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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블루밍드림 Jun 05. 2024

인신공양의 신앙에서 가톨릭으로, 과달루페의 성모

세계여행 에세이: 멕시코시티, 푸에블라 & 촐룰라

1917년, 포르투갈 리스본 북쪽의 마을 파티마에서 양을 돌보던 세 명의 어린이에게 성모님이 발현하셨다.


그 보다 앞선 1858년, 남부 프랑스 피레네 산맥의 산골 마을 루르드에서는 열네 살 소녀 베르나데트에게 발현하셨다.


그 보다 더 앞선 1531년, 멕시코시티 북쪽 테페약 언덕에서 '과달루페의 성모'로 발현하셨고, 당시 멕시코인 800만 명이 가톨릭으로 개종하였다.




레포르마의 아침


8월 하순의 어느 일요일, 멕시코시티의 힙한 젊은이는 죄다 이곳에 모인 듯 늦은 밤까지 소란스럽던 파세오 데 라 레포르마(개혁의 발걸음) 거리에는 동이 트자 또 다른 종류의 소음이 만들어지고, 방 안까지 들이친다. 쉐라톤 호텔 방에서 바로 내려다보이는 (1910년 멕시코 독립전쟁 100주년을 기념하는) '독립의 천사' 기념비 꼭대기엔 두 날개를 활짝 펴 올린 황금빛 천사의 자태가 눈부시다.



레포르마 넓은 도로는 이 아침 차량을 허락하지 않는지, 끊어질 듯 줄지어 달리는 사람들과 제멋대로 내달리는 자전거가 뒤엉켜 해발 2천 미터 도시의 심장부를 댓바람부터 요란스럽게 한다.


대충 걸쳐 입고 생각보다 일찍 호텔을 나선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이 도시는 분명 내게 잘못이 없건만, 회사에서의 나쁜 기억 때문인지 쉽사리 정을 주지 못한다. 글 못한 놈 붓 고르냐고 흉을 본대도 어쩔 도리가 없다.


큰길을 따라 여기저기에, 서울의 따릉이 마냥, 잠시 빌려 탈 수 있는 자전거들이 줄지어 서 있다.


핸드폰에 앱을 깔고 신용카드 등록하는 번거로운 절차를 잘도 따라 하나 싶더니, 드디어 덜커덕 자전거의 앞바퀴가 족쇄에서 풀려난다. 해냈다.



자전거


난 자전거 타기에 서툴다. 어쩌다 안양천변을 따라 한강을 오갈 때면 쌩쌩 내닫는 자전거족들과 괜한 시비라도 붙을까 저어 된다. 오래전 사은품으로 얻은 빨간색 싸구려 자전거 위로 트레이닝복 차림으로 올라탄 볼품없는 내 모습이 시빗거리다.


호기롭게 멕시코시티 자전거족 사이에 끼어든다. 서울의 자격지심을 내려놓으니 그나마 무리 지어 달릴만하다.


계단을 오를 때면 이내 숨이 차오르는데, 자전거 페달을 죽어라 밟는데도 숨이 차지가 않다. 그렇게 10km쯤 달렸을까. 엉덩이가 아파와 몸을 비틀어 대기 시작할 무렵 더는 앞으로 나아갈 수 없을 만큼 사람이 물결치는 곳에 다다른다. 이내 예사롭지 않은 곳임을 직감한다.


과달루페 성모의 성지에 이른 것이다.


푸른 지붕의 과달루페 성모 대성당, 황금빛 돔의 예전 본당, 빨간 돔의 주교좌성당. 뒤편 테페약 언덕 위의 (성모 발현) 예배당


빌린 자전거로는 다닐 수 있는 바운더리가 정해져 있나 보다. 앱에서 허용 지역을 벗어났다는 알람이 쉬지 않고 울린다. 게다가 자전거를 어디 세워 둘 데가 없다. 나와 두 손 꼭 맞잡고 성모 성지를 배회하는 자전거는 스스로의 부끄러움에 차마 고개를 들지 못한다.


"저의 죄를 사하소서."


자전거를 끌고 성지로 들어온 사람들이 몇몇은 더 보인다.




멕시코 인구의 89%가 가톨릭 신자이며, 그 수는 1억 명에 이른다. 1990년.




성모의 발현


"후안 디에고!"


미사에 참례하러 테페약 언덕을 넘는 쉰일곱 된 후안 디에고의 귀에, 신비로운 음악소리와 함께, 자신을 부르는 여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너는 나의 작은 아들이다. 나는 이곳에 성당을 세우기를 간절히 바란다. 그 성당에서 나의 사랑, 나의 자비, 나의 도움과 보호를 모두에게 베풀겠다.”


디에고는 성모님의 말씀을 주교에게 전하였다. 주교는 진실을 증명할 증표를 가져오라 하였다. (성당을 세우라는 곳은 원주민들이 아즈텍 여신을 모시는 성소였다.)


"테페약 언덕에 올라 장미꽃을 꺾어 내게 가져오너라." 그곳은 척박한 땅이었고, 때는 12월이었다.


언덕 위에는 (주교의 고향인 스페인 카스티야 지방에서 피어난다는) 장미꽃이 만발하였다.


“이 장미꽃들이 주교에게 가져갈 증표이다. 내가 너를 언덕 위로 보냈으며, 거기에서 이 꽃들을 발견했다고 전하여라."


디에고는 장미꽃을 담은 자신의 틸마(망토)를 주교 앞에 펼쳤다. 꽃들이 폭포수처럼 떨어졌고, 틸마에는 순간 성모 마리아의 모습이 그려졌다. 성모는 틸마에 그려진 성화를 '과달루페의 성모'라 부르라고 이르셨다.



과달루페의 성모


'과달루페'는 '파티마'나 '루르드'와 달리 성모 발현의 장소를 말하지 않는다. 인신을 공양하는 아즈텍 신앙의 태양신 '케찰코아틀(날개 달린 뱀)'을 물리친다는 의미의 말이다.


과달루페의 성모는 갈색 살빛에 검은 머리를 하고, 원주민의 옷을 입고, 허리엔 원주민의 임신부 표식인 검은 띠를 둘러 묶었다.


과달루페의 성모는 '멕시코의 수호자'이자 '생명(태아)의 수호자’이다. 아즈텍 신들에게 공양되던 수많은 생명을 살리셨고, 정복자 스페인의 수탈로 고통에 빠진 원주민들의 마음을 위로하셨다.


멕시코 사람들에게 과달루페 성모는 곧 생명이요 구원이다.




주교는 놀란 나머지 틸마에 그려진 성모 마리아의 형상 앞에 무릎을 꿇고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테페약 언덕 위에 예배당부터 세우고 성모 마리아의 형상을 성물로 삼아 모셨다.


선인장을 원료로 한 실로 짠 직물은 오래지 않아 해지는 법인데, 이 성물은 500년의 세월에도 전혀 손상이 없다. 호기심 넘치는 이들이 성모 마리아 눈 부분을 확대해 보았더니 그 속에서 틸마가 펼쳐지는 순간과 그 자리에 있었던 사람들로 추정되는 형체가 보였다고 한다. 그뿐이랴, 그림에는 붓질의 흔적이 없을뿐더러 안료 역시 미지의 물질이라고 한다.




대개는 주일미사에 참례하는 신자이거나 각지에서 온 성지순례객일 것이다. 인산인해란 말이 이 광경을 일컫는 것이리라. 나 같은 관광객은 몇이나 있으려나.


행여나 잃어버릴까 그놈의 자전거를 꼭 붙들고서, 1709년의 옛 대성당부터 참배한다. 이 성당은 조금씩 앞으로 기울어지고 있다. 멕시코시티는 도읍을 할 당시 호수 위에 세워졌다. 1976년에 대성당을 새로 지은 이유다.


우측 새로 지어진 본당. 가운데 제단 위로 과달루페의 성모 틸마가 걸려있다.


새로 지어진 본당을 참배한다. 미사 중이다. 과달루페의 성모 틸마를 보려면, 가운데 제단 쪽으로 가 무빙워크에 올라야 한다. 멀리서 손톱만 한 크기의 기적의 성물을 알현한다.


북적대는 사이를 비집고 들어, 잠시 성모성심께 내 근심을 봉헌한다. "너의 근심이 무엇이냐?"라고 혹시라도 물으신다면,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그저 마음이 편치 못함이 여러 날입니다."라고 대답하련다.  


때마침 본당 근처를 배회하는 지인을 만나 자전거를 잠시 맡겨두고 서둘러 테페약 언덕을 오른다. 이제야 속죄를 하는 기분이다.



언덕이 끝나는 곳 계단을 올라 성모 발현의 예배당(1553년)을 마주한다. 성지순례객과 관광객이 한데 어울려 줄지어 예배당 안으로 발을 들인다. 몇 걸음 옮기지 않아, 내 가까운 곳의 이름 모를 여인이 성호를 긋는다 싶더니 이내 얼굴 위로 눈물이 흘러내린다... 보고... 말았다. 신앙의 본질을.




돌려받은 자전거를 추슬러 다시 일상을 향해 질주한다. 과달루페 성모 발현 성지가 페달을 밟는 힘에 비례해 멀어져 간다. 성당을 참배하는 사이 잊고 있었다. 허용 지역을 벗어났다는 자전거 앱의 경고음이 계속 울려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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