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살아남게 만든 두 가지
46살이 되면서 지금까지 인생을 살면서 ‘죽고 싶다’라는 절망감에 휩싸이던 시절이 2번이 있었다
죽음을 떠올린 첫 번째 사건은
2017년 전 직장 대표가 횡령/배움으로 잠적을 한 뒤 모든 사건이 폭풍처럼 몰려오던 나의 첫 망함의 기록시간 동안 둘째를 임신한 상태에서 죽고 싶었다
두 번째 사건은
2020년 이후 저금리의 시대와 부동산의 폭발적인 상승기가 함께 맞물리면서 나를 붕 띄웠다가 바닥을 처박히게 했던 그 시기에 죽고 싶을 만큼 힘들었다
그 시절 나는 내가 부동산으로 인해 빠르게 재기할 기회를 잡았다고 생각했다
지금 생각하면 사기로 망한 지 고작 3년밖에 안되던 시기였다. 아직도 조급증이 나를 지배하던 시기였다.
그 당시 약간 생긴 여유자금으로 무리하게 진행했던 부동산 투자와 무서운 줄 모르고 받기 시작한 사업자대출들이 2022년부터 2023년까지 엄청난 후폭풍을 몰고 나와 우리 부부 삶에 찾아왔다
보물이라도 캐낸 듯이 여겼던 그 부동산들은 냉각기가 시작되면서 애물단지로 전락하면서 마피로도 팔리지 않으니 어떡해서든 대출을 끌어와서 잔금을 쳐야 하는 상황이 연속으로 몰아쳤다
매매도 안되고 늘어나는 대출로 점점 납부해야 하는 월납입이자는 늘어나고
미칠 지경의 연속이던 그 시절에 나는 또 한 번 죽고 싶었다
이런 시간을 어떻게 견뎠냐고 묻는다면
죽음을 생각하며 하루하루를 버티던 그 당시 나의 머릿속에 남은 건 단 하나였다
“내 아이들이 나중에 커서 ‘우리 엄마는 왜 죽었어요?’라고 물었을 때 누군가에게 ‘너희 엄마는 사업과 부동산투자를 실패하고 가족에게 온통 피해만 입히다가 돈 갚을 능력 없어서 자살했다 ‘라는 이야기를 듣게 만들 수는 없다“라는 것.
가난한 엄마인 것까지는 그럴 수 있지만
어린 자식에게 저런 씻을 수 없는 멍에를 안겨줄 수는 없었다
이게 내가 살아남은 첫 번째 이유이다.
첫 번째 실패를 겪을 당시 나는 임신 중이었다
임신 7개월째쯤..
산부인과에서 자궁경부가 2센티 정도로 급격히 짧아졌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때 만약 아이가 조산으로 나오게 되면 수술을 하게 될 거고 인큐베이터에 들어가고 등등의 일련의 과정들로 인해 못해도 천만 원 이상의 비용이 들어가게 될 수 있는 상황이 예상되었다
애 젤리 사줄 돈조차 없어서 눈물바람을 하고 있던 그 시절에 왠 날벼락같은 조산이냐 하면서 출산예정일까지 꼼짝도 않고 3개월 가까이를 거의 누워만 있었다
그때 결심했었다.
여기서 지금 죽어버리면 당시 4살이던 아이는 누가 키우냐.
아이아빠는 밤낮없이 돈 벌러 나가야 할 거고
애는 조부모가 봐줄 수도 있겠지만 엄마가 없다는 빈자리로 인해 돈이 더 필요하게 될 거다
둘째를 낳아놓고 죽으면 더더욱 그럴 것이다.
아이돌보미 비용이 얼만데…
차라리 그 돈이라도 덜 들게 내가 그냥 돌보미처럼 살아만 있어 보자
그런 의미를 갖고 나는 내 삶을 유지했다
두번째 실패 때도 그랬다.
나 못지않게 죽고 싶어 하던 남편과 매일같이 싸우다가 소리친 내용이 그랬다
빚 때문에 나와 너가 부부 모두 신용불량자가 되어도 나는 살아야겠다
그건 내가 감내해야 하는 고통이고
아이들에게 엄마가 자살해서 없는 유년기의 어둠의 시간을 줄 수는 없다
그건 정말 이기적인 것이다.
그것까지 저지를 수는 없다
그리고 이때는 내가 살아야 될 두 번째 이유를 찾았다.
이대로 죽기엔 내가 너무 불쌍했다
정말 한순간도 열심히 살지 않았던 적이 없는 나인데,
어쩌다 나는 이지경이 되었을까
그 어떤 누구도 나의 고통을 공감하거나 힘듦을 관심가져주지도 위로해주지 않고,
나를 응원해 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는
이런 지경이 되었을까.
그래서 나는 두 번째 실패 이후로는 자책을 좀 내려놓기로 했다
나 밖에 없었다
나 밖에 나를 칭찬하고 응원해 줄 사람이 없었다
나 밖에 나를 살리고 일으킬 사람이 없었다
이런 걸 새삼 깨닫고
나는 이대로 그냥 아무것도 안하고 엎어지고 싶은 나를
어르고 달래서 일으켰다
그리고 그 당시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하기로 마음먹었다
나는 그 뒤로 닥치는 대로
나의 시간과 체력을 팔아서
돈으로 만들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