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부부는 강아지와 함께 살고 있다. 결혼을 하면서 나는 강아지를 키울 생각이 없었지만, 운명처럼 가족이 되었다. 동물을 한 번도 키워본 적이 없는 남편이 강아지를 데려오면서 우리는 많은 어려움에 직면해야 했다. 어린 녀석을 데려와서 집에 적응하게 하기 위해서 훈련을 시켜야 하는 게 여간 만만한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우리 집에 온 녀석은 처음에는 적응하기 바빴다. 방안을 휘젓고 돌아다니고 모든 것을 다 알아야겠다는 마음으로 킁킁거리며 냄새를 맡았다. 손바닥 만한 녀석이 우리 집에 있다고 생각하니 괜히 조심스러워지고, 집 청소를 더 열심히 하기도 했다. 우리가 출근을 하면 조그만 녀석 혼자 넓은 집안에서 주인을 하염없이 기다릴 것을 생각하니, 퇴근 후 일정이 있어도 되도록 빠르게 처리하고 집으로 달려오기 바빴다. 부부 둘이 살아온 집이었는데 새로운 존재가 등장하니 집의 분위기도 단번에 바뀌었다. 나름 신혼집이라고 이것저것 감성을 부렸던 것들도 강아지가 있으니 할 수 없게 되었다. 예쁜 인테리어보다는 그 녀석과 함께 살기 위한 물건들이 생겨났다. 이를테면 울타리라거나 강아지 집, 장난감 등이 그것이다.
강아지를 지운 지 몇 달 되었을 때 친청 엄마가 우리 집에 오셔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는 어렸을 때 지겹도록 강아지를
키우고도 또 이게 키우고 싶니?
엄마의 질문에 나는 그저 웃어 보일 수밖에 없었다. 어렸을 때 늦둥이로 태어난 내가 동생이 갖고 싶다고 징징대는 바람에 엄마는 강아지를 데려왔었다. 그 후로도 수없이 많은 동물들을 키웠지만 지금과는 달랐다. 그때는 그저 예뻐하는 것만 할 줄 알았지, 보호자가 되는 것은 다른 차원의 문제였기 때문이다.
서로 다르기 때문에 녀석을 이해하기 위해서 공부를 시작했다. 변을 정해진 곳에 보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벨소리가 나면 강아지가 짖는 이유는 무엇인지, 언제 기분이 좋으며 나쁜지 하나씩 알아야 했다. 노력을 한다고 했지만 서로 전혀 이해를 못 하는 순간도 생겨났다. 새끼 강아지도 사람처럼 자라면서 어린 이가 빠지고 영구치가 나는 시기가 있는데, 강아지는 이때 이갈이라는 것을 시작한다. 새로운 이가 나기 때문에 치아가 간질간질 한 녀석은 집안에 있는 이것저것을 물어뜯기 시작했는데 그 모습은 내가 영상으로 공부했던 모습 이상이었다. 강아지 훈련사가 “참 쉽죠?” 하고 영상에서 가르쳐 준대로해봐도 소용이 없었다. 스트레스가 가득 찬 녀석은 집안에서 뜯을 수 있는 모든 것을 물어뜯기 시작했다.
거기서부터 나도 감당하기가 어려워졌다. 강아지마다 스타일이 다르지만 녀석은 뭔가를 아는 것만 같았다. 우리 집에 있는 가구나 물건들을 뜯으면 다시 사버리면 그만이지만 이 녀석은 여기가 전셋집인 것을 아는 것처럼 주인집 물건만 뜯었다. 퇴근하고 돌아오면 벽지가 뜯어져 있었다. 처음에는 당황스러워서 녀석을 혼내고 벽지를 다시 붙이기 바빴다. 다음날 퇴근하고 왔는데, 이번에는 장판이 뜯어져 있었다. 어떻게 장판을 뜯었는지 신기하기도 하면서 너무 속이 상했다. 임시방편으로 장판을 테이프로 붙여놓고 더 이상 뜯지 못하도록 집안 곳곳을 확인했다. 안 되겠다 싶어서 실시간 관찰할 수 있는 홈캠도 구입했지만 녀석의 말썽을 막을 수는 없었다. 며칠 동안은 잠잠해서 안심을 하기도 무색하게 이번에는 방문의 테두리를 갉아버렸다. 하얗게 칠해져 있던 페인트가 녀석이 물어뜯은 탓에 나무색이 전부 드러나 있었다.
그날 나는 울었던 것 같다. 화가 나기도 하고 속이 상하기도 해서, 강아지를 키우겠다고 했던 내가 너무 섣부른 것 같다며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며 남편에게 하소연을 했다. 처음으로 생명을 책임진다는 것이 얼마나 막중한 일인지 느꼈었던 것 같다. 그저 예뻐만 해서는 우리는 한 가족이 되어 살기 어려울 것 같았다. 그 후로 많은 영상을 보고 공부를 하며 훈련을 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2년이 흘러 여전히 녀석과 우리는 살고 있다. 울기도 하고 웃기도 하며 서로에게 없어서는 안 될 존재가 되었다. 어디에선가 들은 말인데 강아지는 엉덩이를 주면 다 준 것이라고 한다. 아침에 일어나면 남편과 나 사이로 녀석이 쏙 들어와 엉덩이를 갖다 댄다. 그 순간이 너무 행복해서 녀석을 쓰다듬으면 몸을 뒤집어 자신의 배를 까보이며 각종 애교를 부린다. 새침한 우리 강아지는 자신을 허락하는 시간이 그리 길지는 않지만, 그 순간만큼은 나에게 모든 것을 보여준다.
나는 누군가에게 모든 것을 까보였던 적이 있는가. 아무런 대가 없이 자신의 등을 내어주는 것, 자신의 수치스러운 부분도 드러내 보여주며 설령 상처를 받는다고 해도 여전히 곁에 있어주는 것, 녀석이기에 가능한 일인 것 같다. 그렇게 우리는 가족이 되어간다.