 끝일뿐일까...

 


한참을 굳은 채 서 있다 보니 한기가 스며든다. 다시 도시로 내려갈 시간이 되었다.


역시나 호텔에서 일러 준 점심 먹을 멋진 곳 Kuar 레스토랑으로 향한다. 바다와 맞닿은 넓은 창 너머로 비글 해협의 검은 바닷물이 일렁이고, 바다 위로는 갈매기 서너 마리가 낮게 난다. 멋진 곳이다. 갈매기 마리 수를 세고 있는 여행객은 외로운 이라고 할까 애써 외면해 본다.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그랬던 것처럼 마블링 하나 없는 아르헨티나 소고기를 썰고, 풀 바디 짙은 탄닌의 말벡 와인을 마신다. 다시는 못 그럴 것 같아 일부러 그래 본다.



창 너머로는 때아닌 짙은 해무가 시야를 흐린다. 레 에끌레르 등대를 감추어 보여 주지 않을 요량이다. 그래도 나는 이미 알고 있다, 등대를 숨긴 세상의 끝 우수아이아의 모습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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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피투게더의 아휘(양조위)는 왜 아무 말도 녹음하지 않았을까?' 생각해 본다. 어쩌면 쓰리고 아픈 상처를 세상의 끝에 폐기할 것이 아니라, 상처가 아물고 그 위로 새 살이 돋아 나도록 스스로의 의지로 치유하려 하지 않았을까.



자유로워질 수 없는 상처, 미래가 과거를 바꾼다


"꽃이 피려면 줄기는 땅이 아닌 해를 향해 솟아올라야 한다. 내가 어떤 꽃으로 피어날지는 과거가 되어가는 현재와 현재가 되어가는 미래가 알려줄 것이다." 어느 정신건강전문의의 글 속에 나오는 말이다.


회사에서 무언가 뒤쳐지는 느낌이 들 때마다, "그때 공부를 제대로만 했으면", "부모 잘 만나 제대로 지원받았더라면", "지원은 고사하고 마음이라도 편했더라면", 과거를 향한 원망만 키우며 현실에 적응하지 못하고 있었다. 경쟁이라는 수직적 위계 속에서 누군가 내 아래에 있다고 느끼면 오만해지고, 반대로 누군가 내 위에 있다고 느끼면 열등감에 사로잡혔다. 그렇게 내 영혼은 과거에만 상처를 입은 것이 아닐진대, 모든 원망은 과거로만 향했다.


"단물 다 빠진 껌처럼 되어 버린 과거를 곱씹는 것보다는 상상일지라도 미래를 언어로 그려보는 편이 훨씬 낫다."라는 그 정신건강전문의의 말이 세상의 끝에서 물어보려던 '길'이 아닐까.


자유로워지려 하지 말고 그냥 그대로 인정하기로 한다. 아휘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을까.


레스토랑 창 너머 눈발이 흩날리더니 점점 커진다. 부에노스아이레스로 돌아갈 비행기 시간이 머지않았는데 폭설이라도 될까 걱정이 앞선다.


비글 해협 외로운 섬의 세상의 끝을 비추는 등대는 가지 않기로 한다. 버리고 올 게 없다.


아니나 다를까 폭설이다. 비행기는, 다행히도, 눈발을 뚫고 부에노스아이레스를 향해 날아오른다.


이제 다시 삼만리를 날고 날아 집으로 돌아갈 시간이다.

  



에필로그: 아스토르 피아졸라의 탱고 곡 '망각(오블리비언, Oblivion)'으로 세상의 끝 등대 역할을 대체해 보려 한다.


https://youtu.be/Z0DQxI3KM7o?si=7__5L087XdUtnkz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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