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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블루밍드림 May 23. 2024

백파이프 선율은 글렌을 따라 흐르고 ④

세계여행 에세이: 스코틀랜드 (최종화)

백난지중대인난(百難之中待人難)


마침내 킬트락(Kilt Rock)에 도착하였다. 참 멀리도 왔구나 싶었다.


북해의 거센 파도와 휘몰아치는 바람이 더 거칠고 더 강인한 땅을 만나, 길고 긴 세월 동안, 이리 할퀴고 저리 때리며 결국엔 크고 큰 생채기를 여럿 남겨 놓았다. 거인이 대지를 감추기 위해 쌓아 올린 거대한 벽이라고 말하는 아일랜드 '모허절벽'과 닮은 꼴이었다.


"많고 많은 어려운 일 중에 사람을 기다리는 일이 가장 어렵다."라고 했던가. 한 해 수백 만 명이 찾는 모허절벽의 유명세와 달리, 구름 잔뜩 낀 5월의 늦은 오후 스카이섬 킬트락엔 오롯이 우리만 있었다. 갈매기도, 흰부비새도 보이지 않았다.


고독했던 킬트락이 잠시 우리와 벗을 하자, 멜트(Mealt) 폭포도 신이 난 듯 지옥의 숙녀들 킬트자락 위로 더욱 거칠게(신나게) 물을 쏟아부었다. 폭포수는 쉴 새 없이 북해 바다 위로 수직 낙하했다.




우리 둘 석별(惜別)의 잔


하이랜드의 하루에는 사계절이 모두 다 들었다. 북해에서 불어오는 습한 바람은 5월을 잊어버릴 만큼 세차게 불어댔다. 몹시 차고 축축한 무언가가 얼굴에 계속 부딪혔다.


짧은 머무름 후 기약 없는 작별을 해야 했다. 오래전 파리 에펠탑 점등 순간을 목격하고선 차마 발길을 돌리지 못한 적이 있었다. 그때와는 크게 다른 (영원히 기약 없는) 석별이었다.


"엄마, 나 춤출래."


작은아이가 킬트락 표지석에 올라 신나게 춤을 추었다. 우리를 이곳까지 불러들인 세리머니, 그리고 이제 그만 떠남을 고하는 순박한 세리머니였다.


스코틀랜드 시인 로버트 번스는 올드랭사인(Auld Lang Syne) 시 속에 다음 말을 남겨두었다, "And surely ye'll be your pint-stowp! And surely I'll be mine!". (넌 너의 술잔 가득 술을 마셔라. 난 나의 술잔 가득 술을 마실터이니.)


언제 다시 한번 찾아올 수만 있다면, 그땐 스카이섬 깊숙이 외진 곳에서 하룻밤 유하며 술 한잔 할 수 있기를 소망하였다. 차 안이 조용해졌다 싶더니, 아이 둘 다 차창에 기댄 채 졸고 있었다.



'누군가는 낭만이라고 쓰고 누구는 비극이라 읽는다'


올 때의 뱃길과는 다르게 스카이브리지를 건너 서둘러 섬을 빠져나왔다.


얼마 지나지 않아, 행여나 해가 일찍 기울까 근심에 빠지는 한 때의 에일린 도넌 성(Eilean Donan Castle)이 시야에 들어왔다.


"다들 빨리 일어나!"


호숫가 외로운 작은 섬 하나. 그 위에 마치 퇴역한 늙은 군인 같은 작은 성 하나. 머잖아 뉘엿뉘엿 저물어 갈 해가 아무리 빛을 쏘아준들, 어느 방향에 서고, 또 어떤 각도로 사진을 찍은들, 풍겨 나는 고독함은 어쩔 도리가 없었다.


우측은 영화 '007 언리미티드'에서 MI-6 스코틀랜드 본부로 등장한 장면.


그래서일까, 스코틀랜드에서 가장 낭만적인 성이라고 다들 말했다.


13세기에 지어진 이 성은 오랜 세월 매켄지그리고 동맹 관계의 맥레이家의 차지였다. 맥도널드가 이 성을 빼앗으려고도 했었다. 그러다, 18세기 초 매켄지가 역모에 연루되자 왕권을 지키려는 자에 의해 성은 폭파되고 말았다. 가졌던 자와 탐냈던 자 '사이()'가 없어지고 말았다.


성 안으로는 들어가지 않기로 했다. 다들 겉모습만 보고 아름답다고 하던 터였다. 나도 그러자고 했다.


"세상에 알고 지내는 이는 많지만, 진정 내 마음을 알아주는 이는 몇 되지 못한다." 명심보감의 한 구절을 닮은 낭만적인 성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곤, 007 영화의 오프닝 총열 시퀀스를 흉내 내어 보았다.


"더블 오 세븐! 더블 오 세븐!"

"탕탕"


"......"

"어떻게 찍어도 예쁘네."


동문서답만 있을 뿐이었다.



고독한 대결


낭만적인 성을 뒤로 남겨두고 포트윌리엄(Fort William) 큰 마을을 향해 내달렸다. 황량하고 척박한 하이랜드 풍광 속에 표면도 고르고 폭도 넓은 자동차 도로가 잘 닦여 놓인 게 오히려 불편했다.


거친 자연과 자동차 속도 사이()의 고집스러우며 고독한 대결을 보는 듯했다.



어느새 스코틀랜드를 떠나기 전날이 되었다.


여행준비는 늘 대충 해대는 편이지만, 이번만큼은, 어쩐 일인지, 마지막 날의 호텔을 애써 미리 알아보았다. 그런 까닭에, 더 북으로 올라야 할 루트에도 불구하고 글렌코 근처까지 돌아 내려왔다.



물아일체


하이랜드 품속에 수줍게 안긴 것 같은 호텔에 찾아들고 보니, 아, 후회 따윈 없노라고 단언할 수 있었다.


첫눈에 바로 알아보았다, 또다시 이런 곳을 찾기란 쉽지 않으리란 것을. '글렌코의 섬들'(Isles of Glencoe)은 하늘과 산과 계곡과 호수가 서로 간의 경계를 허물어 버린 그런 곳이었다. 큰아이도, 엄마도,  어디가 경계인지 모를 그곳에서 넋을 놓고 그들 하나하나를 바라보고 서 있었다.



풍경과 사람이 하나가 되었다.


그날 저녁 내가 와인을 마셨는지 위스키를 마셨는지 오래도록 기억이 나지 않았다.




네스호(Loch Ness)의 괴물은 죽었을까


호수가 이젠 지겨울 만한데도, 네시(Nessie)를 찾아 나선 길에는 야릇한 흥분이 함께 하였다.


"아빠, 네시가 진짜로 있어?"


"바보야, 그런 게 어딨어?!"


"1,500년 전부터 네시를 봤다는 얘기 있어. 설마 그때 그 애는 아닐 거고, 계속 새끼를 낳았나?"


"네시 찾아볼래."


길이가 36km나 되는 크나 큰 호수를 어찌 살필 것인지 궁금하였다. 호수에 작은 돌멩이를 던지면 네시가 가까운 곳에서 대가리를 빼꼼히 내밀 것만 같았다.



네시에 대한 관심이 뚝 떨어져 버리기까지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아마도 날이 많이 흐리고 물안개가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으스스한 분위기였다면 네시 이야기가 좀 더 길어졌을지도 몰랐다.


그러는 사이, 이번 스코틀랜드 여행의 마지막 여정인 어커트 성(Urquhart Castle)에 들어섰다. 이곳 또한 '낭만적' 에일린 도넌 성만큼 스코틀랜드의 간판 사진을 촬영하는 명소라고들 했다.


13세기에 지어진, 당시에는 스코틀랜드에서 가장 큰 성이었단다. 에든버러에서 만났던 스코틀랜드 독립 전쟁의 영웅 로버트 더 브루스 왕의 기개가 서린 곳이지만, 에일린 도넌 성과 똑같은 운명을 맞아 왕권을 지키려던 자에 의해 폭파되었다.


우리는 잔혹한 파괴의 잔해 위에서 세상 평화로운 하이랜드의 마지막 풍경을 즐겼다.


드문드문 구멍 뚫린 구름의 틈을 비집고 내려오는 햇빛, 그리고 그런 햇빛에 반응하여 은빛으로 반짝이는 네스호의 윤슬 위로 이제 다시 번잡한 일상으로 되돌아가야 하는 도시인의 고단함이 둥둥 떠다니는 듯 보였다.   



에든버러 공항을 이륙하는 비행기 안에서 누군가 내게 "스코틀랜드 어땠어요? 좋았어요?"라고 물어본다면, 아마도 난 아무 대답도 하지 않을 것 같았다. 대신, 좁은 이코노미 좌석 등받이에 몸을 한껏 누이고, 팔짱을 끼고, 또 두 눈을 감고서, 입꼬리를 위로 살짝 올리는 보일 듯 말 듯한 미소만 짓고 있을 것 같았다.


(스코틀랜드 이야기를 모두 마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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