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겐 남고, 내겐 사라지겠지
“우리가 헤어져도 네겐 밀크티가 남을 거야.”
내가 곧잘 연인에게 하던 말이었다. 몇 년 전, 밀크티란 데자와 정도인 시기가 있었다. 또래들이 카페에서 달달한 바닐라 라테나 상큼한 프라푸치노를 시키던 시절에 나는 밀크티를 시켰다. 지금은 너무 익숙해져서 오묘했던 첫 밀크티의 맛을 표현하기란 퍽 어려운 일이지만 여하튼 참 희한한 맛이었다. 나는 고등학생 때도 정수기 물 특유의 물비린내를 싫어해서 항상 가방에 온갖 종류의 티백이 차곡차곡 준비되어 있었다. 찻잔을 미리 데운다던가 온도를 맞춰 찻잎을 우리는 정갈한 다도 행위는 없었지만 나는 커피타임보다 티타임을 좋아했다. 안 그래도 항상 긴장되고 날 세우게 되는 일들이 가득한 하루 속에서 심장을 빨리 뛰게 하는 커피보다는 몸과 마음을 차분하게 만들어주는 차가 내겐 더 매력적이었다. 와중에 ‘티’라는 단어를 달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주문하게 된 ‘밀크티’는 비린 것도, 구수한 것도 아닌 것이 달달 향긋 고소했달까? 홍차의 풍미가 우유 속에 응축되어 있다가 우유의 고소함과 함께 입안에 꽃향기 또는 파파야의 은은한 단 맛이 가득 해지는 것이 그야말로 신세계였다. 저렴이 버전인 데자와는 마냥 달달한 게 풍미는 없었지만 이미 난 밀크티란 음료에 푹 빠져있었다. 당시엔 카페에서 밀크티를 시키면 뭔가 어른인 것 같고 친구들이 도대체 무슨 맛일지 궁금해하는 나만의 카페 메뉴 같기도 했다. 지금이야 나도 알고 너도 아는 대중적인 메뉴라지만 묘하게 호불호가 있는 음료임은 분명하다.
그럼에도 내가 밀크티를 최애 음료로서 성공적으로 전파한 인물이 내 연인이었다. 연인은 입맛이 달다. 카페에 가면 항상 아이스초코, 복숭아 아이스티였다. 메뉴에서 알 수 있듯 메뉴 모험도 안 하는 사람이다. 입맛이란 건 도전하고 모험할수록 다채로워지는 법. 애인인 내가 시키는 메뉴는 그에게 소소한 모험이 되어줬다. 그중 밀크티는 그에게 ‘오잉?’하는 맛이었던 것 같다.
“입에서 꽃향기가 나. 근데 달달해.”
샴푸물 먹는 것 같다가 아니라면 합격. 아니나 다를까 연인의 카페 주문은 아이스초코, 아이스티, 밀크티 중 하나가 되었다.
대학에 다닐 때 유명한 사랑꾼 선배가 있었다. 선배의 대단한 커리어보다 헌신적으로 연인을 챙기는 모습부터 소문이 되어 퍼질 정도였다. 그랬던 선배가 애쓰고 노력했던 오랜 연애를 끝마치고 내게 말했다.
“나는 원래 밥을 먹고 또 뭘 먹는다는 게 이해가 안 가는 사람이었다? 근데 전 애인이 꼭 디저트를 챙기는 사람이었거든. 그땐 마냥 함께 하고 싶어서 나도 덩달아 꾸역꾸역 케이크를 먹었는데 헤어지고 나서도 내가 후식을 챙겨 먹고 있더라.”
선배는 분명 그녀에게 맞춰주고 있었을 뿐인데, 어느샌가 습관이 되어버렸다. 그렇게 그녀가 곁에 없어도 후식으로 케이크를 먹을 때면 그녀 생각이 날 거다. 이 대화가 기억에 인상적으로 남은 건 훗날 내 일이 되리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애인을 사귀지 않았더라면 수많은 카페를 전전하며 다양한 원두를 먹어볼 기회가 없었을 거다. 함께가 아니었다면 굳이 분위기 있는 레스토랑에서 와인을 시켜보지 않았을 거고, 비싼 초밥집에 뭣도 모르고 들어가 가격에 달달 떨면서 코딱지만큼 먹고 배고파-하며 나올 일도 없었을 거다. 그리고 훗날 그와 상관없이 기분을 낸다며 비싼 초밥집에 가더라도 난 연인을 떠올릴 거다. 와인을 마실 때면 혀에 붙은 떫은맛에도 그를 떠올리겠지. 와인 라벨에 걔의 얼굴이 있다던지, 초밥 고급 생선에 그의 얼굴이 떠오른다던지... 아, 그건 사양하고 싶다.
오랜 기간 함께할수록 성격, 취미, 가치관보다 입맛부터 큰 거부감 없이 서로에게 섞여 들어간다. 연인과 함께하기 제일 만만한 게 밥, 커피라고 하는 것처럼 단둘만의 식사는 나날이 늘어간다. 처음엔 조심조심 서로의 취향을 존중하며 식당을 고르고 예쁜 레스토랑에 갈지 몰라도 술 먹은 다음날에는 국밥이요, 밤샘 과제엔 컵라면, 시험기간엔 햄버거인 법. 그러다 고향인 동네 탐방도 하면서 서로의 단골 음식점도 알게 되고, 가족끼리 외식할 때나 가던 고깃집도 소개할 거다. 그리고 이 모든 식사에서 둘이 먹어보는 건 적어도 두 가지 메뉴, 서로의 접시다. 시도하지 않으면 입맛이 변할 이유도 없다. 사귄 날 뒤에 숫자가 늘어갈수록 아는 맛은 늘어가고 혀 속에 그가 남는다. 함께라도, 각자라도.
카페를 가기 힘든 요즘, 씻고 말린 고운 유리병에 손수 우린 밀크티를 마시며 나는 오늘도 너를 떠올린다. ‘아, 이 밀크티 네가 좋아할 맛이다.’ 내 최애 음료인 밀크티를 전파한 순간부터 기억을 옭아매는 계기를 만든 셈이다. 억울하게도 우리가 만일 이별한다면 난 한동안 내 최애 음료를 마실 수 없을 것 같다. 네겐 남고, 내겐 사라질 것 같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