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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블루밍드림 Apr 20. 2024

모뉴먼트 밸리 '붉은 얼굴을 한 자들의 영혼' ②

세계여행 에세이: 미국 서부 모뉴먼트 밸리 (2화)

“사막이 아름다운 건 어딘가에 우물이 숨어 있어서 그래.” 어린 왕자가 말했다.


나는 갑자기 모래의 그 신비스러운 번쩍거림을 이해하게 되었다. 내가 어린애였을 때, 나는 고가(古家)에서 살고 있었다. 전설에 의하면 거기에는 보물이 숨겨져 있다는 것이었다. 물론 그 누구도 그것을 발견해내지 못했다. 어쩌면 찾아보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 때문에 그 집은 매력이 있었다. 내 집은 가슴 깊숙이에 한 비밀을 숨기고 있었다……


“그래.” 나는 어린 왕자에게 말했다. “집이건 별이건 사막이건, 그것들을 아름답게 하는 것은 눈에 안 보이는 것이야.


... 생텍쥐페리의 '어린 왕자' 중에서




Monument Valley (모뉴먼트 밸리)... 이름이 왜 저따위야


모뉴먼트는 (역사적, 문화적으로 의미가 있는) 건축물, 구조물 같은 것을 총칭하는 말이니 보통명사의 무심한 나열로 '기념물 계곡'을 만들어 버렸다. 정복자가 단편적인 생각으로 보이는 대로, 아니면 영혼을 빼 내 버리려는 듯, 지어 부르는 이름 같아서 싫다.

(나바호 말로 그 땅의 이름은 tsé (rocks) + bii (in, within) + noodǫ́ǫ́z (it is striped) + łigaii (it is white), 그러니까 내 식으로 번역해서 '바위 둘레 하얀 줄무늬' 뭐 그렇다고 한다.)


파리 샹젤리제(Champs-Élysées)는 '엘리시온의 들판'이란 뜻의 이름인데, 엘리시온은 그리스신화에서 영웅들이 죽은 후에 들어간다는 축복의 땅이다. 엘리시온의 들판 대신 '개선문' 거리나 '모뉴먼트' 거리로 불리는 상황을 상상하니 나도 모르게 헛웃음이 나온다. 하물며 모뉴먼트 밸리가 하얀 얼굴을 가진 자들이 무용담을 펼치는 서부영화의 촬영지로 애용되었다고 하니 백겁의 세월 동안 이곳을 지켜온 선조 원주민 입장에서는 분기탱천해 마지않을까.



땅의 원래 주인인 사람들을 만나고 싶었다. 하지만, 그 땅에서 우리가 만난 사람은 몇 사람 되지 못했다.


모뉴먼트 밸리는 애리조나주, 유타주, 뉴멕시코주 등에 걸친 Navajo Nation(나바호 인디언 보호구역) 안에 있는데, 무슨 큰 의미가 있겠냐마는, 그래도 이곳 보호구역의 면적이 미국 내 가장 넓고, 미국 연방의 작은 주(로드아일랜드, 델라웨어, 코네티컷, 뉴저지, 뉴햄프셔, 버몬트 등) 보다도 더 크다고는 한다. 나바호 부족은 아메리카 원주민 가운데 부족민 수도 가장 많다고 한다. (2021년 40만 명가량)


보통의 경우라면 모뉴먼트 밸리의 대표적 전경이 눈앞에 펼쳐지는 The View Hotel에 묵었겠지만, Navajo Nation에서 유일한 기초지방정부 기능의 타운십(Township), 그래봤자 5천 명 정도의 주민이 전부인 모뉴먼트 밸리 관문 카이옌타(Kayenta) 마을의 모텔(Monument Valley Inn)을 숙소로 정한 이유는 보호구역 내에서 원주민들이 실제로 어떻게 살아가는지가 몹시 궁금해서였다.


뭇사람들이 이제 더는 아메리카 원주민을 서부영화 속에 등장하는 호전적인 야만인으로 생각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런 이유에서가 아니라, 아메리카 원주민의 정신세계와 사상이 책 속에서 미화된 부분도 있겠다마는, 그냥 그들의 실제 모습이 궁금했다. 이 또한 책에서 영향을 받은 탓이겠다.


Kayenta Monument Valley Inn


나바호 사람은 'Tó Dínéeshzhee'라고 부른다는 이 마을 이름은 어떤 의미일까... 내가 이해하기로 '(서로 다른 방향으로) 갈라지는 물'이다. 황량한 사막 같은 땅에서 그렇게 불리는 이유는 나중에 모뉴먼트 밸리 지프 투어 가이드로부터 들을 수 있었다.


그랜드 캐니언에서 늑장 부리다 오후 늦게나 떠난 이유로 우리네가 카이옌타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칠흑같이 어두운 밤이 되어 있었다. 세 시간 가까이 북동진하는 동안 마주한 거대한 붉은 사암의 행렬에 '이 땅엔 분명 영(靈)적 기(氣)가 세게 흐르는 것이야'라는 믿음이 절로 생겨나 눈빛이 저절로 바뀔 정도였다. 게다가 석양으로 더 붉어진 바위 그 너머로 떨어지는 강렬한 일몰의 광경에 믿음은 정점을 향해 치닫았다.    



분명 카이옌타에 도착했음에도 내비게이션이 목적지인 모텔을 찾지 못하였다. 가로등도 없이 캄캄한 (잘 안 보여도 뭔가 슬럼가 같은) 주택가를 헤매다 보니 컹컹 개들이 일제히 짖는 소리가 적막하던 동네를 소란스럽게 했다. 덜컥 겁이 났다. 그럴 때 나타나 길을 알려준 나바호의 땅에서 처음 말을 섞어 본 아저씨...


이어서, 모텔 체크인 해 준 아저씨, 늦은 시간 식사 주문받아준 아가씨, 이튿날 모뉴먼트 밸리 Visitor Center의 상점 아주머니, 지프 투어 가이드 아저씨, 노점 상인 아저씨... 이들이 우리가 나바호 땅에서 만난 모든 이였으나, 어느 한 사람 모난 게 없고, 웃음기 없이도 다정했다.


40대 중후반으로 보이는 지프 투어로 만난 가이드 분은, 단언컨대 내가 만나 본 사람 중 가장 기품 있고 가장 지혜로워 보이는 사람이었다.


2022년 말 4년 임기의 나바호 네이션 대통령(좌)과 부통령(우)으로 선출된 분들. 내가 말한 가이드 분과 이미지가 비슷하다.


여행을 떠나오기 전 탐독한 '인디언의 영혼' 책에서 받았던 인상이 되살아나는 탓인지 아니면 대자연과 그 속에 살아가는 원주민의 삶에 대한 설명에 자극이 된 것인지 '바람이 어쩌고' 같이 투어 중간중간 잦기만 한 우리네 질문에도, 어느 질문 하나 허투루 듣지 않고, 진지하고 차분하게 응답을 해 줄 때 책 속의 기품 있는 태도가 모두 그분 속에 발현된 듯, 조상 대대로 내려온 삶의 지혜가 그분 속에 축적된 것과 같이 느껴질 정도였다. 이 글을 적으며 자연스럽게 부부 사이의 대화의 주제가 되어 둘 다 그때의 '사람이 줄 수 있는 경탄의 감동'에 대해 말을 이어 나갔다. 사람이 곧 책이다.


 

모뉴먼트 밸리를 아름답게 하는 '눈에 안 보이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


정복자가 만들어낸 오만과 편견의 왜곡된 역사를 거치며 아메리카 원주민의 순수한 삶과 역사는 오랜기간에 걸쳐 사라져 갔지만, 이제는 영적으로 고귀함을 지닌 존재로 재평가되기도 하고, 그들의 지혜와 사상을 배우고자 하기도 한다.


나바호 땅으로 들어온 이튿날 아침 그곳 원주민이 살아가는 모습이 조금씩 베일을 벗기 시작하였다. 카이옌타가 그래도 타운십인데, 지금은 어떻게 주택 개량이든 뭐든 형편이 좀 나아졌을지 몰라도, 황량한 촌동네 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David McNew/Getty Image


차를 달린 지 얼마 지나지 않아 Monument Valley Navajo Tribal Park (모뉴먼트 밸리 나바호 부족 지구) 입구에 도착하였다.



그리고, 드디어, 사진 한 장에 '그래, 가 보는 거야' 했던 그곳에 와서 실물을 영접하였다. 대자연에서 받는 감동의 깊이는 바라보이는 자연의 크기와 반드시 정비례하지만은 않음을 깨닫는 순간이었다. 장엄함을 놓고 보면 그랜드 캐니언을 앞설 것이 어디에 있겠냐마는 바위 언덕 몇 개가 모인 황량한 사막을 보면서, 어쩌면 어제저녁부터의 영적 기운이 순간 움찔했었는지, 가슴이 찌릿해 오는 감정을 느꼈다. '에바'라고 비웃을 지도 모르겠지만 정말로 그랬다. 또, 나만 그런 게 아니었다.


아래 사진 왼쪽부터 ‘웨스트 미튼 뷰트', '이스트 미튼 뷰트', '메릭 뷰트' 3 대장이 뿜어내는 압도감이 장관을 이룬다. 반면에 벙어리장갑을 뜻하는 미튼(Mitten)과 나 홀로 언덕을 의미하는 뷰트(Butte)의 조합으로 이루어진 이름들이 비대칭적이라서 흥미롭다.



Visitor Center 앞에서 마침 커플 두 명을 태우고 출발하려던 투어 지프 한 대의 기사 분이 우리 가족을 보고선 같이 갈 거냐고 젊잖게 말을 건네왔다. 앞서 감탄해 마지않았던 바로 그 양반을 운명적으로 만나던 순간이었다.


물론 이미 감동에 빠진 상태였지만, '눈에 보이는 것'만 멀리서 바라보고 돌아섰더라도 감동의 여운이 아직까지 남아 있었을까 생각해 보게 된다. 우리는, 운 좋게도, 그 옛날 이 땅에 살던 원주민마저 경외시 했던 대자연 속으로 딥 다이브 해서 들어가 보았고, 자연에 더하여 책에서 읽던 아메리카 원주민의 지혜와 삶의 자세를 실증의 예로서 투어 가이드의 말과 모습을 통해 체험하였다.



비포장 오프로드를 달리며, 원주민 가이드와 함께 해야만 들어갈 수 있는 신성한 나바호의 땅 속살을 돌아볼 수 있는 ‘밸리 드라이브’ 코스가 끝나갈 무렵, 모뉴먼트 밸리, 아니 나바호 원주민이 오랜 세월 살아오고 있는 이 땅을 더욱 아름답게 하는 그 무엇 (thingamajig)에 대해 어렴풋이나마 알 것 같았다.





다음 편에서는 원주민과 함께여야만 들어가 볼 수 있는 모뉴먼트 밸리의 신성한 땅에 대한 마지막 이야기를 이어가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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