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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멜팅 팟’
인종 문화 등 여러 요소가 하나로 융합 동화되는 현상. 최근에는 다양성을 존중해 여러 문화를 하나로 용해(멜팅) 하지 않고 각각의 정체성을 유지하려는 노력이 강하다고 한다. 따라서 용어도 ‘샐러드 볼’로 바꿔 부르기도 한다지.
외국에 샐러드볼이 있다면 우리나라엔 김피탕이 있다. 그 이름도 김치 피자 탕수육. 이름만 들어도 고개를 갸우뚱하게 되는데 비주얼은 더 만만치 않다. 이를 처음 본 이들은 음식을 앞에 두고 금기시되는 단어를 꺼내고 마는데, 바로 음쓰. 음식물쓰레기 되시겠다.
김피탕의 독특한 점은 그릇에도 있다. 가게에 따라 일회용 플라스틱 그릇 대신 페스츄리 그릇에 담아주는 곳이 있다. 요리계에는 어찌 천재들이 이리도 많은지? 눅진한 소스를 머금은 딴딴한 페스츄리는 포크로 가차 없이 수직으로 꽂아 부숴 먹어야 한다. 어떤 고급 버터빵도 김피탕 아래 타르트 맛을 따라올 수 없다.
생각해보면 타르트도 김피탕에 붙여보면 참으로 요상 망측하지 않을 수 없다. 김치에 피자치즈에 탕수육에 페스츄리 빵이라니. 이다지도 이상한 조합이 신비하게도 천상의 맛을 낸다. 물론 불량 식품스러운 msg의 맛이 크지만 ‘맛있다’는 감상은 틀림없지 않은가!
김피탕과 가장 비슷한 인간관계라고 하면 역시 연애가 아닐까. 콩알만 한 교집합에 반해서 조화로운 합집합을 만들어가는 관계. 서로의 극단적인 맛을 잘 뒤섞은 게 요망한 맛의 김피탕이 되느냐, 음쓰로 전락하고 마느냐. 넘치는 사랑에도 불구하고 ‘멜팅’되지 못하는 모습을 마주했을 때, 조화로움으로 향하는 길은 멀고도 험하다.
해와 나는 극단적으로 다른 사람이다. 서로 팔이 당길 정도로 손을 뻗어 손가락을 걸쳐줘야 비로소 함께 일 수 있는 것이다. 몇몇 무뢰한(?)은 “분명 누구 한 명이 맞춰주고 있는 거다.”라고 우리 연애를 평하기도 했다. 아마 연애를 하면 무리해서라도 서로와 닮으려고 노력하기 마련이니, 우리가 이상해 보였던 게 아닐까 생각한다. 보통 좋아하는 사람의 흥미와 가치관에서 벗어나고 싶지 않아 하니까. 지금은 오랫동안 함께 하다 보니 많이 닮고 비슷해지긴 했지만, 그럼에도 교집합이 될 수 없는 부분은 여전히 존재한다. 받아들일 수 없다면 헤어질 수밖에 없는 부분 말이다.
우리는 외견만 보아도 성향 차이를 확실하게 알 수 있다. 난 화려한 걸 좋아해서 추리닝을 입어도 장신구를 빼놓는 법이 없다. 귀에 구멍만 여섯 개에 머리를 염색하고 자르는 걸로 스트레스를 해소한다. 해는 완전히 반대다. 그는 자연스러움을 추구한다. 흰머리가 많이 난다면 그건 그것대로의 멋이 있다며 새치를 아꼈다. 연애 초반에 재미로 같이 셀프 염색을 해본 것 외에는 자발적으로 염색을 해본 적이 없다. 액세서리도 커플링을 제외하면 하지 않는다. 변덕스럽도록 장식적으로 꾸미는 나와는 이질적인 사람인 것이다.
처음엔 나와 ‘다르게’ 보이는 부분들이 서운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몇 년 전의 해는 정말로 패션에 관심이 없어서 원색의 옷을 입고 다녔다. 해가 애정 하는 새치도 대학 동기들 사이에서 자주 입방아에 올랐고 놀림을 받았다. 해는 별로 개의치 않았지만 난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고작 겉모습으로 괄시당하는 게 싫었다. 하여 염색을 권하기도 하고, 예쁜 옷이 보이면 자주 선물하기도 했다. 그런데 어느 날 대학 동기가 비죽거리는 거다.
- 아, 애인이 마음에 안 들면 개조하면 되는 거구나!
깜짝 놀랐다. 남들에겐 그렇게 보인다고? 다행히도 애인은 내 진심을 곡해서 받아들인 적이 없지만 충격적인 조롱을 들은 이후론 해가 나의 안목을 빌리길 원하지 않는 이상 요상한 맛이 나도 그게 네 맛이려니-하고 있다.
우린 외견뿐만 아니라 사고관도 극단적으로 다르다. 해는 이상주의자이고, 난 현실주의자다. 때문에 그와 대화를 할 때면 말문이 막힐 때가 많았다. 그가 하는 말은 내게는 대게 터무니없었다.
하나, 누군가가 꿈꾸는 이상을 타인이 부정하는 일도 참 부질없지 않나. 현실을 말하는 내가 틀렸다고도 생각지 않지만 단지 내가 보는 세상과 그가 보는 세상이 다를 뿐이었다. 당신의 이상과 나의 현실을 잘 버무린다면, 이것 또한 꽤나 조화로운 맛을 만들지 않을까?
우린 그냥 이상한 김피탕 같은 존재로 남기로 했다. 요상하리만큼 조화로운 그런 사람들. 희망사항이라고 한다면 우리의 김피탕이 시큼새큼한 김치가 잔뜩 들어간 느끼하지 않은 맛을 내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