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춘 - 2
사람들은 아저씨를 신경 쓸 여력이 없다. 그는 진짜 지박령이 되어가고 있었다. 그때, 멀리서 아까와 같은 빨간 옷을 입은 사람이 다가오며 말을 건넨다. “괜찮아유? 아니, 인자 해 떨어져유.” 그러면서 한 손에 들고 있던 뿌리는 파스를 아저씨에게 건넨다. 그는 어디가 아픈 줄도 모른 채 마구잡이로 파스를 뿌려댄다. 여기저기 남발한 파스의 잔향이 주로에 무겁게 깔린다. 주로를 달리던 주자들은 묵직한 파스향을 맡으며 인상을 찡그리고는 앞을 향해 달려간다.
쿨파스의 효과인지, 좀 쉬었던 탓인지 모르지만 다리에서 괜찮다는 사인의 전기 신호가 뇌로 보내진다. 그는 다시 힘을 내어보기로 한다. 그리고 파스를 건넨 은인 패트롤에게 감사를 건넨다. “덕분에 살았슈. 감사혀유.” 서울에 살면서 고향 사투리를 다 잊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동향 사람을 만나니 자동으로 구수한 말투가 섞여 나온다. 만수 씨의 몸이 다시 뜨거워진다. 다리는 교차되며 팔을 앞 뒤로 힘차게 흔든다. 땅을 박차고 나아가는 발걸음에 다시금 살아 있음을 느낀다. ‘휴, 정말 지박령이 되는 줄만 알았네.’ 아저씨의 경기가 다시 시작됐다.
약 1.7km가 지나고 눈앞에 급수대가 보인다. 자세히 살펴보니 노란 바나나도 있다. 어서 바나나를 한 손에 움켜쥐고 먹고 싶은 심정이다. 200m 전. 벌겋게 달아 오른 얼굴. 마음속에서 ‘조금만 더’를 외치며 처절하게 급수대를 향해 달린다. 이윽고 도착한 급수대. 도착과 동시에 물 컵을 들고 목구멍을 향해 쏘아버린다. 얼마나 급했는지 얼굴이 전부 물 바다가 되었다. 하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옆에 있던 바나나를 한 손에 움켜쥔다. 그리고 상상하던 모습처럼 입으로 가져간다.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에 바나나를 들고 있으니 마치 일본원숭이와 같다. 아저씨는 두 개의 바나나와 물 세 컵을 들이켰다. 덕분에 잔뜩 부풀어 오른 배. 파란 하늘. 작렬하는 태양 빛. 한강 다리 밑 시원한 그늘. 주로 옆에 벤치가 보인다. 그는 그대로 벤치에 드러눕고 싶었다. 이제 다리는 더 이상 말을 듣지 않고 머리도 이 정도면 되었다고 한다. 분명, 살아내려고, 살려고 시작했는데. 이 정도면 잘했다고 한다. 그 말에 점점 안도감이 들며 눈꺼풀이 감겨온다. 무거워진 몸을 이끌고 달려오는 몇 없는 주자들을 피해 벤치에 눕는다. 그리고 눈을 감아 본다.
솔솔 불어오는 산들바람. 마치 요정이 아저씨의 얼굴을 마사지하듯 간지럽다. 어느새 눈앞에는 푸른 신록의 풍경이 펼쳐진다. 자세히 생각해 보니 30년 전, 미술학도였던 만수는 넓은 세상에서 더 많은 색을 구경하기 위해 몽골로 떠났었다. 그때 보았던 그 광활한 풍경이 눈앞에서 펼쳐지고 있었다. 꿈인지 생시인지 모를 이 순간. 젊은 만수로 돌아간 아저씨는 자유로운 자신의 몸을 만끽하며 넓은 초원을 달리고 구른다. 함께 갔던 친구들의 웃음소리와 멀리서 들려오는 유목민들의 기합 소리. 바로 옆에서 다그닥거리는 말들의 질주. 그 덕분에 모래 바람이 일어나고 주변 시야가 흩어진다. 함께 있던 친구들의 그림자가 사라지고 갑작스레 어둑해진 공간. 어릴 적 보았던 유별난 몽골 하늘. 화창하다가도 금세 비가 쏟아졌다가 다시 맑아지는 그런 것. 아저씨의 마음과도 같았다.
사실 꿈인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 순간에 머물고 싶었다. 그렇지만, 그래서는 살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살기 위해 시작한 이 일을 마무리 지어야겠다고 생각하는 그때. 아저씨의 몸이 마구 흔들린다. 지진이 난 것처럼 몽골이 흔들린다. 눈앞이 뿌옇게 열리며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린다. “아니, 여즉 여기까지 왔슈? 인자 해 다 떨어졌슈. 당신이 마지막이유.” 빨간 옷을 입은 패트롤이다. 아저씨는 헐레벌떡 일어나며 말한다. “경기 끝났슈?” 그러자 패트롤 아저씨가 말한다. “아직 좀 남았슈. 그나저나 그 다리를 해가지고 가겄슈?” 아저씨는 애처로운 눈망울을 하며 어쩔 줄을 모른 채 고개를 떨구었다. 그러자 패트롤 아저씨가 그를 향해 손짓한다. “그럼 각오 단단히 하고 나를 따라와유.” 그 한 마디에 아저씨의 눈에 불꽃이 일렁인다.
“준비됐슈.”
그렇게 꼴찌 아저씨와 패트롤의 마지막 경주가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