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6월 말, 엄마와 함께 8박 9일간 동유럽 여행을 떠났다.
생각지도 않았던, 순전히 나의 충동적인 결정으로만 시작된 여행에서
우리는 조금은 가까워져 돌아왔다. 이 글은 그 시간들에 대한 기록이다.
새벽 3시가 됐다. 불을 끄고 침대에 누워 쉬다가 알람 소리에 벌떡 일어났다.
"엄마, 씻어. 30분에 출발하자." 엄마는 화장실로 가 빠르게 씻고 어제 자신이 미리 찜해 둔, 일명 '공항 코디' 옷을 챙겨 입었다. 나도 빠르게 준비를 마치고 가방 점검을 마지막으로 한 번 더 했다.
"재밌게 잘 다녀와." 문 밖을 나서는 우리를 보며 아빠가 말했다. 엄마는 "냉장고에 생채랑 반찬 새로 해놓은 거 먹고, 밥 오래두면 밥통에도 냄새나니까 빨리 먹고, 김이랑 햄이랑 먹을 거 다 사놨으니까 해서 먹어." 라고 지시 아닌 지시 같은(?) 말했다.
깜깜한 어둠을 뚫고 택시가 인천공항을 향해 달렸다. 약간의 졸음 때문에 몽롱함이 없지 않아 있었는데, 너무 긴장해서 각성 상태가 된 건지 막상 간다니 설레어서 그런 건지 별로 피로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뒷 자석에 앉은 엄마를 바라보며 "안 졸려? 졸리면 눈 좀 붙여. 어차피 한 시간 넘게 가야해." 라고 했지만, 엄마는 말똥말똥한 눈으로 "잠이 하나도 안 와."라고 했다. 어쩌면 나와 같은 마음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인천 공항 1터미널에 도착했다. "다 왔습니다~ 잘 갔다 오세요!" 택시 기사님이 캐리어를 내려주며 우리를 보고 웃으며 말했다. '드르르륵' 캐리어를 끌고 게이트 안으로 들어갔다. 항공편이 가득 적힌 파란색 공항 전광판이 눈에 들어왔다. 이때부터 나는 '여행이 진짜 시작됐구나.' 실감했다.
여행사 가이드님을 만나기 위해 집합장소로 향했다. 몇 가지 공지사항과 유의점 등을 듣고 티켓팅과 체크인을 하기 위해 항공사 창구로 갔다.
우리가 탈 비행기는 폴란드 국적의 L항공사 비행기였다. 폴란드 항공은 처음 타보는지라 어떨지 걱정 됐다. 혹시 비행기 앞뒤 간격이 좁아 불편하진 않을까 싶었다. 언젠가 모 항공사의 비행기를 타고 암스테르담을 가는데, 10시간 동안 닭장 속 닭이 된 느낌을 받아 괴로웠던 적이 있었다. 그때와 같다면 엄마는 절대 장거리 비행을 못 견딜 것 같았다.
짐을 부치고 바로 탑승 수속을 하러갔다. 이른 아침이라 모든 게이트가 열리지 않아서인지 출국장 줄이 꽤 길었다. "짐 부치고 여기로 와서 이렇게 하는 거야? 어떻게 하는 건지 하나도 기억이 안나." 엄마는 줄 서 있는 내내 나에게 이것저것을 물었다.
엄마는 이전에 두 차례 해외여행을 다녀온 적 있었다. 이모네 식구가 데리고 간 중국 장가계, 초등학교 동창들과 함께 간 일본 후쿠오카. 몇 년이 지난 일이기도 하고 그때도 이모며 친구들이 옆에서 다 챙겨주었다고 했다. 마치 처음인 것 처럼 모든 절차를 낯설어 하고 신기해했다.
나는 보안검색도 출국심사도 어떻게 하는 건지 알려주었고, 엄마는 내 설명과 다른 사람들이 하는 모습을 보며 눈치껏 따라했다. 큰 두 눈이 요리조리 사방을 보며 무언가 배우느라 바빴다. 그런 엄마에게서 처음 해외 배낭여행을 떠났을 때 나의 모습이 보였다.
비행기를 타기 전까지 시간은 충분히 많았고 남는 시간에 우리는 면세점 구경을 하기로 했다. 선글라스가 세일한다고 하여 예쁜 것도 여러 개 써보고, 화장품도 구경했다. 유명 명품 브랜드 매장은 언제봐도 정말 화려하다. 백이며 악세서리며 전시된 상품이 눈길을 끌었다. 가격도 뜨억하고 진입장벽이 너무 높기도 하고, 우리는 뭐가 뭔지 뭘 잘 몰랐다. 둘 다 밖에서만 쓰윽 한번 쳐다보고 지나쳤다.
그러던 엄마가 "어머" 하고 한 가방 브랜드 매장에서 홀린 듯 들어갔다. 그리고 아주 쨍한 초록색 가방을 보더니 "너무 귀엽다." 하고 들어보는 것이 아닌가. 아주 진한 초록색에 둥그런 통모양으로 생긴 작은 버킷 백이었다. 사실 나의 취향이 아니었기에. "이게 진짜 예뻐?" 라고 물었다.
엄마는 밝고 쨍한 것이 좋다며 너무나도 자기 스타일이라고 했다. 가방을 들고 거울을 보며 '엄머, 엄머'를 연발하는 모습을 보고 '사줘야 하나?' 하는 생각이 머리에 스쳤다. 나는 비록 일을 그만둔 실업자의 상태지만, 고가 브랜드도 아니고 이 정도는 능력 선에서 충분히 감당 가능했으니까.
하지만, 점원 분께 가격을 안내 받은 엄마는 곧장 가방을 놓고 매장을 나갔다. "사고 싶으면 그냥 사. 사줄게." 라고 말했지만 엄마는 싫다며 아주 빠른 걸음으로 멀리 걸어갔다. 유럽에도 매장이 있을 테니 그때 다시 고민하기로 했다. (그런데, 여행 중 기가 막히게 3번이나 이 가방을 마주하게 된다.)
엄마를 따라가다 기내용 목 베개가 눈에 들어왔다. 미리 준비하지 못해서 면세점서 사야한다는 것을 또 깜빡하고 있었다. 지금 꼭 사야했다. 비행기 타기 전에 철저하게 만반의 준비를 해야 하니까.
어떤 게 편한지 엄마에게 다 써보라고 했다. 편한 상품일수록 쿠션감이 좋을수록 가격이 올라갔다. 그런데, 엄마는 편한 베개를 찾고도 가격을 비교해서 좀 더 비싸면 별 차이 없다고 바로 내려놓았다. 그래봤자 1~2만원 차이였는데.
"됐어. 한번 사서 10년을 뽕 뽑고 쓸 테니까, 제일 좋은 걸로 사." 나는 카운터로 가서 카드를 긁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