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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이삭 Sep 04. 2024

여행은 힐링! 엄마는 유럽 체질?

2024년 6월 말, 엄마와 함께 8박 9일간 동유럽 여행을 떠났다.

생각지도 않았던, 순전히 나의 충동적인 결정으로만 시작된 여행에서

우리는 조금은 가까워져 돌아왔다. 이 글은 그 시간들에 대한 기록이다.




 출발 시간이 되어 비행기에 올랐다. 우리는 좌석을 찾고 짐을 올려둔 뒤 자리에 앉았다. 다행히 만석이 아니었고 좌석도 널널하니 편하게 갈 수 있겠다 싶었다.

 

 '여행 중 가장 기분 좋은 순간은 언제야?' 이렇게 누가 묻는다면, 나는 '비행기 타서 출발하기 직전!'이라고 말할 것이다. (누군가는 공항에 도착한 그 순간이 가장 좋다고도 하더라.)


 무튼, 존재하는 건 알지만 그동안 가보지 못했던, 어쩌면 동경만 해왔던 무언가의 세상으로 떠나는 순간. 설렘이라는 것이 최고조에 이르는 바로 그때. 나는 가장 기분이 좋았다.

 

 긴장과 압박감에 눌려 그동안 실감하지 못했었는데, 내 마음 한 구석에 자리 잡고 있던 여행에 대한 설렘이 떨림과 함께 막 솟구쳐 나왔다.


 옆에 앉은 엄마를 쳐다봤다. 엄마는 사방을 둘러보며 누가 타는지 옆자리 사람은 누구인지 쳐다도 보고 자꾸 엉덩이를 들썩거리며 움직였다. 그리고 쉴 새 없이 나에게 말을 걸었다. 신이 나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비행기가 이륙준비를 했다. 그리곤 ‘쿠르르릉!’ 하며 바퀴에 가속을 붙이더니 하늘 위로 빠르게 날아올랐다. 와, 간다..


 나는 ‘제발, 제발, 제발! 싸우지 않고 여행을 즐겁게 마칠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라고 두 손 모아 기도했다.


 매일 같이 보는 구름인데, 비행기 안에서 보는 구름의 모습은 얼마나 또 예쁜지. 비행기가 구름 위로 오르자 '와' 하고 곳곳에서 작은 탄성이 쏟아져 나왔다. 창가 자리에 앉은 사람들은 모두 휴대폰을 들고 창 밖 풍경을 찍기 시작했다.


 창가 자리에 앉은 사람들에게만 주어지는 특권. 바로 이 풍경을 편하게 바라보고 사진을 찍을 수 있다는 것 아니겠나. 하지만, 아쉽게도 우리는 가운데 좌석에 앉았기 때문에 창밖이 잘 보이지 않았다. 엄마는 사람들이 잠깐 휴대폰을 내려놓고 똑바로 앉는 사이에 보이는 창 밖 풍경을 목이 빠져라 내밀고 쳐다봤다.


 "우리도 창가에 앉지. 너는 왜 하필 여기로 골랐어."

 "내가 고른 게 아니라.. 여행사에서 배정해 준 거야."

 "사람들한테 사진 찍어달라고 부탁할까?"

 "아니, 그냥 둬.. 돌아올 때 창가 좌석 달라할게."

 막 고개를 젓자 엄마는 입을 쭉 내밀었다. 나는 옆자리에 앉은 사람에게 잠깐 양해를 구하고 창가 화면을 확대해 구름의 모습을 담았다.


 얼마 뒤, 기내식이 나왔다. 승무원은 한식과 유럽식이 있는데 무얼 먹겠냐고 했다. 나는 유럽식을 선택했고, 엄마는 무조건 한식을 먹어야 한다며 한식을 선택했다. 파스타와 밥과 함박 스테이크 같은 것이 나왔다.


 "입에 맞아? 안 느끼해?" 물었더니 엄마는 "괜찮아. 맛있어" 하면서 내 파스타도 먹어본다고 했다. 생각보다 느끼하지 않고 입에 잘 맞는다고 했다. 나는 입맛이 없어서 절반 가량을 손도 안 대고 남겼는데 엄마는 다 너무 맛있다며 내가 남긴 음식까지 다 먹었다.


 약 12시간이 걸리는 비행시간. 기내식 먹고, 영화 보고, 책 읽고, 자고, 싸고 말곤 딱히 할 것이 없다. 그런데, 외국 항공사라 그런지 한국어 더빙이나 자막을 제공하는 영화가 별로 없었다. 나는 자막이 있든 없든 대충 보고 싶은 영화를 골라보면 그만이었지만 엄마가 문제였다.


 이 많은 영화들 중 재밌는 게 대체 뭔지. 한글 자막을 제공해서 틀어주면 딱히 재미없어했고, 한국 영화가 있길래 찾아서 틀어주니 금방 지루해했다. 미리 볼만한 영상을 다운 받아왔어야 했는데 난 이거 까진 생각 못했다. 뒤늦게 후회하면 어쩌겠나. 이미 우린 비행기에 몸을 싣고 있는 걸.


 그러다 엄마는 내가 비행경로 화면을 켜 놓은 것을 보고 자신도 똑같은 화면을 켜 달라 했다. 화면이 뜨자 나는 손가락으로 지도를 확대하고 줄여서 보는 방법을 알려주었고 우리 행선지가 어딘지도 알려주었다.


 엄마는 지도를 여기저기 돌려보고 줄였다 확대했다 하면서 한참을 봤다. "00이네 지금 몽골 갔는데, 우리가 여기 지나가는 건가?"라고 물었다. "응, 몽골 지나가네. 우리 00보다 훨씬 더 멀리 가는 거야." 뭐가 재밌는지 엄마는 계속 화면에 지도를 돌리고 또 돌려봤다.


 도착하기 절반 정도 됐을 때, 어디선가 라면 냄새가 진하게 올라왔다. 주변을 돌아보던 엄마는 "여기 라면도 주나? 나도 먹고 싶다." 말했다. 아까 그렇게 많이 먹었는데도. 엄마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가서 라면 달라고 할게. 너도 먹을래?"라고 했다.


 "라면 달라고 할 수 있겠어?" "응. 그냥 달라고 하면 되지" 영어를 할 수 있을까 말이 과연 통할까 싶었지만, 엄마 표정은 자신감이 넘쳤다. 나는 그럼 직접 다녀와 보라고 했다. 엄마는 씩씩하게 복도를 따라 뒤로 가더니, 컵라면을 받아서 당당히 자리로 돌아왔다.


 "말이 잘 통했어?"라고 했더니 그냥 달라니까 주더라며 초콜릿 과자도 하나 챙겨 와서 나에게 주었다. 나도 모르게 입 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엄마는 컵라면을 먹고 잠깐 잠들었다. 그리곤 얼마 못 자고 깼다. 잠이 안 오냐, 가려면 아직 한참 남았으니 좀 자라 말했다.


 엄마는 "이상하게 잠이 안 오네. 피곤하지도 않고.. 나는 유럽이랑 잘 맞나 봐. 내가 유럽이 체질인가 봐. 중국이랑 일본 갔을 때는 비행기 안에서 힘들었는데 하나도 안 피곤하고 컨디션이 좋네."라고 했다.


 짧은 비행 거리인 중국과 일본을 갈 때 너무 힘들었다며 유럽엔 절대 못 가겠다 했었는데, 자기는 유럽 체질이란 건 또 뭐야, 끅끅거리며 한참 웃었다.


 엄마는 기분이 좋은지 웃으면서 기지개를 활짝 펴고 말했다.

"여행이란, 참 좋은 거야! 여행은 힐링이고! 휴식이야! 나를 행복하게 해!"


 나는 깜짝 놀라서 엄마를 쳐다봤다. 엄마 입에서 이런 말이 나오다니. 잘 못 들었나 싶었다. 누가 대사를 써준 것도 아닐 텐데. 갑자기 엄마의 표정과 말이 무척 낯설게 느껴졌다. 난 엄마한테서 이런 모습을 본 게 처음인가? 댕~하고 머리 한 대 맞은 것 같았다. 그렇게도 좋은가 싶어 기쁘기도 했다.


"가서 너랑 안 싸우기만 하면 되는데." 나는 이 순간을 잊고 싶지 않아서 휴대폰을 열고 메모장에 엄마의 말을 적어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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