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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블루밍드림 May 17. 2024

백파이프 선율은 글렌을 따라 흐르고 ①

세계여행 에세이: 스코틀랜드 (1화)

비행


햇살이 눈부신 5월의 어느 날, KLM 항공기가 에든버러 공항 활주로에 내렸다. 기체가 크게 흔들리지도 않은 게 이번 여행이 순조로울 것만 같은 예감이 들었다. 늦은 오후 시간이었다.


로열블루 컬러의 유니폼을 입은 승무원들이 항공기 문 앞에 서서는 브리지로 내려서는 승객들에게 일일이 인사를 건네었다.


"Tot Ziens. Goodbye."('톳 진스'는 굿바이와 같은 뜻의 네덜란드 말이다.)


내게는 그 인사말이 순간 "스코틀랜드에 대해 아는 게 뭐예요?"처럼 들렸다.


"음, 왜 남자들이 입는 체크무늬 스커트에다, 왜, 그 '스카치캔디' 광고에 나오는 백파이프 음악하고... 어, 하나 더, 스카치위스키!"


그것들을 만나러 이곳까지 왔다.


"그게 다예요? 정말?"


'아, 맞다. 해리포터!'



준비


ATM에서 파운드 좀 뽑아 들고, 미리 예약해 둔 렌터카 체크인을 마쳤다. 그사이를 못 참고 아이 둘이 서로 치고받았다. 그 옆으로는 아이들 엄마가 영 못 미덥다는 특유의 표정을 짓고 서 있었다.


'까딱없어. 무조건 정반대라고만 기억하자.' 좌측주행의 경험은 있었지만, 운전석이 오른쪽인 차를 몰아야 했다. 진짜 괜찮을까 싶지만, 절대 내색을 하면 안 될 일이었다.


"아빠, 기억력 30점이야?"


종종 해대는 작은아이 말이 문득 떠올라 더 불안해졌다. '30초'와 '30점' 어느 쪽이 더 나쁜 상황인지 계산하려 해 보았다. 불과 몇 분 지나지 않아 인상이 절로 써졌다. 라운드어바웃(회전교차로)에 들어선 후 몇 바퀴째 제자리를 돌았다. 머쓱해졌다.


내비게이션이 브리티시 악센트로 일러주는 안내를 따라 매리어트 호텔로 향했다. 에든버러 도심에서는 조금 먼 한적한 골프 리조트였다. 원대한 계획의 시작엔 여유를 갖는 게 먼저 필요하다고 생각했었다.


"You arrived at your destination."(목적지에 도착했습니다.)


Dalmahoy Hotel & Country Club (지금은 매리어트 브랜드를 쓰지 않는 듯 하다.)



여유


호텔방 도어를 맨 처음으로 열고서 신세계를 영접하듯 괜찮은 곳인지를 검사하는 역할은 늘 작은아이 차지였다. 큰아이의 저항도 만만치 않지만, 이겨낼 도리가 없었다.


방에 짐을 부려놓자마자 산책길에 나섰다.


"엄마! 여우! 여우!"


난데없이, '울시' 로고와 똑같이 생긴 여우 한 마리가 나타나, 우리를 쓱 쳐다보고는 관심 없다는 듯 종종걸음으로 멀어져 갔다. 길 위에서 여우를 만난 건 또 난생처음이었다.


"엄마, 저 아저씨 치마 입었어."


여우가 사라진 뒤 얼마 지나지 않아 들려오는 나지막한 소리에 고개를 돌려보았더니, 이번엔 킬트 입은 남자들이 나타났다.

  

진짜로 스코틀랜드인가 보다 싶은 생각에 감개가 무량했다. 그 순간부터 일상을 완전히 잊은 듯 상쾌한 기분이 들기 시작했다.



스코틀랜드에서도 5월은 더없이 푸르른 계절이었다. 하늘은 새파랗고, 눈부신 햇살은 18홀 코스를 두 개씩이나 품은 광활한 골프장 위로 무척이나 예쁘게 드리웠다.


골퍼들 스윙 자세가 바로 바라보이는 호텔 레스토랑에서 식전 맥주 한 잔으로 여유를 꾸며 보았다. Par 5 홀 드라이버 샷을 장타로(정타로) 날려보고 싶은 부끄러운 욕구가 솟구쳐 올랐다. 순간 아이들을 바라보았다. 귀에 익은 소리가 들려오는 듯했다.


"아빠, 오늘도 못 쳤어?"


맥주 한 잔을 더 달래서는 단숨에 들이켰다. 그리고는, 골프의 본고장에서, 골프 칠 때마다 듣곤 하는 닉네임 '씨볼'(See Ball)을 아름답게 떠나보냈다.





계획


우리는 에든버러로 입성하여, 북으로 북으로 계속하여 올라갈 것이었다. 스카이섬을 지나고, 네스호를 지나서, 마침내 아름다운 계곡과 호수가 어우러진 '야성적이고 신비한' 땅 하이랜드를 만날 계획이었다.


이튿날 아침, 잠에서 덜 깬 아이들을 앉혀놓고, 스코틀랜드다운 스코틀랜드를 보여주겠노라고 원대한 꿈에 대해 브리핑하였다.


"자, 봐봐. 여기 스코틀랜드 짤록한 허리 쪽에 에든버러가 있어... 계속 북쪽으로 올라갈 거야. 바쁘게 움직여야 해."



다들 듣는 둥 마는 둥 했다.



입성


이틀째라고 운전이 한결 편해졌다. 그렇다고 자만할 일은 또 아니었다. 고풍스럽고 장엄한 스코틀랜드의 수도 에든버러로 입성하는 날이었다.


"영국의 수도는 런던 아냐?"


"스코틀랜드 사람들에게는 잉글랜드는 남의 나라일 뿐이야."


스코틀랜드 사람들의 정체성과 자긍심은 잉글랜드와의 기나긴 투쟁의 역사 속에서 생겨났음을 이해하기에는 아직은 무리지 않겠나 싶었다. 에든버러의 도시 복잡성과 어둡고도 비장한 색감에 대해서도 굳이 설명하려 하지 않았다.


가운데 멀리 에든버러 성, 그 앞의 Balmoral 호텔 시계탑 (Free Image)


"좀 들어봐 봐."

"에든버러 성, 로열마일, 이런 데가 올드타운이야. 에든버러는 600년이나 스코틀랜드 수도였어. 당연히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이겠지? 거기부터 갈 거야."


나름 친절한 설명이 다시 이어진다.


"근데, 바로 붙어있는 뉴타운도 세계문화유산이야. 있다가 칼튼힐 갈 때 보일 거야. 뉴타운 이래도 300년 전에 만들어졌어."

"잉글랜드 공격을 막으려고 도시를 요새처럼 만들어 놓으니까... 이게 사람이 많아져도 도시가 커지질 못했대. 그래서, 자꾸 건물 위로 건물을 더 쌓아 올렸대. 에든버러 빌딩들은 그래서 키가 커. 저기 지붕 위에 카페가 있고 길도 보이지? 사우스 브리지라는데 가면 지하도시도 있대. 도시가 미어터지니까 결국 뉴타운을 만들 수밖에 없었겠지."


일일 가이드 역할에 충실했다. 비록 아이들은 듣는 둥 마는 둥이었지만.


프린스 스트리트(Princes St.)를 가운데에 두고 좌측이 올드타운(구시가지), 우측이 뉴타운(신시가지)


상징


에든버러의 상징인 '에든버러 성'부터 찾았다. 찾는다는 표현이 맞지 않은 게, 캐슬락 바위산 위에 떡하니 자리 잡고 앉았으니 어디선들 잘 안보였을까.


올려다보았다. 어디서든 잘 보이지만, 그럼에도, 천 년의 긴 역사 속에 무던히도 버텨왔다. 여러 스코틀랜드 군주의 탄생을 지켜보았을 것이고, 수많은 공성전을 치렀을 것이고, 그렇게 도시에 위기가 닥쳤을 땐 믿음의 피난처였겠다.


산 아래 주차장에 차를 세워두고, 아이들을 재촉하며, 9시 30분 입장시간에 여유 있게 도착하기 위해 10여 분 남짓 종종걸음질을 쳤다.




캐슬힐에서는 아무래도 밀리터리 터투 준비를 하고 있는 듯했다.


"얘들아, 밀리터리 터투 준비하나 봐."


"그게 뭔데?"


그게 뭐라고 준비하는 광경만으로도 가슴이 쿵쾅쿵쾅 뛰는 것인지 몰랐다.


"밀리터리? 아빠 방위잖아."


'그게 뭔 상관?'


기대를 않던, 백파이프 들고 킬트를 입은 인상 좋은 아저씨들과 노신사들이 우리를 반겨주었다. 이런 환대가 어디에 또 있을까 싶었다.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서로와의 투닥거림을 최고의 즐거움으로 여기는 악동들을 노신사가 흐뭇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 그를 바라보며 나도 흐뭇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인상 좋은 사람을 만난다는 것은 여행이 주는 선물 같은 즐거움이다 싶었다.



에든버러로 오기 전에 하루짜리 에든버러 관광 상품을 살펴보았었다. 의외로, 에든버러 성은 외관만 둘러보고 끝을 내는 게 많았다. 왜 그럴까 했던 궁금증은 성 안으로 입장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굉장히 쉽게 풀렸다.


그리고, 작은아이가 울먹이는 돌발상황이 발생할 거라곤 꿈에도 생각지 못한 채 성 안으로 발을 들여놓았다.



(다음 편에 스코틀랜드 이야기가 계속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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