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규 씨
20대는 소심한 10대처럼 살지 말아야겠다고 결심했다. 대학생 때는 다른 친구들 앞에 서는 일도 많아졌고 대외적인 활동도 많이 했다. 새벽 세네시까지 이어지는 술자리도 빠지지 않고 참여했다. 당연히 대학성적이 좋을 리 없었지만 그 시절 내가 속한 관계 안에서는 모두가 나를 인정해 주었다. 남자라면 그렇게 살아야 하는 줄 알았다. 하지만 나는 점점 탈이 났다. 집에 돌아오면 공허함에 잠을 이루지 못했다. 시간과 돈을 허투루 쓰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고, 나는 그들에게 언제나 유쾌한 존재여야 한다는 부담감이 늘었다. 사람들이 알고 있는 나와 진짜 나 사이에 간극은 멀어지고 있었다. 침대에 누워 있으면 그 간극 사이로 복잡한 생각들이 흘러나왔다.
아주 가끔 마음속 깊은 것을 나눌 수 있는 사람을 만날 때가 있다. (살아오면서 그런 사람은 내게 몇 안되지만) 얼마만큼 시간을 같이 보냈느냐가 중요하지 않다. 마음속 깊은 것은 농도가 짙어서 상대가 받아들이기 힘들 때가 있다. 아무리 채에 걸러내도 사람들에게 그것을 꺼내 보여주는 데는 용기가 필요했다. 그렇지만 그것들을 받아 안아 주는 사람들이 있다. 이 사람이라면 얼마든지 내 마음의 무게를, 감히 나눠 들어주길 부탁해도 되겠다. 나 또한 그들의 무거운 것들을 나눠 들어주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사람.
출장이 잦았던 아버지는 많은 시간들을 가족들과 보낼 수가 없었다. 그래서 나는 누나와 엄마랑 보내는 시간이 많았다. 누나와 엄마가 나에게 모든 영향을 주진 않았지만 나는 감수성이 풍부했던 것 같다. 동성 친구만큼이나 이성친구가 많았다. 성적인 매력을 느끼는 것과는 별개로 이성친구들과 이야기가 잘 통했다. 동성 친구들과 이야기하다 보면 세심하지 않은 마음에 상처를 받거나 왜 나는 남자답지 못하지라는 자책을 할 때가 많았다. 아직 사고가 자리잡지 못했을 때는 내가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 적도 있다. 이런 마음들은 주로 이성친구들과 나눴다. 이성친구들은 동성친구들보다 공감능력이 뛰어났다. 하지만 운 좋게 나에게도 이성친구만큼이나 이야기가 잘 통하는 동성친구가 한 명 있다.
모든 걸 뒤로하고 제주도에서 살기로 결정했을 때 그 친구는 나를 항상 격려해줬다. 자리잡지 못할 때는 책을 선물해 주고 편지도 써 주었다. 그때마다 나는 힘을 얻고 나쁜 생각 속에서 빠져나와 순간을 살았던 것 같다. 지금도 그 친구는 유일하게 내가 깊은 속마음을 터 놓는 친구다. 우리는 서로 이야기하지 않아도 배려하고, 가까운 사이지만 어떤 관계보다 예의를 지킨다. 서울로 다시 돌아왔을 때 이 친구와의 인연을 더욱 감사하게 느꼈다.
코를 찌르는 듯한 기름 냄새가 창문을 타고 들어왔다. 잠에 쉽게 들기 어려웠다. 이 층침대는 프레임이 얇아 안정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내 밑에 잘 게스트를 생각하니 괜히 미안해졌다. 늦은 시간, 같은 방을 쓰고 있는 게스트들은 하나 둘 숙소로 들어왔다. 영국을 떠나 오랜 긴장으로 지쳐있던 나는 인사를 나눌 기력도 없어 자는 척 벽을 보고 돌아 누웠다. 게스트들도 내 존재를 확인하고 빠르게 잘 준비를 마치고 각자의 침대에 누웠다.
잠이 들었다가도 계속 깨길 반복했다.
다음날, 잠을 충분히 자지 못한탓인지 가장 늦게 일어난 건 나였다. 이미 게스트 한 명은 나갔고, 다른 한 명은 준비를 마치고 거울을 보고 있었다. 오늘 퇴실한다는 말에 짧은 인사를 나눴다. 나도 일어나서 씻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 먼저 나갔던 게스트가 땀에 흥건히 젖은 채 방으로 들어왔다.
"안녕하세요. 어제 늦게 들어왔는데 시끄러우셨죠?"
좋은 인상의 게스트가 먼저 말을 걸어왔다.
"아니요. 잠에 들어 있었어서 괜찮았어요. 그런데 운동하고 오신 건가요?"
"네. 러닝하고 왔어요."
젖어 있는 몸이 불편할까 싶어 화장실을 양보했다. 여행 와서 아침부터 러닝이라니 부지런하다고 생각했다.
오늘 일정을 준비하면서 인사하다 보니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동규 씨는 취업준비생이었다. 여러 회사에 도전했지만 잘 풀리지 않아 기분전환 겸 영국과 프랑스를 여행한다고 했다. 동규 씨는 나와 반대로 프랑스 여행이 끝나면 영국으로 간다. 편한 옷을 위주로 챙겨 온 내가 민망할 정도로 동규 씨는 가죽재킷이나 첼시부츠등으로 여행룩에 신경을 썼다. 몇 마디 대화 속에서 서로의 여행 목적에 대한 비슷한 감성을 느꼈다. (동규 씨도 느꼈을 것 같다. 후의 여행을 동규 씨가 먼저 제안했으니까)
오늘 일정이 달랐던 동규 씨와 나는, 다음날 같이 여행을 계획하자고 약속했다.
오늘은 여행이 끝나는 대로 숙소에서 만나 맥주 한잔을 하자고도 했다.
나는 준비를 먼저 마치고 밖으로 나왔다. 파리의 하늘은 런던과는 다르게 푸르렀고 가끔씩 비추는 해는 따뜻했다. 좋은 인연을 만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