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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블루밍드림 Apr 18. 2024

모뉴먼트 밸리 '붉은 얼굴을 한 자들의 영혼' ①

세계여행 에세이: 미국 서부 모뉴먼트 밸리 (1화)

머리로 추억하는 여행지가 있는 반면 가슴으로 기억하는 곳도 있기 마련이다. 추억이든 기억이든 어느 하나 소중함의 크고 작음을 따져 차별할 필요는 없겠지만, 그래도 누군가 '당신, 많고 많은 곳 중 어디가 가장 좋았었나'라고 통속 질문을 던진다면, 주저 없이, '노르웨이는 행복이 무엇인지 머리로 깨달은 곳이요, 애리조나 나바호 인디언의 신성한 땅은 내 가슴속에서 박동하는 심장의 존재를 느끼게 해 준 곳이다'라고 대답하겠다.


나는 지극히 세속적인 것을 따르며 사는 사람이다. 그러다 보니, 감성에 대한 노스탤지어를 쫓아 버둥거리고, 감성 스펙트럼의 대부분을 애잔하거나 때로는 심금을 울리는 것들로 채운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모뉴먼트 밸리, 쇠퇴한 인디언 부족의 자존심에서 흘러내려 흔적으로 남은 땅 위에서 찾게 된 감성은 앞서의 것들과는 확연히 구분되는 변종과 같은 것이다.




각자 다른 이유를 품고 떠난 여행


큰 아이 시험점수에 일희일비하던 시절이었다. 가르쳐 보려고 옆에 앉혀 놓아도 도무지 나아질 것이 없다 싶으니 "뭐가 되려고 그 모양이냐?", "누구를 닮아서 머리가 나쁘냐!"와 같이 오래도록 가족 모두에게 상처로 남을 말들을 거리낌 없이 내뱉던 시절이기도 했다. 그래도 성이 안 풀리면 때리기도 하였고, 술로써 좌절감을 달래려고도 해 보았다. 지금에 와서 돌이켜 생각해 보면 모두 다 부질없는 짓들이었지만, 그때는 나도 너무 힘들었다. 결핍된 내리사랑의 비뚤어진 대물림이랄까. 잠시 휴전이 필요하였고, 마음의 생채기에 바를 치유의 연고도 필요했다.


아이들 엄마는 그때 '외눈박이 물고기의 사랑'이라는 괴기한 타이틀의 시집을 낸 류시화 시인의 사상에 꽤 심취해 보일 때였고, 오히예사의 '인디언의 영혼'이라는 책을 탐독할 때였다. 하물며, 그 책의 역자가 류시화 시인이었으니, 당최 조용할 날이 없는 집안에서, 책 속에 담긴 아메리카 인디언의 삶의 지혜를 찾아 한 문장 한 문장 읽어가며 숨이라도 쉴 틈을 찾았을 것이다. 그래서, 미국이란 나라를 좋아하지 않음에도, 게다가 오래전 미국 동부 여행길에 워싱턴 D.C.로 떠나기 전날 뉴욕 월드트레이드센터가 와르르 무너져 내리는 상황을 목격한 트라우마에도 불구하고, 짧지 않은 미서부 여행길에 따라나섰을 것이다.


큰 아이야 뭐 공부를 멀리하고 유니버설 스튜디오에서 재미 볼 생각이 판단을 지배했을 것이고, 작은 아이는 "왜 나만 미국에 못 가봤어?"라는 피해의식을 떨칠 기회를 잡은 것으로도 두 말이 필요 없는 즐거운 여행길이었겠다.


그렇게, 야구선수 류현진 씨가 LA 다저스에 입단한 지 삼 년째 되던 해 여름에 서울 → 로스앤젤레스 → 라스베이거스 → 그랜드 캐니언 → 모뉴먼트 밸리에 이르는 대장정 길을 떠났다. 사실 그랜드 캐니언에서 피날레를 맞이해도 부족함이 없을 일정이었으나, 인디언에 관한 시시콜콜한 이야기, 예를 들어 '늑대와 함께 춤을', '구르는 천둥' 같은 이름 짓는 방식 갖고도 가십으로 자주 듣다 보니 그랜드 캐니언에서 가까우니 모뉴먼트 밸리까지 가볼까 고민하다가 다음 이미지의 사진을 보았고, 더는 고민할 필요가 없었다.


(Free Image)


(여담으로, 원래 여행 전에 예산을 따로 계산해 보거나 하지 않는 MBTI의 즉흥적 'Perceiving' 성향인데, 귀국 후 받아 든 카드 청구서를 보았더니 1천만 원이나 되는 거금을 '투자'하였음을 알게 되었다. 일찍이 우리 부부 유럽 배낭여행이 너무 짠내가 났던 탓에 그 후로 숙소는 언제나 '좋은 곳' (아이들 평가 기준으로 별(Star) 개수)이어야 하기에 한 번 움직이면 오랫동안 생활이 고달프다.)




라스베이거스, 미식의 파라다이스?


서울을 출발한 비행기가 로스앤젤레스에 도착하였으니, 그곳 이야기부터 하는 것이 순리겠지만, 글을 쓰는 지금도 내일 당장 애리조나로 떠날 것처럼 스스로 기대에 부풀어 오르기에 로스앤젤레스를 떠나 라스베이거스로 향하기까지의 여정 이야기는 다음 기회로 미루련다.


로스앤젤레스를 출발하여 다섯 시간 가까이 차를 몰아 라스베이거스로 향하는 동안 몇 번을 차를 세우고 또 소리를 질렀는지 모른다. 내 나이 열세 살에야 바다를 처음 보았고, 소년이던 시절 지금 다시 생각해 보아도 시쳇말로 지질하다 할 만큼 삶이 비루했었던 반면에 자기네들은 어제만 해도 유니버설 스튜디오에서 마냥 즐거워해 놓고서는 그새 세상 좋은 것 다 잊어버린 듯하다. 러시아 대문호 푸쉬킨이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여워하지 말라' 했거늘 노여움은 가시지 않는다. 그래도, 세월이 한참 흐른 후 과거를 되돌아보면, 같은 시 안의 '미래는 마음에 사는 것, 현재는 슬픈 것'이라는 그다음 시구는 맞아떨어지는 말인 것 같다. 지금은 아는 것을 그때도 알았더라면...


가족을 동반하지 않았다면, 예전에 그랬던 것처럼, 카지노에서 슬롯머신을 재미 삼아 당겨보고 하겠지만 (몇 달 전에 베트남 호찌민시티의 쉐라톤호텔 카지노에서는 회원카드까지 만들었으나, 어디까지나 회원 가입하면 100달러인가 시드머니 넣어준다길래 그런 것이지 카지노에 별 관심은 없다.), 아이들이 우선이기에 어디 가서 무엇을 먹느냐가 가장 큰 관심이다. 그래서, 또는 그런데, 라스베이거스에 들어서자마자 In-N-Out Burger부터 찾았다.



저녁시간에는 쇼를 보는 게 시쳇말로 국룰이라 하겠지만, 마카오에서 워터 쇼를 보고 온 지 얼마 되지 않아서 그 돈을 차라리 먹는데 쓰기로 하고, 코스모폴리탄 호텔에 체크인 한 후에, 아무런 계획도 없이 뜨거운 사막 도시를 걸어본다.


사람의 마음이란 게 참으로 간사해서, 그냥 보아도 멋진 것 또 돈 값한다 싶은 것 앞에서는, 휴전과 도피의 여행이 나름 성공적으로 작동하는지, 모두의 얼굴이 밝기만 하다. 이 도시의 별칭이, 도시가 번창하기 시작할 즈음에 돈벌이를 쫓아 몰려든 사람들과 그들의 해방구 역할을 했을 도박과 향락에 빗대어, 'Sin City'인데, 이것을 굳이 현대판 소돔과 고모라인양 '범죄의 도시'나 '천박한 도시'로 번역을 하는 사람들이 많기도 하다. 난 그저 존재함으로 인한 '원죄의 도시'라고 말하고 싶다.  

 

코스모폴리탄 호텔 방에서 내려다 보이는 라스베이거스 전경. 돈 값을 한다.



그래, 라스베이거스에서는 아무것도 따질 필요가 없다. 이 도시를 즐기는 최선의 방법은 저마다 특색 있는 호텔 중에 취향에 맞는 곳을 잘 골라 호캉스를 하거나, 카지노에서 잠시 미쳐보거나, 쇼에 빠져 보거나, 무작정 걷다가 이런 구경 저런 구경하거나, 분위기 좋은 레스토랑에서 폼을 잡아 보거나, 가장 세속적일 수 있는 자기 나름대로의 방식을 찾아서 실천해 보는 것이 아닐까 싶다. 다들 그러려고 모여드는 곳이고, 그런다고 나무랄 사람 한 명 없을 것이다.


라스베이거스의 밤 시간은 속절없이 흘러만 가고, 이튿날 아침은 라스베이거스 최고의 뷔페 중 하나인 코스모폴리탄 호텔(The Cosmopolitan Hotel of Las Vegas)의 위키드 스푼(Wicked Spoon)에서 거만하게 먹고서 그랜드 캐니언을 향해 다시 길을 떠난다. 먹는 것으로 시작해서 먹는 것으로 끝나는 라스베이거스 일정이다.



그랜드 캐니언, 와서 보니 유명세에 못 미친다?


형언하기 어려운 아름다움과 압도적인 대자연의 대표적 자연유산이라면 바로 협곡의 깊이 1.5㎞, 길이 445.8㎞, 너비는 200m에서 30㎞에 이르는 그랜드 캐니언을 두고 하는 말일 것이다. 그런데, 한 번 경험한 여행의 궤적을 다시 따라가다 보면 '답습'에서 오는 식상함의 오류에 빠지기도 하는데, 두 번째 와보는 그랜드 캐니언의 경우가 그러했다.


뉴밀레니엄 시대가 얼마 남지 않았을 무렵 휴렛 팩커드와 픽사(Pixar) 견학차 캘리포니아를 샌디에이고부터 샌프란시스코까지 종주했었고, 그때 잠시 코스를 비켜나 그랜드 캐니언에 와본 경험이 있다 보니, 가장으로서의 책무인양 '무엇이든 잘 몰랐던' 그날과 동일한 코스로 다녔다. 그때와 같은 휴게소인 것 같은 곳에서 식사를 하고, 그때처럼 이스트림(East Rim)은 건너뛰었고, 그때처럼 사우스림(South Rim)의 매더 포인트(Mather Point)와 야키 포인트(Yaki Point)만 가 보면서 그랜드 캐니언의 전부를 보는 것이라고 설명을 해 주었다. 일부 일리 있는 말이기도 하지만, 그래서인지 사진으로 보던 것보다 못하다는 반응을 보인다. 애초에 콜로라도 강까지 내려가는 트레킹은 무리이므로 거의 모두가 그리하듯 전망대에서 눈으로만 보기로 하긴 했지만, 눈으로 보이는 장엄함 이상의 감동은 없다는 말이다.


그러던 집사람도 모뉴먼트 밸리에 가까워지면서는 눈빛이 달라지기 시작하였다.    

  

매더 포인트에서 바라 보이는 그랜드 캐니언 (Free Im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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