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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블루밍드림 May 21. 2024

백파이프 선율은 글렌을 따라 흐르고 ③

세계여행 에세이: 스코틀랜드 (3화)

도해(渡海)


이른 아침부터 고색창연한 에든버러를 바쁘게 누빈 후유증인 듯했다. 눈꺼풀이 한낮의 태양빛을 실컷 빨아들인 늦은 오후의 나른한 나무 잎사귀처럼 자꾸만 아래로 처졌다. 안전한 운전을 위해 어쩔 도리없이 오른뺨을 세게 후려쳤다.


에든버러를 출발한 지 두 시간쯤 지났을까 구어락(Gourock)이란 항구에 도착했다. 능숙하게 크지 않은 페리선에 차를 올리고, 커다란 버스 틈에 끼어서 반 시간 정도 바다를 건넜다.


세지 않은 바닷바람을 얼굴 가득 맞아가며 비로소 자유를 느꼈다. 이제 더는 힘들게 인물을 말하고 역사를 설명하려 애쓰지 않아도 되었다.


'보는 대로, 느끼는 대로, 니들 알아서 해라.'


5월의 스코틀랜드 이른 저녁은 햇빛을 조금 아껴두었고, 갑판에 서서 올려다보는 구름 낀 하늘은 서서히 짙어지고 있을 바다 빛깔과 깔맞춤이라도 한 듯 서로 간의 경계가 흐릿하였다. 저 멀리 육지가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나른해졌다. 잔잔한 바다를 바라보다 보니 난데없이 레드와인이 당겼다. 


더넌(Dunoon)에 도착하였다.



순박


하이랜드로 북진하는 경로로 이 길을 정하지 않았더라면 이런 곳을 어찌 알고 찾아들었을까 싶을 만큼 작은 바닷가 마을이었다. 그래서였을까, 전혀 알지 못하는 낯선 땅을 찾는 순박한 설렘이 페리선에서 땅으로 막 내려선 차를 에스코트하듯 감싸 안아 주었다.


미리 예약해 둔 B&B에 도착하니, 친절하기 이를 데 없는 청년이 우리를 맞아 꼭대기 층의 방까지 안내해 주었다. 저녁식사를 물어보았다. 몇 번을 전화하더니, 멀지 않은 곳의 조금 더 큰 호텔 레스토랑으로 예약을 해 주었다.


Royal Marine Hotel


마호가니 고색(古色)의 바(Bar)가 무척이나 인상적인 비스트로. 다른 손님은 보이지 않고, 미리 연통을 넣어둔 덕분인지 귀찮은 대화 없이 극진한 환대를 받았다. 도시의 세련미나 고단함은 차마 근접하지 못할 것 같은 순박한 얼굴을 한 웃음 많은 아가씨가 우리를 도왔다.


한국사람은 태어나서 처음 본다고 했다. 작은아이가 저 혼자서 바에 앉았다. 그 아가씨 콜라 한 잔 가져다주더니 그다음부터 둘이서 무슨 재미난 얘기를 하는지 웃음소리가 간간이 들려왔다. 귀 기울여 보면 별 얘기 아니었다.


"How do you say "how old are you" in Korean?"


"너 몇 살이야?"


한국사람은 처음 발을 디뎠을 것만 같은 미지의 서쪽 바다 작은 마을의 밤은 그렇게 순박한 모습으로 깊어만 갔다. 식당에서 새어 나오는 시골 아가씨와 꼬마 사이의 하릴없는 대화가 별이 드문드문 빛나는 밤하늘로 반짝반짝 오르는 듯했다.


빠네 파스타와 하우스 와인 한 잔을 페어링 하며, 지금 이 시간 에든버러 도시 야경은 어떤 모습일까 궁금해하였다.



인연


에든버러를 떠나온 이튿날 아침. 바다를 방금 건너온 햇살이 곱게 비추는 창가에 앉아 청년이 정성껏 준비해 놓은 아침식사를 수다와 페어링 하여 즐겼다. 



바다에서 불어오는 산산한 한줄기 바람과 같이 그저 쉬어가는 인연일 뿐인데도, 청년은 살갑게 우리 대장정의 행운을 빌어주었다.


작별을 하며, 사람은 여행이고, 여행은 사람이란 철학이 맞아떨어지는 순간이라고 생각했다.



변주


차창으로 빠르게 스쳐가는 풍경이 알게 모르게 변해가고 있었다.


글렌(골짜기)이 깊어져 갔다. 이곳의 화산은 분화하여 칼데라 대신 수많은 글렌을 만들었다. 화산이 빚어낸 작품들이, 노르웨이 풍경의 아름다움과는 비교될 바가 아니지만, 먼 곳에서 일부러 찾아온 이방인의 심장을 금세 거칠게 뛰도록 조종을 했다. 독특한 마(매)력을 가졌음에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비현실적이었다고 때때로 회상했다. 백파이프의 날카롭고도 구슬픈 선율이 글렌을 타고 위로 올랐다 아래로 내렸다 불규칙적으로 흐르는 느낌이 열린 차창을 지나 몸속으로 스며들었다. 차를 멈추고, 전형적인 스코틀랜드 하이랜더의 모습을 한 연주자 곁으로 다가갔다.


백파이프를 부는 목적도, 타깃한 관객도, 따로 정해둔 바는 없는 듯했다.



때로는 아는 것도 병이겠거니 했다.


로미오의 몬테규家와 줄리엣의 캐퓰릿家, 이 두 가문 간의 반목이 격렬한 사랑의 종말을 낳았듯, 300여 년 전 스코틀랜드 캠벨家의 질시가 어리석은 왕의 계략에 말려 이곳 글렌코(Glen Coe)에 모여 살던 맥도널드家 사람들을 살육했다. 살아남은 자는 2월의 글렌을 넘다가 얼어 죽었다. 한 가문의 여든 명 가까운 사람들이 이 아름다운 글렌에서 죽어나갔다.


붉은색, 보라색, 연두색 체크무늬 타탄(Tartan) 킬트를 입은 저 연주자는 어느 클랜(가문)일까 궁금해졌다. '스카치캔디' 사탕 광고를 빛나게 했던 '더 브레이브'(The Brave)의 경쾌한 멜로디를 연주한다고 해도 글렌코를 따라 흐르면서는 서글프게 변주될 것만 같았다.


지난번 OO마트에서 할인 판매하던 중저가의 클랜캠벨(Clan Campbell) 위스키 생각이 머릿속을 언뜻 스쳐 지나갔다.



글렌



5월이래도 먼 북쪽의 땅 글렌의 푸른빛과 누런빛은 황량하기도 하고 장엄하기도 했다.


아이들을 그냥 방목하듯 풀어놓았다. 내가 아는 유일한 목동은 스테파네트 아가씨 곁을 지키는 터라, 어찌하는지도 모르고 그냥 내버려 두었다.


브레이브하트에서 하이랜더 전사들이 거칠고 무서울 게 없어 보였던 건 이 자연이 그렇게 가르치고 키워냈겠다 싶었다. 백파이프 소리가 들려오면, 독일군들도 "지옥의 숙녀들이 왔다"라며 공포에 휩싸였단다. 그럼에도, 이번 여행에서 내가 만난 하이랜더들은, 몇 안되지만, 하나같이 순박했다. 이 자연이 그들을 또 그리 가르치고 키워냈을 것이었다.


글렌코를 뒤로 하고, 길게 뻗은 로크(Loch, 호수)를 따라 좀 더 서쪽으로, 좀 더 북쪽으로, 차를 달렸다. 그렇게 한 시간여 되었을까... 


해리포터가 불쑥 나타나 줄 것만 같은 글렌피난(Glennfinnan)에서 또 한 번 멈추어 섰다.


앞으로는, 호그와트 마법학교를 호숫가 기슭에 얹혀놓은 듯한 영화 속의 'Black Lake'(검은 호수)가 보였다. 로크쉬엘(Loch Shiel)의 풍경이 마치 푸른색 주단을 수십 리 길이로 펼쳐놓은 듯했다.


뒤로는, 호그와트행 급행열차가 "뿌-뿌-" 기적을 울리며 질주하는 환각을 일으키는 고색창연한 고가교 '글렌피난 비아덕트'가 위압적 포즈로 버텨 섰다.


그 시간에 유독 하늘이 푸르렀다. 구름도 걷혀갔다. 파아란 호수 위로 햇빛이 불규칙하게 바운스 하였다. 호숫가에 두어 시간 앉았다면 나도 조앤 롤링의 것과 비슷한 느낌의 판타지 영감이 떠오를 것만 같았다.


"아서라."


"우리 지금 해리포터 덕질하고 있는 거 맞지?"


설레었으니, 덕질이 맞다 싶었다.




구름


말레이그(Malaig) 항구에서 뱃시간을 놓치고 말았다.


스카이섬(Isle of Skye)으로 들어가는 페리선을 타기 위해서는 이제 한 시간 이상을 더 기다려야 했다. 해리포터 덕질이 조금 과했던 탓이었겠다. 바다를 건넌다 해도 섬 북쪽 끝자락의 킬트락(Kilt Rock)까지 올랐다 돌아오려면 서너 시간은 필요하였다. 마음이 조급해졌다.


희한했다. 북으로 계속 오르는데도, 저 멀리 보이는 스카이섬 위로 구름이 많지가 않았다. ('스카이'(Skye)가 구름을 뜻한다.) 



로우랜드의 바다에서 드라이한 레드와인의 우아한 과일향을 맡았다면, 하이랜드의 거친듯한 바다를 건너는 순간에는 스트레이트 몰트 위스키의 과일향, 꽃향기, 풀내음이 절묘하게 어우러진 향기가 나는 듯했다. 십여 분 남짓 그렇게 백일몽을 꾸었다. (사실, 내게 익숙한 글렌피딕, 글렌리벳, 맥켈란은, 스카이섬에선 먼, 하이랜드 동쪽 끝 스페사이드(Speyside) 지역 위스키들이다.)


포트리(Portree)를 지나, 도무지 차가 다니는 길 같지 않은 시골길을 끼고 계속하여 북으로 올랐다. 황량하면서도 정감 있는 스카이섬 풍경에 매 순간 마음을 뺏기지 않았다면 명명백백한 거짓말임에 틀림없었다.


조금만 더 가면 되었다. 스코틀랜드, 아니 이 멀고 먼 하이랜드로 우리를 부른 킬트락(Kilt Rock)이 얼마 남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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